1.
저는 가룟 유다입니다. 인류 역사 상에 저만큼 많은 논란을 일으킨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3세기경에 누군가가 창작한 ‘유다복음서’라는 것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저는 또 한 번 화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저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았는데, ‘누군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뛰어난 창작력을 헛되게 사용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긴, 문학적 상상력을 가지고 저를 옹호해 보려고 펜을 들었던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지요. 저로서는 고마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그런다고 해서 저의 잘못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의 제 상태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제 이름 ‘유다’는 유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름 중 하나입니다. ‘유대’라는 말이 우리의 조상, 야곱의 아들, 유다에게서 온 것입니다. 제 이름 앞에 붙어있는 ‘가룟’(Iscariots)이라는 이름은 제가 속했던 자객단(secret society of assassins)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는 ‘시카리’(Sicarii)라고 불리던 이 비밀 단체의 회원이었습니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품속에 단도를 품고 다니면서, 유대 민족을 학대하는 로마인이나, 로마인에 빌붙어 동족을 착취하는 유대인들을 처치했습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목적은 로마인들로부터 나라를 해방시켜 독립 국가로 회복 시키고, 다윗의 영화를 되찾는 데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일에 생명을 바쳤습니다. 저는, 마침내 로마군이 패배하여 퇴각하고 우리 유대 민족이 예루살렘 성전에 깃발을 꽂고 해방과 독립을 축하하는 잔치를 즐기게 될 그 날을 생각하면, 피가 끓어올랐습니다. 제 한 몸을 바쳐 그 일을 이룰 수 있다면, 아무 것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아,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민족의 힘을 집결시킬만한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모세와 같은, 다윗과 같은, 그 옛날 마카비 장군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숨어 돌아다니면서 로마제국의 하수인들을 제거하는 자객들만으로는 민족 해방의 꿈은 실현될 수 없음이 분명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어 로마 제국을 향해 진격해 들어가도록 이끌만한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제가 자객 단에 가입한 것은 그런 지도자가 나타날 때까지 몸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마음의 안테나를 항상 높이 세워두고 그런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나사렛 출신의 요셉의 아들 예수에 대해 소문을 들었을 때, 저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흥분을 느꼈습니다. 20여 년 전에도 갈릴리에서 유다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 로마 정부를 대항해 위대한 전투를 이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독립을 이루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비참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곳, 저항의 땅 갈릴리, 그곳에서 또 한 사람의 비범한 인물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저는 당장 그분에게 달려갔습니다. 한 동안, 저는 그분의 주변을 맴돌며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서서히 그분에게 사로잡혀 갔습니다. 갈릴리 호수보다도 더 깊고 맑은 그분의 눈빛, 하늘의 평화를 담은 듯 한 그분의 표정,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의 무게와 사로잡는 힘, 사람들을 대하는 그분의 세심한 배려와 거부하지 못할 부드러운 권위, 그분의 정제되고 계산된 듯 한 몸짓과 발짓까지! 저는 그분에게 완전히 압도당했습니다. 바로 이분이다 싶었습니다. 제가 자객단의 일원으로 숨어 지내면서 기다려 왔던 그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았습니다. 이분이면 내 마음의 꿈을 이뤄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저는 기회를 보다가 홀로 계신 예수님을 찾아가 제 뜻을 말씀 드렸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죽기까지 따르겠다는 제 의지를 보여드렸습니다. 주님이야말로 제 뜻을 이뤄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으니, 저를 제자로 받아 달라고 청했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이루실 때, 제가 한 자락이라도 거들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해 저의 피를 쏟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첫 대면에 저는 약간 실망했습니다. 저의 뜨거운 마음을 대하시는 그분의 태도가 꽤 냉정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이 저를 끌어안아 주시면서, "그래, 내가 자네 같은 사람을 기다렸네!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났는가? 잘 왔네. 우리 함께 해 보세. 우선, 우리의 정체를 숨기고, 때를 기다리세. 다른 제자들에게도 우리의 뜻을 발설하지 말게"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제 마음 속을 뚫어 보기라도 하시는 듯, 정지된 시선으로 한 참 저를 응시하시더니, "그렇게 하게"라고 답하셨습니다. 저는 잠시 무안해졌습니다. 하지만, 금세 그 감정을 떨쳐 버렸습니다. 아직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앞으로 내 존재를 드러내면, 그 때는 나를 알아주실 것이라고 믿고, 열심히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 열심과 헌신을 인정받아, 저는 열 두 제자 명단 안에 들기도 했고, 예수님의 일행의 금전출납을 전적으로 맡아 관리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2.
