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제자'인가? 그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가? | ||||||||||||
[ 제자도 ] 예수를 따르는 우리, 리더인가 제자인가? 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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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원두우, 元杜尤, 1859. 7. 19 ~ 1916. 10. 12.) 선교사 서거 100주년을 맞아 지난 5월 28일과 29일 새문안교회에서 제9회 국제심포지엄이 열려 언더우드의 생애와 ‘제자도’(弟子道, discipleship)를 조명했다. 주강사였던 제프리 자핑가 박사는 제1강 ‘누가 제자인가’와 제2강 ‘제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제3강 ‘리더인가? 제자인가?’를 열강했다. 자핑가 박사의 동의 얻은 주최 측의 허락을 받아 강연문을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제1강 누가 제자인가? 제프리 자핑가 박사 / Dr. Jeffrey Japinga, 맥코믹신학대학 부학장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신학적, 사회학적, 역사적, 개인적, 조직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크리스천 리더인 호레이스 G.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의 유산을 기념하는 제9회 호레이스 G. 언더우드 심포지엄에 여러분과 함께 하도록 초대해 주신데 대해 정중한 감사 인사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같은 미국 신학교 졸업생이지만 작은 자질을 제외하고는 그에 비할 어떠한 것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 작은 것이란 바로 우리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 둘 다 봉사의 은사와 재능을 신실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어 세상 에 복음이라는 좋은 소식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저의 바람은 우리가 언더우드의 행적을 알게 되어 저의 일이 적게나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틀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누구인가: 제자도’, 즉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의 핵심에 이르는 신학적인 개념을 토론할 기회를 갖겠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제자가 무엇이며 제자는 누구입니까? 내가 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이름입니까? 아니면 그 밖에 누군가 그 직함을 내게 주어야 합니까? 우리의 문화가 점차 복잡해지고 우리 주변 세계가 매일 새로운 변화들과 새로운 도전들을 가져올 때, 제자가 되는 것과 제자도의 의미는 변하는 것일까요? 끝으로 교회의 리더로서 우리가 제자 삼도록 우리가 어떻게 부름 받았는지, 또한 제자들이면서 다른 사람들을 이끌도록 우리가 어떻게 부름 받았는지를 어떻게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면서 리더가 될 수 있을까요? 이것들은 여러 해 동안 특별히 지난 최근 몇 달 동안 나의 생각과 연구와 기도를 형성해 온 질문들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일련의 토론 주제와 아래의 제목들로 여러분들과 함께 탐구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제자’라고 부를 때 그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가? 우리가 ‘제자’로서 사람들을 이끌 때 어떠한 자질을 보여줘야 하는가? 저는 실천 신학자로 여러분 앞에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미국 장로교(the Presbyte-rian Church U.S.A.)라는 여러분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면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다른 상황에서 여러분께 온 것입니다. 제가 그 상황에 대하여 말해보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제 말을 들을 때, 단순히 제 언어를 여러분의 언어로 번역할 뿐 아니라 저의 상황을 여러분의 상황으로 번역하기를 권합니다. 자신에 물으십시오. 이것이 또한 우리에게 해당하는 말인가? 상황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는 사실이 아니거나 적어도 유사하지 않은가? 그리고 유사하지 않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사실이며, 똑같이 도전을 주거나 미래에 통찰력을 제공하는가? 우리가 함께 하는 일의 일부를 말하자면 여러분 자신의 제자도와 리더십으로의 소명에 대한 나의 말에 긍정하거나 도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제자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가 출발한 곳, 우리의 역사와 자기 성장 경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한 두 세대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제자도'라는 단어는 우리들 언어의 일부가 아니었고, 교회에서 명시된 실천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라는 말은 열 두명의 특정한 사람들: 시몬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포함한 예수님을 직접 따르던 자들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나머지 우리들 - 다시 말해서 여러분과 나, 그리고 우리 가운데 교회의 삶에 참여한 자들을 가리키는데 - 바로 신자요,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신자들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저들을 “제자로 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장로교인들로서, 우리는 여러 세기 동안 요리문답, 믿음의 진술, 조직신학에 의존해서 사고와 신앙을 지도하고 표현하여 일부 추종자들에게 바른 신앙이 생겨나게 했습니다. 