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이드 존스

復興의 緊縛性 (막9:28-29)

새벽지기1 2016. 6. 4. 11:35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 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9:28-29)

제가 이 두 구절, 특히 29절 말씀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부흥이라는 큰 주제와,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안고 있는 부흥의 긴박성을 함께 숙고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이 문제야 말로 매우 긴박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설교는 부흥을 촉진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교리를 이해할 때에만 이 부흥의 필요성을 진실로 알고 싶어하고 그 부흥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제와 특별하고 직접적이며 명백한 관계가 있는 어떤 요점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요점들 가운데 첫째 되는 것은 섬뜩할 정도의 영적인 궁핍함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러한 문제들에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또 다른 이유는 올해가 1959년이기 때문입니다. 이 해에 많은 사람들은 100년 전, 그러니까 1859년에 일어났던 위대한 부흥, 종교적 대각성 운동, 하나님의 성령의 비상한 역사등을 기념하고 축하할 것입니다. 1859년에 일어난 부흥은 처음에는 미국에서 그 다음에는 북아일랜드로 퍼져나갔고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의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심지어 잉글랜드의 여러 지역에까지 그 부흥의 물결이 파급되어 나갔습니다. 우리도 100년 전에 일어난 부흥을 기념하는 일에 참여하여, 그러한 일이 왜 일어났으며, 오늘날 이 중대한 시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왜 그 일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이 합당하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일은 교회 전체의 문제이지 교회의 몇몇 지도자들에게만 국한된 관심거리가 아님에 틀림없습니다.


부흥의 역사는 이점을 명백히 밝혀 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때로 아주 이례적인 방식으로 행동하시고 반드시 목사들을 통해서 부흥을 일으키고 촉진시키며 그 부흥의 열기를 유지시키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매우 비천하고 교회 내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체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러한 일을 행하시기도 합니다. 교회는 모든 지체가 서로 연관되도록 구성되어 있으므로 모든 지체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부흥의 주제를 환기시키는 것은 부분적으로 오늘날 교회의 지체들이 스스로 매우 적은 일 밖에 할 수 없다고 느끼거나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체들은 자신이 해야 할 모든 일을 다른 사람들이 해주기를 바라고 방관하려고만 합니다. 물론 이것은 오늘날 인생 전체를 특징짓는 요소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직접 운동 경기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군중 속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이 경기하는 것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한 때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즐거움을 창출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등장하여 사람들을 유쾌하게 하는 오락거리와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경향이 교회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관중 속에 그저 등을 대고 앉아, 한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하기를 기대하며 쳐다보고 있다는 증거를 가면 갈수록 더 많이 발견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한 신약의 교훈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지체들은 저마다 책임과 기능이 있고, 가장 중대한 의미에서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교회의 교리에 대한 사도의 위대한 강론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지체들이 대단해 보이는 지체들과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몸의 각 지체는 주어진 기능을 해야 하고,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하게 준비되어야 하며, 언제나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각자는 가장 절실한 긴박감을 가지고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로 저는 서슴없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개개 그리스도인들로서 오늘 날 교회와 세상의 상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우리는 실로 매우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입니다. 만일 그저 개인의 유익만을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어린 갓난아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장했다면 주변 상황이나, 사회 상태나, 교회 상태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것은 우리 각자와 모두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이 사건을 숙고하려 합니다. 특히 이 사건의 마지막 진술에 나오는 두 구절을 중심으로 해서 말입니다. 이 두 구절은 일종의 에필로그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 앞부분에는 주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변화산상에서 기이한 사건을 목격한 후 산에서 내려왔고, 남아있던 제자들이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대단한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앞으로 불쑥 나서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때, 무슨 영문인지 그들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일은 내 책임이지요. 여기 이 어린 소년은 제 아들입니다. 어릴 때부터 경련을 일으켰고 또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기도 하는 불쌍한 아이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고침을 받기 위해 이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아이를 고쳐 달라고 했더니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해보려고 애는 썼지만 실패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다시피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진 후 어떤 사실을 알아내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 아이에게서 즉시 귀신이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그 아이는 나았고 순식간에 회복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주님께서는 집으로 들어가셨고 제자들도 함께 갔습니다. 