저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 중에서 그분의 속마음을 아는 소수에 저 자신이 속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분의 숨겨진 의도를 아는 제자들이 또 누구였는지, 당시로서는 알 수 없었습니다. 로마 정부를 뒤엎고 위대한 다윗 왕국을 세우는 일은 눈빛으로만 말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또한 눈빛만으로도 교감할 수 있는 강렬한 열망이었습니다. 저는, 멋도 모르고 흥분하여 따라다니는 광신자들 사이에, 민족 해방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숨기고 그들 중 하나인 것처럼 행세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아니, 예수님도 제게는 그런 분으로 보였습니다. 그분은 방랑 설교자처럼 행세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교하고 다녔지만, 마음속으로는 때를 기다리면서 뜻을 함께 할 사람들을 모으고 계셨다고 믿었습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집결된 민중의 힘을 더 믿었던 사람이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보다는 위대한 이스라엘을 세우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멀리 계신 하나님보다 가까이 있는 주먹이 더 강하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었느냐고요?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생각합니다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들 중 실제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25%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는, ‘선민’ 즉 ‘하나님의 택함 받은 민족’이라고 믿었던 우리 유대 민족이 로마의 압제 밑에서 얼마나 고통당하고 있는지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밤을 새워, 금식해 가며, 철야를 해 가며, 나라를 회복시켜 달라고, 통곡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압제 밑에서 우리 민족이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극심하게 고통당하고 있었는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런 고통을 직면할 때마다, 저도 때때로 하늘을 향해 부르짖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늘로 부터 아무런 메아리도 없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은 계시지 않거나, 계신다 해도 우리를 구원하기에 무력하거나, 우리를 구원하기에 관심이 없음에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힘을 믿기로 했습니다. 저는 제 인생을 민족 해방의 제단 위에 바치기로 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우리 손에 달려 있고, 우리하기에 달려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객 단에 가입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저는, 예수님도 저처럼, 종교인으로 가장하고 무장 봉기를 일으킬 때를 기다린다고 믿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교할 때 혹은 하나님에 대해 가르칠 때, 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관심사는 다른 데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3.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께 대한 제 믿음은 힘을 잃었고, 마음은 조급해지고 불안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종교인을 가장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종교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그분이 ‘진실로’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분이 추구하는 것이 위대한 다윗 왕국의 건설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님 나라’인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점점 더 깊어갔습니다.
마침내, 유월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저는 몹시 흥분했지만, 그분은 어김없이 제 기대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즈음부터는 제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들을 더 많이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권력자들의 손에 넘겨져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암시를 여러 번 주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거사를 위한 조건은 충분히 무르익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도 널리 퍼져 있고, 그분에 대한 기대감도 더할 나위 없이 높았습니다. 유월절 축제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고, 로마 군인들은 초긴장 상태로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무리들을 향해 손짓하며, "일어나라, 동지여!"하고, 한 마디만 외치면, 모두들 품속에 품었던 무기를 꺼내들고 로마 군인들을 단숨에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바로 거사의 장본인인 예수님만 딴전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내일이면 유월절이 시작되는데, 때를 기다리는 동지들은 숨을 죽인 채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님은 한가하게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무슨 말씀이라도 하실 줄 기대하고,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사 도중에 예수님이 갑자기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더니, 저희들의 발을 하나씩 돌아가면서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씀이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인 것이다"(요 13:14-15)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절호의 찬스를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이 소위 말하는 ‘임계점’ 즉 tipping point였습니다. 이 시점에 심지에 불을 댕기면 온 천지는 불바다가 될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의 중대한 선택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대로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뭔가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음에 분명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떨치고 일어나도록 상황을 조성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음식을 먹으면서 속으로 은밀한 계략을 짰습니다. 예수님을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넘겨서 위기를 조성하려는 계략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 예수님이 주신 가르침 때문에 어떻게든 그분을 제거할 구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이용해 예수님으로 하여금 봉기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상황을 만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신변에 위협이 닥쳐오게 되면 예수님은 필경 저항할 것이며, 잘 하면 그것이 로마군에 대한 저항 운동의 도화선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제 계산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민족 해방이 이루어지면 더 바랄 것이 없고, 만일 예수님이 제가 기대했던 인물이 아니었다면, 그 일로 인해 체포당하고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 싶었습니다. 허황된 종교인들은 없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제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4.