신학교를 만들어 지도자들로 하여금 반드시 그 신앙을 알게 했습니다. 뉴 브런스윅 신학교는 언더우드가 졸업하기 이미 100년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우리는 구조와 계층을 만들어 이러한 신앙의 이해를 확실히 따르게 했고, 사실 땅 끝까지 전하게 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델은 믿고 속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련의 신앙들을 처음 배우고 받아들이면, 그 신앙으로 인해 특정 교회에 소속되고, 우리가 바라는 어떤 행위에 도달하게 되는 식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정직하게 그리고 성서적으로 우리가 얻게 되는 유산입니다. 제자 마태의 지상명령에는 이러한 가르침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열방을 제자로 삼아 그들을 가르치라 …… 초대교회 생활에서 이 일은 너무도 중요해서 가르치는 능력이 교회 리더를 선발하는 기준(디모데전서 3:2)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가르치는 은사를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성령께서 주신 능력으로 거론했습니다(에베소서 4:11-16). 교회가 점점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근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예수님에 대한 우리들의 경험을 개념이나 명제로 번역할 필요가 늘어났습니다. 히브리 성경을 배운 유태인들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이방인을 새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초대 교회는 요리문답의 체계, 즉 사람들에게 그러한 개념들과 명제들을 형식적으로나 비형식적으로 가르치는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종종 새신자들이나 초심자들은 신앙을 더 깊게 그리고 완전히 배우기 위해 세례 전 2년 또는 3년간 학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한편, 이러한 지역 관행에 대한 커다란 논쟁이 논쟁을 거듭함에 따라 초대교회는 교회가 진실히 믿는 것과 씨름하였습니다. 승자들과 패자들이 있었고, 승자들이 미래를 결정했습니다. 계급이 발전하고, 특권도 늘어났습니다. 리더들이 통제와 권력을 위해 씨름하는 동안 불일치는 분열을 낳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지상 대명령에 따라 제자를 삼기도 했습니다만 점차 우리는 우리의 일을 그런 식으로 규정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우리 사역의 초점이 점차 제자 하나를 다른 제자들과, 그리스도인 하나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대조적으로 구분 짓는 식이 되고, 먼저 가톨릭교도, 청교도, 개신교도와 같은 서로에게 다른 이름을 부여하고, 그 다음에 장로교인, 침례교인 오순절교인 등 하위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신학도 나누어집니다. 세상에 사람을 보내어 우리가 믿는 내용을 가르치고 다른 사람을 개종시켰습니다. 그 중에는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Underwood)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도 있는데, 장로교인들이 이해하고 실천하는 개혁 장로교회의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타오르는 열망을 가슴에 안고 이 나라에 왔습니다. 참으로 많은 지역에서 기독교의 이처럼 살아 있는 표현으로 바른 믿음의 신앙 뿐 아니라 문화적 우위를 우선 고려하는 신앙을 열망했습니다. 우리 주변 세계가 비교적 인정이 되고, 교회가 거룩하고 속된(5세기 전만해도 오늘과 같은 구분은 없었다) 교육사업의 중심에 서게 됨에 따라, 이 모델은 비교적 성공했습니다. 교회의 방식은 문화의 방식이었고, 문화의 방식은 교회의 방식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은 지위가 높아지고 구성원들의 존경을 얻으면서 공동체의 원로가 되었습니다. 교육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신앙을 전달했습니다. 변화가 서서히 일어났고, 신중하게 다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곳 한국 교회를 포함하여 전 세계 기독 교회로 성장한 여러 세기 지난 모델에서 그 밖에 무언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사실 이 일은 여러 세기 동안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영향은 먼저 유럽에서, 다음에는 미국에서 그리고 지금은 산업화되고 전자로 연결된 대부분의 세상에서 감지되었습니다. 복잡하고 현대적인 사회는 사람들의 삶의 중심이던 교회의 위치를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변화의 씨를 뿌리고, 더 많은 부분의 사적 자유를 주장하고 신장하려는 고귀한 노력에 참여했습니다. 철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개인의 정체성을 군주나 교회에서 찾으려 하기 보다는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의 자아 구축을 통해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신의 인간 이성이나합리성에 의존하여 무엇이 진실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계몽주의는 처음 당시 기독교의 발생지이자 중심지인 유럽에 뿌리를 두었다가 점차 미국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도래하면 교회는 처음에는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확실하게 서양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잃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50년 미국 교회에 구성원이 늘어나긴 하였으나 믿음에 기초했다기보다는 사회적인 면의 성장이었습니다. 