집에 들어갔을 때 제자들은 주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그들의 느낌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보았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한순간에 아주 쉽게 말씀 한마디로 아이를 낫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기 못하였나이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도(와 금식)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자, 이제 저는 이 이야기를 가지고 오늘날의 처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여기 이 소년 안에서는 현대 세계를 보는 것 같고, 제자들 안에서는 바로 오늘날의 하나님의 교회를 보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공공연하게 실패하고 있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지 못함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교회는 70-80년 전, 혹은 100년 전의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전체 상황이 이 점을 웅변적으로 말해 줍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마치 제자들처럼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려고 노력하고는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더 활동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는, 여전히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들의 느낌이 어떠했을지 너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어떤 일들이 얼어났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을 인식하고, 실패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 아니 확실하고 긴박하게 던져야 하는 질문은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실패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 앞에 벌어진 그 일은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것입니까?“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주님께서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이 사건에서 제시하신 원리들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주요한 세 제목으로 나누어집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첫 번째 대답은 “이런 유”입니다. 이것은 의미 있는 진술입니다. 어째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기도(와 금식)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다른 말로 해서,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배워야 할 첫 번째 요점은, 경우마다 다른 차이점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제자들의 질문의 배경에는 이러한 것이 깔려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며 귀신을 쫓아내라고 그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가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성공적으로 그 임무를 수행하여 크게 기뻐하며 돌아와서는 너무나 뽐내는 잘못을 범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며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환호하고 흥분하며 야단이었습니다.
귀신들도 그들에게 항복했고, 말하자면 사탄도 그들 앞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가 아들을 제자들에게 더리고 왔을 때, 그들은 큰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그 난제에 접근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성공하지 못하리라고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힘을 모두 동원해 보아도 그 아이는 전혀 낫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들에게 데리고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난처해졌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때에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유”와 너희가 이제까지 다루어 왔던 유, 너희가 그처럼 성공을 거두었던 유와는 차이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원리야말로 신약을 통독해 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궁극적인 의미에서 난제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이 난제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귀신들린 경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귀신과 귀신 사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 악한 나라에도 등급이 있고, 일종의 계급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어떻게 말했는지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그러면 무엇에 대한 것입니까?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6:12)
악한 나라에도 등급이 있고, 그 모든 것의 우두머리는 다름 아닌 사탄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입니다.(엡2:2)
사탄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 밑에는 다양한 여러 영들과 권세들과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의 힘과 능력은 각각 많은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약한 등급에 속한 것들은 매우 쉽게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경우는 더 큰 힘을 가진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영은 그들이 주관할 수 있었던 다른 약한 영들과 같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유”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휠씬 더 큰 난제를 수반합니다. 바로 이 동일한 원리를 포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오늘날에도 이 원리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숙고해야하는 첫 번째 요점은 진단의 문제입니다. “이런 류”

제자들의 문제는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기 전에 어떤 처방을 황급하게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긴급하게 배워야하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행동주의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너무나 바쁩니다. 우리는 스스로 나는 실천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교리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어떤 일인가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황급히 활동을 시작합니다. 아마 우리가 실패하는 주요원인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멈추어 서서 “이런 유”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벌어진 난제의 참된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도 전에, 어떤 유의 처방이든지 쓰려고 하는 것은, 순전히 미치광이 짓이거나 힘의 낭비입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법칙이요 원리입니다.