마음속으로 이런 계략을 짜고 있는데, 예수님이 갑자기 저를 깜짝 놀라게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뜬금없이,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라고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사실, 여러분의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번역해서 그렇지, 예수님이 실제로 사용하신 단어는 훨씬 더 모호했습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라는 뜻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짐작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꼭 제 마음의 비밀을 그분에게 들킨 것 같아 적잖이 놀랐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안이 벙벙해진 베드로가 예수님 옆에 있던 요한에게 고갯짓을 했습니다.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여쭤 보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친형처럼 따랐던 요한은 그분에게 바짝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이 빵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26절)라고 답하셨습니다.
모두가 긴장한 상태로 그분을 응시하는 가운데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예수님은 천천히 빵 한 조각 집어 들더니, 포도주에 적신 다음, 바로 제게 건네주는 것이 아닙니까?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27절)라는 말씀과 함께 말입니다. 저는 어쩌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그분의 눈을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그 눈빛에 다시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그 떡을 받아들었고, 황망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습니다. 밖에는 손에 잡힐 듯 한 어둠이, 아주 진한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잠시 동안, 저는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에 휩싸였습니다. 예수님은 내 마음을 다 읽고 계셨던 것일까? 예수님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얼마나 자주 경험했는가? ‘네가 할일을 어서 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은 내가 하려는 일을 인정하신다는 뜻일까? 아니면, ‘네가 선택한 길이니 그 길을 가라’는 포기의 말씀일까? 자신의 신변에 위협이 될 줄 알면서, 어떻게 예수님은 그렇게 평온하게, 내가 하려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려는 것일까? 나는 어찌해야 하나? 이 길로 곧장 대제사장 관저로 가야 하나, 아니면 예수님께 다시 돌아가야 하나?
저는 또 다시 선택해야 했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선택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선택한 길을 포기하고 돌아서기에 저는 너무 멀리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와서 달리 선택한다면, 저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고, 그동안 살아왔던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인생이 온통 헝클어져 버릴 것처럼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가고 있는 길로 그대로 진행하기도 두려웠습니다. 마치 제 인생의 선택의 마지막 지점에 도달한 듯 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마지막 지점에서 저는 문득 공포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생각하기도, 대면하기도 겁이 나는 현실이 이 마지막 선택 앞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마치,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의 깊은 계속 속으로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 때, 왜 제가,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돌아서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고 느꼈는지, 생각 할수록 아쉽습니다. 알고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돌아서기에 시간이 충분했고, 돌아가기에 어려울 만큼 멀리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때라도, 다 내려놓고 돌아섰다면, 저는 희망의 땅, 생명의 땅으로 옮겨갈 수 있었는데,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고집 때문이었는지, 무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사탄의 속임수 때문이었는지, 저는 그만 그 길로 곧장 나아가는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끝은 ‘어둠’(darkness) 이었습니다. ‘빈탕’(emptiness)이었습니다. ‘희망 없음’(absence of hope) 이었습니다. ‘생명 없음’(absence of life)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그 ‘온갖 없음의 극치 상태’(extreme state of absence of everything)에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지옥’이라 부릅니다.