점점 더 사람들은 교회가 단언하는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리고 교회라는 조직을 믿는 것을 멈추는데, 교회 조직이 믿음의 모습을 수용하면서도 또한 그들 주변의 세상 속에서 보는 행위도 허락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 타락, 권력투쟁, 부정한 동맹 등등으로 믿음과 실천행위가 더 이상 외관상 연결되지 않는 듯 보이고, 내부 일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교회가 점점 고립되고 사람들의 충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제 말의 뜻을 설명하기 위한 예로 미국 교회에서 나온 몇몇 통계를 제시해 보겠습니다. 마크 차베스(Mark Chaves)는 미국의 종교 연구가로서 2011년에 사람들이 교회와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있고 또 교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놀라운 변화와 관련해 일련의 연구 결과물들을 출판했습니다. 변화한 현실 중에서 그 어느 하나라도 대한민국에 맞는 것이 있는지, 만일 있다면, 교회생활의 모델이 어떻게 그 변화들을 고려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 일단 미국인의 종교적 태도는 놀라울 만큼 안정적입니다. 적어도 ‘성경을 매주 읽고’(31%), 자신을 ‘매우 또는 극히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며(86%), ‘하늘의 존재를 믿는다’(86%)라고 답하는 미국인들의 비율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정확히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부르고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은 아닙니다. ○ 그러나 ‘어떤 종교와도 무관하다’고 말하는 미국 사람들의 숫자는 1957년 3%에서, 2008년 17%로, 그리고 최근에는 거의 25%로 높아졌습니다. 젊은 세대의 경우 거의 두 배나 됩니다. 적어도 5년간 종교적인 예식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의 숫자는(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인구의 4분의 1 이상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밀레니얼(1980~2000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의 수치는 겨우 19%입니다. ○ 젊은이들의 종교적인 견해의 변화는 더욱 두드러집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는 단 하나의 참된 종교이며 모든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되어야 한다”는 진술에 동의하는 고등학생들의 숫자는 1924년 91%에서 1977년 41%로, 오늘날은 2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 자신은 믿을 수 없지만 외부 제도는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문화의 지배적인 견해였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을 거치는 동안 실재는 뒤바뀌었습니다. 이제 압도적인 다수가 자신은 믿을 수 있으나, 제도에 의해 제기된 외부적인 속박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점차 믿을 수 없는 제도들 중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최종 결과는 무엇입니까? 전 세계 예수 그리스도 교회는 극적인 전환점에 놓여 있습니다. 미국인 작가 필리스 티클(Phyllis Tickle)은 교회가 매 500년마다 가공할만한 변화의 형태를 겪는데 이는 옛 생각들이 거부되고 새로운 생각들이 나타나 그 자리를 차지하는 대변동이라고 봅니다. 종교개혁이 최근의 대 변혁이었으며, 티클이 보기에 우리는 새로운 변혁의 중간에 위치하며, 그 변혁은 바로 기독교의 외관과 실천을 영구히 변화시킬변혁이라고 말합니다. 티클의 이론이 옳든 옳지 않든, 우리는 필리스가 묘사하고 있는 현실의 실재를 볼 수있습니다. 과거 우리가 행한 것은 더 이상 미래에 적합하지 않으며, 미래의 모습도 다소불투명합니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는 자신이 속한 문화와 상황 변화의 극적인 본질을, 특히 전자기기에 의하여 밀접하게 연결된 세계 지역에서, 부인할 수 없습니다. 토마스 호킨스(Thomas Hawkins)는 오늘날 항상 변하며 결코 안정적이지 않은 오늘날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을 “(카약 선수들이 직면하곤 하는-역자 주) 하얗게 부서지며 빠르게 흐르는 영구적인 급류(permanent whitewater)”의 이미지를 사용해 묘사합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변화와 변형 때문에 교회가 오늘날 말해야 하는 문제와 도전은 더 이상 바른 신학만 고집해서 단순히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한 지식이 있다고 해도 과거 노력의 주된 흐름이 세상에서 또 교회에서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떠한 개인도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며, 한정된 한 가지 학습도 그렇습니다. 어떠한 일련의 단순한 설명으로도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복잡한 사회의 모든 함축된 의미를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지난 3월 새문안로의 한 호텔에서 이세돌 9단과 세기의 바둑 대결을 펼쳤던 - 역자 주) 알파고(AlphaGo)의 도전을 포함하여 다음 강좌에서 이 주제를 더 많이 다루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제도도 광범위한 안내를 제공할 만한 권위나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또 다시 ‘제자’와 ‘제자도’라는 언어 문제로 되돌아옵니다. 역사적으로 12 사도들을 명명하고, 그 외의 따르는 사람들을 신자 또는 그리스도인 또는 ‘그 길을 걷는 사람들’로 불렀던 신앙 안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제자도에 참여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 자신 전체를 예수의 제자들로 바라보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다양한 문화에서 그것은 과거와 어떻게 다릅니까? 