물론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을 줍니다. 세계 제 2차 대전 중에 정말 참을 수 없었던 일은 공습 대피소에서 그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야 했던 것이라고 고백했던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그 사람들은 극도의 긴장감을 참을 수 없어서 미칠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딘가를 거닐 수 있고, 어떤 할 일이 있었다면, 즉시 기분이 한결 좋아졌을 것입니다.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거리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언제나 현명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직면한 난제의 본질을 충분히 인식하기도 전에 행동으로 옮길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유”라는 표현을 볼 때,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진정한 깊이를 영적인 의미에서 깨닫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까닭은, 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그 난제의 깊이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언젠가 한번 성공했던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해 나갑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믿을 바로 그 방식에 붙잡아 맵니다. 그들에게 닥친 난제의 본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공할 수도 없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보편적인 필요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유의 보편적인 필요는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려왔을 때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성공했던 다른 경우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필요는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는 이 필요의 정확한 본질과 정확한 성격입니다.
우리가 바른 진단을 내리려면 약간의 예민함과 이해력이 필요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 드리겠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시골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합시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길가에 어떤 사람이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 보아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분명 그 사람은 여러분의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의식이 없는 상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아마 누구나 다 의견을 같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중요한 문제는, 어째서 이 사람이 그러한 무의식 상태에 빠져 누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주 먼 길을 걸어온 탓에 그만 갑자기 피곤함을 느껴 더 이상 길을 갈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휴식을 취하다 깊은 잠에 빠졌는데, 너무나 깊이 잠든 나머지 옆에 와서 불러도 그 말을 듣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갑자기 병이 나서 그런 상태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뇌출혈을 일으켜 의식을 잃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약에 중독되어 그러한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너무 술을 많이 마셨거나, 어떤 약을 복용한 것이 잘못되어 그렇게 누워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만일 이 사람을 돕기 원한다면 그 사람이 무의식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무의식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발견해야 합니다. 그가 그저 잠든 것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비가 오면 비에 젖어 감기에 걸릴 위험이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그 사람을 도우려면, 그를 흔들어 깨우며 큰소리로 일어나라고 하면 됩니다. 이렇게 비가 올 때, 누워 잠들어 있으면 건강을 해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면, 그 사람은 아마 감사를 표할 것이고, 당신은 더 이상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문제를 해결한 셈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의 몸이 약물이나 어떤 독소로 인하여 중독되어 있다면, 소리를 친다든지 그를 흔들어 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의 상황은 보다 심각합니다. 이 사람을 진정 돕고 싶다면 그의 몸속에 있는 독소를 제거할 방도를 강구해야 합니다. 또한 그 사람이 어떤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다면 처방은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분명한 진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어떤 필요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필요가 무엇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가장 긴급한 주의를 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회와 교회 내의 개개 그리스도인들이 난제의 본질을 인식하기까지는 제대로 그 난제를 다룰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오늘날과 200여 년 전, 아니 불과 100여 년 전 사이에도 매우 큰 차이가 있음을 주목합니다. 과거 시대의 난제는 사람들이 무관심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소 잠들어 있었습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200여 년 전에는 기독교 진리를 보편적으로 부인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그 진리를 실행에 옮기려고 애쓰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들은 다소간에 기독교 진리를 습관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경우는 다만 그들을 깨우치고, 일으키고, 무감각한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100년 전이나 빅토리아 시대말기의 처지도 그러하였습니다. 이런 경우는 때때로 어떤 캠페인을 벌여 사람들을 일깨워주고 각성시켜 주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상태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상황도 그러하다고 진단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앞에 직면한 난제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제대로 조사해 보면, 우리가 직면한 난제는 수세기 전 기독교회가 직면했던 것보다 더 깊고 훨씬 더 절망적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점점 더 이것을 뼈져리게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의 난제는 무관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관심이 없거나 흥미가 없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훨씬 더 깊습니다. 