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성령론

로이드 존스, 「성령론」(9)

새벽지기1 2016. 6. 4. 07:38


10 장 성령세례의 목적과 특징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 성령세례의 목적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를 인치셨다고 말씀하셨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6:27).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 위에 내리시고, 한 음성이 하늘로부터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였다. 그것이 주님께서 말한 인침이다.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러나 그가 인치심을 받은 것은 세례를 받을 때였다. 그는 성령께서 내리심으로 인침을 받았다. 우리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일은 우리 주님께 일어났던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중생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요 성령이 그 안에 계신다. “만일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러한 인침이라는 특이하고 특수한 방법으로 임하는 것은 주님 자신의 경우에서와 같이 그것에 대하여 부가적인 것이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그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도록 자신에 대한 특이한 자신감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특별한 확신이 주어진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시고, ‘인치시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오심은 부가적이고 특별한 일이다. 그것이 가지는 주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지위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주님으로 말미암아 임한 은혜의 나라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도록 능력을 갖게 하는 데 있다. 이 일은 이미 신자들이요, 중생하였고 이미 성령이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행해지는 것이다.

 

 

2. 성령세례의 특징

 

그것은 분명히 체험적이다.

성령의 세례와 중생을 동일시 하는 사람들은 비체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행 2장에 묘사된 것은 성령의 세례인침이다. 이미 사도들은 믿는 자들이었고, 이미 중생하였고, 주님으로부터 성령의 내쉼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자기들의 구원과 소명에 관한 절대적 확실성과 확신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들이 주님의 증인으로 나갈 수 있도록 능력으로 충만케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 확신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임을 우리 자신이 확신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비체험적일 수 있겠는가? ‘성령의 인침의 목적은 다만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기업에 대하여 확신케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장치 올 좋은 일에 대한 보증이요, 계약금이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체험이다.

 

그것은 큰 기쁨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체험이다.

이 사실을 빠트리고 이 체험을 말하는 곳이 성경에는 전혀 없다. 2장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누구든지 성경상의 인물들 속에 있는 넘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환경을 초월하게 하고 그들에게 거룩한 담대함을 가지게 하였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성령의 증거는 은사나 현상을 동반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2장의 현상들이 이 체험의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다. 그 체험을 어떤 차원 속에 국한 시키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한다.

 

매우 중요한 요점은 이 체험의 정도에 관계된다.

이 체험의 깊이를 부지불식간에 정형화시키려는 경향에 빠지기 쉬운데 그것은 실로 위험한 처사이다. 우리는 그렇게 할 권리가 없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깊이나 정도가 상당하게 다를 수 있지만 그 체험 자체는 언제나 분명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간증을 조심해야 한다. 매우 강력하고 극적이어야만 이 체험을 한 것이 아니다.

 

 

이 체험의 영속성의 문제다.

그것을 한 번 받으면 언제나 그것을 지니게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잘못이다. 이런 경우를 나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어째서 영구적이 아닌가? 성령이 인격이시기 때문이다. 이 체험을 말하는 문헌들을 보면 이 체험은 왔다가 가버리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그것을 한번 받으면, 그것에 대한 기억이 살아 있는 동안 늘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억을 상실할 수는 없어도 그 즐거움은 상실할 수도 있다. 시험으로 말미암아 낙담해버리는 것 같은 어둡고 비참한 오염들 속으로 빠져들어 갈수도 있다”(필 포트). 이 체험은 성령을 근심시키고’, ‘소멸하는 죄로 인하여 상실될 수 있다. 성령께서 아무리 강하게 임하셔서 그 사람의 영과 더불어 승리하셨다 할지라도 만일 사람이 죄에 빠진다면 이 증거가 계속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결코 없다. 그리고 이 체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다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그것이 반복될 수 있고 여러번 되풀이 될 수가 있다. 그 체험은 우리의 천부께서 어느 특별한 경우에 베풀어 주는 잔치와 같다(필립 다드릿지). 매일 잔치를 벌인다면 그것은 잔치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매일 일용한 양식으로 밥을 먹는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파티를 준비하신다! 그것이 바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 매우 훌륭한 자세이다.

 

3.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2: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니라.” 신약의 서신들은 그것이 그 당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반적인 체험이었다고 단정하는 것 같다. “그들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벧전1:8).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져 있다. 사도들 뿐 아니라 모든 평범한 신자들에게 가능하다.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 체험은 그 믿음을 확신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