또, 왜 그래야만 하느냐는 질문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토마스 그룸(Thomas Groome)은 로마 가톨릭 교육가이자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레위기 19장 2절을 인용해서, 이러한 제자도를 “거룩과 온전함”의 개념 중심으로 일하도록 우리를 불러주신 것의 준거로 삼았습니다. 제자도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시작하는 글로 된 요리문답이나 신학이 아니라 먼저 사람들의 삶 속으로부터 시작하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나서 성서, 믿음, 성만찬, 기도, 도덕, 그리고 실천과 같은 그리스도 신앙의 상징들과 표현들로 옮겨 가며 마침내 새로운 확신과 결단과 함께 사람들 삶 속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룸(Groome)에 의하면 “삶에서 신앙으로 그리고 다시 삶으로” 가는 것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영혼을 중요한 이슈나 주제와 연관 지으며 그들이 하는 표현, 반성, 그리고 신앙의 공유를 격려하고 기독교 이야기를 접하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영혼 안에 전개되는 개인적인 반응을 표현하도록 격려하며, “살아왔고 살아있는 신앙” 으로의 결단을 요청합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지식의 원천으로 이해하는 데에서 벗어나서 신앙을 전 세계에 쏟아져 살아 흘러가는 물로 이해하는 쪽으로 가는 운동입니다. 제자도는 어떤 심오한 방식의 구조나 제도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삶과 전공동체의 복지에 뿌리박은 개별적 공동의 헌신에 바탕은 둔 초대교회 균형으로의 회귀입니다. 단순히 자기 안에 있는 자들 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도 똑같이 초점을 맞춥니다. 지식과 행동, 믿음과 정의, 사고와 행위에 대한 욕구 사이의 균형을 맞춥니다. 더 이상 교회는 고립된 영토의 신분, 우리 가운데 있는 자들만 순수하다는 지식에 만족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제자와 제자도를 새롭게 강조하는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거의 20년 전 미국 교육지도자인 대니얼 베네딕트(Daniel Benedict)의 모델을 소개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기독교교육을 제자도의 실천으로 재구성한 지도자이며 그 당시 제 자신이 제자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대했고 오늘날도 그것은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이전 상사이자 멘토이며 미국개혁교회의 명예사무총장인 웨슬리 그랜버그 마이클슨(Wesley Granberg-Michaelson)은 제자도 이해를 정착교회와 선교교회로 구분 짓습니다. 초대교회처럼 우리는 또다시 정착교회가 내적인 규칙들과 권력투쟁에 몰두하던 시대를 지나 또 다시 우리가 세계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헌신이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의신학,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실천의 바로 그 중심부에 위치한 안디옥 교회와 더욱 분명히 닮은 시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교회 제도의 (현재 삶과의) 무관성에 대한 자신의 좌절감에서 출발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자신이 상상한 교회상을 바탕으로 예언적인 글을 썼습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할 때만이 교회가 됩니다. 첫째, 가난한 자들에게 그 모든 재산을 주어야 합니다. 목사는 오직 청중들이 자유롭게 드린 헌금에 의지해서 살아야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일부 세속적인 직업에 종사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돕고 섬기며 일상에서 인간생활의 세속적인 문제들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소명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해줘야 합니다.”(옥중서신 p.282) 제자도를 위한 교회의 명령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면, 그 후에는 곧 사도행전 1장에서처럼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오게 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나의 증인이 되라.’ 즉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시대와 장소로 복음의 진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처럼 말씀, 가르침, 행위, 삶, 죽음,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들고 와서 그것을 특정 시간에 특정 공동체에 전하는 것처럼, 교회의 본질적인 부르심과 제자 삼는 과업은 하나님이 행하셨고,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행하시는 것을 증거하여, 이렇게 은혜와 치유가 넘쳐나고, 이렇게 세상과 우리 안에 역사하는 셀 수 없는 죽음의 권세에 승리를 거두고,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꿈을 왜곡하고 훼손하며 줄이는 이 모든 것을 치유하는 예수님의 권능을 증거하는 사역입니다. 역사를 통해 경우가 어떠하든지 이것은 오늘날 사실입니다. 교회는 구성원들에게 취향에 맞는 사회적인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지도자들의 이기적인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도의 교회는 우리들과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세상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창조를 증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은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이해는 전통적인 형태의 기독교와 장로교의 교리 교수(敎授)에 있어 절대 무관하지도 불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전처럼 필요하며, 기독교가 처음 시작한 1세기처럼 긴급하기까지 합니다. 