제가 볼 때 영적인 것을 철저하게 모르고 있고, 심지어 영적인 것을 부인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냉담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생각의 배후에는 옳고 참된 것이 있는데, 다만 그것에 대해 어떠한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영적인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신념 자체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것의 원인들을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오늘날 평범한 사람들도 어떤 과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의식 아래, 하나님이나 종교나 구원에 관한 모든 믿음과 교회 영역에 속한 모든 것은 완전히 버리고 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날 평범한 사람조차도, 그러한 영적인 것들이 수세기에 걸쳐 인간 본성을 억눌러온 악몽 같은 존재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발전과 진보를 저해한 장본인이 바로 그것이며, 그래서 그것을 제거해야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그러한 것들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합니다. 싫어하고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정신 구조와 자세를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고, 영적인 것들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사람들은 더 이상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 성경 말씀대로 행하거나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참 좋은 고전이요, 하나님의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마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을 보통 책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책과 똑같이 취급합니다. 그저 비평하고 분석할 수 있으며, 우리의 지식에 복종해야 하는 단순한 문학 정도로 밖에 생각지 않습니다. 또한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다른 책들과 같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성경이 신적이고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본질적인 진리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전처럼 사람들은 그 진리들을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 중에 포함시켜, 그저 위대한 사람 정도로만 취급하고,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도, 속죄 죽음도 부인합니다. 또, 예수님을 사회 개혁자 정도나, 정치적인 선동자나, 단순히 인생에 대한 윤리적 관점을 제시한 선생쯤으로 생각합니다. 이 점을 보여주는 한 실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버트란드 러셀 같은 사람은 기독교회가, 나라와 정부에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말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곧 핵무기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말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어째서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유의 상황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가치있는 주님에 관한 모든 것이 부인당하고 있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단순한 인간 선생이나 어떤 위대한 본을 보인 사람쯤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부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초도덕, 또는 도덕 부재의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도덕률이라는 범주 자체가 매우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실상 “너 악이여, 내 선이로다”라고 말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지성적인 눈을 가지고 신문을 읽어 보면 이 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도덕을 옹호하는 말이나, 의학의 차원에서 그 부도덕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나, 과거에 금기로 정해졌던 것을 폐기하자는 식의 주장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코 언급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버젓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어떤 예절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당면한 처지, 곧 사회 상태에 대한 살아있는 지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쓰는 전문용어는 더 이상 많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풍성하고 돈이 많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는 상황에 있기 때문에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먹고 마시고 즐기면 그만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런 유”에 속한 어떤 것이 존재합니다. 즉 여러분과 제가 당면한 난제 말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두 번째 로 “.......외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에 적용시키면 전혀 쓸모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이 경우에 실패한 것은, 다른 경우에는 충분하고 알맞았던 너희의 그 능력이 여기 이 경우에는 적합하지 못하고 전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능력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 그것은 병에 걸려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는 이 소년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현시점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우리가 의뢰했고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지탱시키는 지주로 사용했던 그 수많은 것들이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으로 판명나지 않았습니까? 제 말을 오해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일들 자체가 무슨 잘못이 있다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가진 능력은 훌륭한 능력이었습니다. 또 약한 귀신들을 쫓아내는 일은 능히 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과 경우에는 그 능력이 아무런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언급하려는 것은 경우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능력에 잘못이 있었다는 애기가 아닙니다. 다만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점을 알지 못하거나 더 큰 필요가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리 노력하고 단결하고 힘을 쏟아도 여전히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소용없는 것으로 판명된 것 중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저는 그 중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기독교회는 그러한 것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그러한 것들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먼저 변증학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우리가 진실로 해야 할 일은 기독교 신앙을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권하여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여러 권의 책이 쓰여 졌고, 많은 특강들이 개설되었으며, 많은 설교들이 전해졌습니다. 또한 현대인에게 철학적인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제시하고 전해 주려고 시도합니다. 여러분은 종교철학을 다루는 책들과 과거 철학자들의 위대한 역작도 동원합니다. 위대한 헬라 철학자들이나 그 밖의 사람들의 책도 동원합니다. 