5.
여기까지가 저의 고백입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 to learn from other’s mistakes) 의 교훈을 얻는 데 민첩한 분들은 이미 정리가 되셨겠습니다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잘못을 범했던 사람으로서, 아직 돌이킬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여러분들에게, 저는 두 가지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돌아가는 데에는 ‘너무 늦은 때’는 없으며, 하나님께 돌아가기에 방해될 정도로 ‘큰 죄’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잘못된 길에 서 있다고 깨닫는 때가 가장 이른 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머지않아, 돌이킬 수 없을 때가옵니다. 그러니 지금 하나님께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중, 하나님께 돌아가기에는 너무 큰 죄를 지었다고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쪽에서 보니 커 보이지,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하찮아 보일 정도로 작은 죄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큰 죄도 없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태도입니다. 마지막이다 싶을 때라도, 너무 늦었다 싶을 때라도,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회개하고 돌아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이 제게,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는 말씀과 함께 빵 조각을 건네주실 때, 그 때라도 돌아서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보니, 그 말씀은 ‘이제라도 돌아서라’는 뜻이었습니다. 아마, 당시에도 저는 말뜻을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못 들은 척 했던 것이지요. 혹은, 황망하게 바깥으로 나왔을 때, 그 어둠 속에서 주저주저할 때, 그 때라도 돌아섰다면, 제게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결국 제가 잘못 선택했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모든 것을 끝내야 겠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그 때에라도 돌아섰더라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번번이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저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제가 섬겼던, 제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는, 돌아서기에 늦은 때도 없고, 돌아가기에 너무 높은 장벽도 없습니다.
둘째, 여러분이 선택하는 그것이 결국 여러분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들은 자주, "선택은 내가 한다. 내가 주인이며, 내가 주체다"라는 생각에 속을 때가 많습니다. 예언자 오바댜를 통해, "너의 교만이 너를 속이고 있다"(3절)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선택의 주체라고 생각하고 선택하지만, 실은 내가 선택한 그것이 나를 선택하고 나를 지배합니다.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하면, 그 선택이 여러분을 선택하고 여러분의 삶을 지배합니다. 내 주먹을 믿기로 선택하면, 그 선택이 여러분을 선택하고 여러분의 삶을 지배합니다.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들이 쌓여서 내 인생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선택 앞에서 삼가 조심하시고, 충분히 기도하시고, 아무리 사소한 선택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하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선택하시고, 사랑을 선택하시고, 생명을 선택하시고, 빛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희망을 선택하면 그 희망이 여러분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사랑을 선택하면 그 사랑이 결정합니다. 생명을 선택하면 그 생명이 결정합니다. 빛을 선택하면 그 빛이 지배합니다.
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아니라 미움을,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빛이 아니라 어둠을 선택하는지요! 잘못된 선택이 반복되고 축적되면 결국 지금의 저처럼 ‘온갖 없음의 극치 상태’ 에 이르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갈까요?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희망을 선택하라는, 생명을 선택하라는, 사랑을 선택하라는, 빛을 선택하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응답하기에 주저하는지요! 왜 우리는 이 좋은 복음을 전하는 데 인색하고 게으른지요!
6.
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모두, 저와 같은 상태에 이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위협이나 협박이 아닙니다. 간절한 호소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늘, 영원히, 희망의 땅, 사랑의 땅, 생명의 땅, 빛의 땅에 견고하게 세움을 받고 그곳에서 견고하게 서서 살아가기를 빕니다.
사랑의 주님,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선택하며 살도록,
희망의 주님,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선택하며 살도록,
생명의 주님,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며 살도록,
빛의 주님,
어둠이 아니라 빛을 추구하며 살도록,
오 주님,
저희를 도와주소서.
사랑의 복음, 희망의 복음, 생명의 복음, 빛의 복음을
믿게 하시고
살게 하시고
나누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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