그때에는 단순히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는 기독교의 제도적인 지식이 없었고, 기독교가 차지하고 그 영향력과 힘을 의존할 문화적인 중심지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긴급한 필요에서조차 1세기 교회는 바른 믿음이 알파와 오메가가 아니며 그 자체로 교회를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밖으로 세상을 향하여 배우고 행동했던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1세기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기를(엡 4:1)” 간청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처신에 의해, 환대와 포용 그리고 사랑과 같이 외부에 초점을 둔 실천에 철저한 헌신을 보고 그들의 됨됨이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온갖 역경을 딛고 예수님을 따랐기에 그리스도인, 바로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제자였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노력을 시작했던 곳이며, 우리가 지배하지 않는 문화에서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장소였습니다. 제자도 사역에 헌신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신앙을 어떻게 가르치며 본받을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외적으로 사랑 소망 믿음의 복음을 가지고 문화 속으로 진입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과거의 관행들 가운데 무엇이 우리의 됨됨이, 우리가 일하는 방식에 필수적이며 무엇이 소모적인지를 결정하는 어려운 내적인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더 상세히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사역에 목회적 상상력을 회복하라시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급격한 메시지, 섬김, 희생, 이웃과 원수와 그리고 자신을 향한 비이기적인 사랑 등을 우리에게 계시한다고 믿습니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위축되고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복음의 메시지와 권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새로운 일을 행하십니다. 그것이 미래에는 달라 보일지 모릅니다. 아니, 달라 보일 것입니다. 미래에 심지어 신앙의 대상이 확고부동하게 남아 있을 때조차 말입니다. 우리는 아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교회라는 위치로 우리를 부르신 소명을 잃어버릴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 내가 그렇게 자신이 있느냐고요? 이유는 내가 한 이야기를 알기 때문이지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준 이야기이며 또 내가 계속해서 가르치고 설교하고 여러분도 또한 그랬던 이야기이지요. 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한 백성을 하나님 자신의 백성으로 택하셨으며 그들을 노예의 사슬에서 풀어 주셨고 그 백성들을 광야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으며 그들에게 항상 그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상기시켜 주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 백성들은 사람들이 늘 그렇듯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의 체계들과 생각들을 위해서 손수 보내신 선지자들을 무시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때가 차자 다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신 성자 하나님은 나환자들에게 입 맞추셨고, 매춘부들의 친구가 되셨고, 권위를 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부정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셨지만, 그가 하신 마지막 식사에서 그는 오늘날까지 기억되어 온 방식으로 제자들과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는 떡과 잔을 들고 우리에게 같은 것을 하라고 말씀하셨고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와 함상 함께 하실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며 용서는 실재적이고, 사람들이 중요하며 그래서 그들을 위해 돌아가셨으며 후에 우리에게 우리가 가진 모든 것과 함께 이를 실천하라고 하셨다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우리 자신의 생각과 체계 속에 빠져있을 때조차 하나님은 여전히 성실하십니다. 이 이야기와 이야기의 기초가 되는 믿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 싼 세계는 변하며 우리가 이 이야기를 말하고 실천하는 방식은 틀림없이 변합니다. 제자도에 초점을 맞춤으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변화시킬 것이며 또한 변화시킬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에 리더십을 바라보는 방식을 분명히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교회라는 곳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킬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날 세계는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합니다. 복음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논의들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 그 확실한 소망에 뿌리를 둔 또 다른 두 대화들을 통해 다루어 질 것입니다. 시간을 내어주시고 관심을 기울여 주어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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