그러고 나서 기독교가 그것과 조회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이 완전히 합리적임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철학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변증학입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는 과학적 차원에서 이런 일에 흥미를 갖고, 과학과 종교를 조화시키려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과학적인 사고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논증하면서, 복음과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복음과 성경이 그들의 눈에는 과학적 사실들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며, 특히 이적과 같은 경우는 더욱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과학과 종교를 조화시키는 일이라고 교회는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이라도 막연하게나마 하나님을 믿는 조짐을 보이는 과학자가 있으면 그를 부여잡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한 과학자가 태초에 세상을 창조했을지도 모르는 신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믿음을 은근히 시사하는 것처럼 보였을 때 얼마나 흥분을 했습니까. 참 이상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얼마나 애처로운 상태에 있는지 아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라도, 한 사람에 불과한 그가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할 가능성을 천명한 것처럼 보였다고 해서 우리가 그처럼 흥분하다니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로 인해 기뻐하고, 모두들 그것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며, 참 놀랍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런 유”의 일을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은, “그 사람이 정말 그랬어? 그 사람은 어떤 유의 사람이지? 훌륭하군!“ 이어야 합니다. 또한 “어째서 그런 애매한 결론에 이르는데, 그처럼 오랜 세월이 걸렸을까?”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세는 그들이 누구든지 간에, 아무리 희미한 진술을 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들을 부여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현대의 상황을 변증학을 통해 대처해야 한다고 믿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과학은 권위이며, 성경을 그 권위에 짜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노력과 수고가 현재의 상황에 대처하는 방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고고학의 차원에서 이러한 일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고고학은 매우 가치가 있습니다 -성경 역사를 확증해 주는 고고학의 모든 자료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고고학에 의존하려 한다면, 그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셔야 합니다. 고고학자들도 다양한 학파로 나누어집니다. 그들은 상이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그저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잡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진리임을 증명해 줄 것이라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유명한 사람들을 붙잡습니다.

조드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을 통해 악과 하나님을 믿게 되었음을 인정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흥분했습니까!

그러나 어째서 사람들이 그렇게 흥분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감상적인 믿음, 변증학에 불과한 이러한 방식들을 의존하는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 줍니다.“

18세기 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버틀러 감독과 그의 위대한 신앙의 유추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들은 이것들이야말로 기독교의 진리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방식의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을 신뢰하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그 중 하나가, 새로운 번역 성경이 나오는 것을 아주 대단한 일로 여기며 흥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불신자가 교회 밖에 있는 것은, 흠정 역 성경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행동입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언어인 전문용어, 곧 칭의나 성화 같은 말을 현대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현대인이 원하는 것은 현대어로 된 성경, 현대의 속어나 현대의 관용구로 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것이며, 읽고 나서 “ 이것이 기독교구나”하고 말하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새로 번역된 성경들이 앞을 다투어 선을 보이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 성경들을 삽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최근의 언어로 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극이 아닙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것입니까? 1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오늘날의 사람들보다 칭의나 성화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말들이 1000년 전에는 일상적으로 쓰이던 언어들이었습니까?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 사람 속에 있는 악입니다. 언어의 문제나 용어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것에 집착합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은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이 흠정 역을 보완하려면 오랜 시일이 걸릴 것입니다. 우리는 현대어 번역 성경들에 대해서 극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오도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번역 성경들이 아무리 가치가 있다 할지라도, 난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밖에 또 무엇이 있을까요?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대한 믿음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매체를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누구나 이것을 청취하고 시청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안방까지 가져가라, 짧은 막간을 이용해서 메시지를 전하라, 등 매체들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있습니다. 또한 광고의 문제가 있습니다. 큰 사업체가 성공하는 것은 광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교회를 광고하고, 교회 내에 광고 기구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교회가 무엇인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알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진리만을 말한다면 그들이 즉각 그 진리를 듣고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치 이러한 방식으로 광고하는 여러 편리한 상품들을 사람들이 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믿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유“가 이와 같은 방식을 통해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주장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잡지, 새로운 문학지, 새로운 소책자 등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서 이 모든 것을 배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반대중적인 형태로 기사를 쓰면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실천에 옮기는 대중적인 복음 전도가 있습니다. 현대인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현대의 기술로 그 일을 하게 되면, 현대인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에서 그러한 주장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간단한 질문을 던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현대의 난제가 다 해결되어 가고 있습니까? 물론 이러한 여러 가지 방식들, 변증학이나 다른 것들이 개인적인 회심을 유도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점을 인정합니다. 여러분이 적용하고자 하는 방식이 어느 방식이든지 그러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개별적인 회심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상황이 어떠하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떠하며, 이 나라의 노동자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이미 교회 안이나 교회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누구든지 그런 것에 감명을 받습니까? 나라의 영적, 종교적 상황은 어떠합니까? 사회 전체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모든 활동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이 영향을 받습니까? 저의 대답은, 그 모든 것이 소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려고 애썼던 제자들의 처지로 우리를 몰아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많은 경우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의 경우에는 전혀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다른 것으로는 “이러 유”가 나갈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통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기도(와 금식)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곧 주님께서는 사실상 제자들에게 “너희는 거기에서 실패했다. 이것은 너희가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사용했다. 너희는 그 능력을 매우 확신했고, 그래서 너희는 큰 확신을 가지고 그 일을 하였다. 그러한 일에 익숙했기 때문에 너희는 단번에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잠시 멈춰서 생각을 해 보아라, 너희가 실패한 것은 이 악한 영들 사이에도 여러 등급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이 순간에 너희를 그처럼 처참하게 만든 것이다. 너희는 충분한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너희가 할 수 없었던 일을 내가 한 것은, 내게 능력이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내게 주신 능력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간구하지 않으면 “이런 유”를 결코 이루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인식해야 한다. 너희의 방식으로 제거하거나 처리하기에는 매우 심각한 문제에 너희가 봉착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너희에게는 그 악한 세력을 제압하고 파괴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도 역시 이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포자기의 상태에 이를 때까지 그것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권위나, 이러한 임무나, 이러한 능력과 힘과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지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우리의 필요를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 충만케 하실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런 유”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보다많은 지식이나, 보다 많은 이해력이나. 보다많은 변증이나, 철학과 과학과 종교의 조화나, 다른 모든 현대적인 기술이 아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람들의 영혼에 침투하여 그 영혼을 깨뜨리고, 낮추며, 새롭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100여 년 전이나 200여 년 전이나 똑같이, 바로 오늘날에도 그 능력을 갖고 계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능력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능력을 달라고 간청하며 탄원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유”는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려는 주제의 서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과 관련하여 이러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현재의 상황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습니까? 이것에 대해 절망적이십니까? 이것 때문에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저 이러한 여러 가지 노력들에 대해 말해 주는 주간 신문을 읽으면서 “ 아 옳지, 그렇게 해야 말이 되지”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십니까? 기도(와 금식)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금식이라는 말은 고대 사본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문자 그대로의 금식, 곧 육체적인 금식뿐만 아니라 정신 집중이라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금식의 가치는 금식을 하는 사람이 어떠한 문제에 관심을 총 집중시킬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기도하되 정신을 차려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너희를 충만케 하시기까지는 그런 유의 난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그 능력을 가졌음을 알면, 권위 있게 나아가라.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강권적인 부어주심이 아니고는 오늘날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확신하십니까?
여러분은 아직도 그 밖의 다른 것들을 의뢰하고 있습니까? 여기에 중차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하며 온 교회의 기도가 정말 필요함을 알고 있습니까?
교회의 각 지체들이 가정에서든, 친구들 모임에서든, 교회에서든, 그 어디에서든 부흥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한, 또한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시되 100년 전이나 200년 전 또는 어느 다른 부흥의 시대나 각성의 시대에 부어주셨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부어주시기를 간절하고 긴박하게 기도하지 않는 한 저는 어떠한 소망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 한, 어떤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하면 즉시 소망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실 때 이 불쌍한 소년에게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아주 쉽게, 그렇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귀신은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은 나았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 원수들은 흩어집니다. 이 이야기는 모든 부흥 역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유”의 필요와 우리 자신의 모든 노력의 쓸데없음과 기도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인식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기 전까지는 부흥과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