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성령론

로이드 존스, 「성령론」(11)

새벽지기1 2016. 6. 7. 07:24


12 장 성령의 참된 체험과 거짓 체험의 특징들(역사적 고찰)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8:16)

 

초기 플리마우스 형제단의 증거


1) 다비(J.N.Darby)- 그 창시자. <성령의 인침>이라는 책에서 사람이 거듭났다 할지라도 성령은 받지 못한다는 것이 성경에 의하면 확실하다’.

2) 맥킨토쉬- ‘사도행전 19:1~7의 말씀이 제자들과 신자들이면서 아직도 성령의 인침을 받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인침을 받는다는 것은 별개라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3) 윌리암 케리- 믿음과 회개는 특별한 의미에서의 성령을 받지 않고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성령이 아니고서는 사람은 복음을 믿을 수 없다. ‘그것은 후차적인 작용이요, 부가적인 것이요 별개의 축복이다. 그것은 이미 마음 속에 적극적으로 역사하고 있는 신앙에 기초하는 하나의 특권이다. 사람이 믿는 순간에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 어떤 것만큼 뚜렷하고 분명한 것이 틀림없다.’ 이 체험은 독특하고 개별적이며 깊이 체험되는 어떤 것이요 그가 이 성령의 증거나 성령의 인침을 받았는지 어떤지를 그 사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사람이 일단 그것을 받으면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체험 가운데서 가장 큰 높은 고지로 생각하고 그 체험을 늘 회상할 것이다.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경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그로부터 사흘이 되기까지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아나니아가 찾아와서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충만해졌다.

3:2,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했다. ‘너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하지 않았다. 모든 신자가 중생할 때 회심할 때 성령을 받는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3:14,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신자들은 이 위대한 성령의 약속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참된 체험과 거짓된 체험의 구별


신약은 영들을 시험하고 검증하고 따져 보라고 권면한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거짓 영들, 적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역사가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거짓 영들은 초대교회시대에도, 종교개혁시대에도, 17세기의 청교도 부흥시대에도 현저히 나타났다. 청교도운동의 막판에 성령의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다가 너무 지나치게 나아가 신비주의로 떨어지고 만 사람들이 있었다. 초기 퀘이커 교도들이 그랬다. 체험을 강조하는 순간, 마귀는 어떤 사람들을 극단으로 몰고 갈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모든 체험을 검증해 보고 시험해보아야 한다. 18세기의 복음적인 부흥운동은 체험과 구원의 확신에 큰 강조점을 두었다. 휫필드나 웨슬리의 형제들이 그랬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방종과 무절제에 빠졌다.

 

그렇다고 이 체험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가장 안전한 것은 체험이 아니라 말씀만 붙들고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고 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이다. 옳은 방법은 참된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고,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해내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참된 체험과 거짓된 체험 사이 소위 체험의 선행사들을 봄으로써 검증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죄의식이요 실패의식이다. 죄의식과 실패로 영적인 궁핍을 느꼈다면, 확신과 능력을 갈망하였다면, 그것은 참된 체험이라는 일차적인 증거가 된다. 많은 기도가 선행되었으며 성령의 증거를 매우 열심히 추구하는 일이 먼저 있었다. 그들은 거룩한 삶을 통하여 그들이 추구하는 것과 열망하는 것이 순전하다는 것을 증거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서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있는 힘을 다했다. 그들은 이 체험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일종의 도장찍는 것과 같은 것으로 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결과로 반드시 그 체험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모로부터 특별한 것을 얻고 싶으면 바른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어떤 사람이 이 체험을 바라면서도 거룩함에 대한 노력이나 경건하게 살고자 애쓰는 것이 생활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잘못된 것이다. 체험보다 앞서는 일들은 매우 중요하다. 보편적인 체험도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게 가르친다. 성령은 그 자신의 인을 친다. 그는 악하게 행동하는 사람에게 이 인침을 허락하지 않는다.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녀에게 허락한다면 그것은 성령 자신에게 모순되는 일이 된다.

 

체험에 따르는 일들은 무엇인가? 말씀과 동떨어지면 안 된다. 퀘이커 교도들과 청교도들 중 극단의 사람들이 성경의 가치를 절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내적인 빛을 가지고 있으므로 성경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사람들은 환상이나 환각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한다. 빛의 덩어리를 보았다느니 예수의 환상을 보았다느니 한다. 현상적인 국면에 큰 강조점을 두고 극적인 사건에 관심을 나타낸다. 뜨겁게 달궈진 쇠나 전류가 자기들을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한다. 과장하고 자랑하고 체험 자체에 대해서 흥미를 갖는다. 참된 체험은 그 정반대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또는 말씀을 통해서 온다. 그 체험은 언제나 성경의 가르침을 확증한다. 성경에 일치한다. 말씀과 성령은 일치하며 함께 역사하며 서로 짝이 맞는다.

 

참된 체험의 표지는 외경스러운 느낌이요, 그것과 동반하는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것에 대한 느낌이다. 성령께서 거룩한 영이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이사야 6,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밧모섬의 요한도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했다.

 

예외 없이 필연적으로 오는 요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된다는 점이다. 받은 체험만을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는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 체험이다. 성령이 강하게 임할수록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욕망이 더욱 더 높아지고 영화롭게 하고 싶어질 것이다. 부흥은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이런 체험을 하는 것이다. 두드러진 사실은 성령을 많이 노래하기 보다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한다는 점이다. 성령께서 부어주시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찬송들이 만발하게 된다. 또 다른 증거는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사랑한다고 하는 그 사랑에 대한 의식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또한 그 시간에 마치 들려 올라가 이 시간 세계에 속해 있지 않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한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모든 반대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진리이다. 약속된 영광에 가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어느 의미에서 다른 것은 도무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8:18).

 

체험이 가져오는 결과는 겸손이다. 거짓 체험은 교만으로 나타난다. 체험을 떠벌리고 강조한다. 체험을 받을 때나 후에도 완고하다. 참된 체험은 묘사하기가 어렵다. 떠벌리지 않는다. 그것은 감추어진 만나흰 돌이기 때문이다. 거짓 체험은 과장으로 인도하고 기만을 당한 사람은 불덩어리를 묘사하고 전류나 뜨거운 기운을 말한다. 참된 체험은 은밀한 거래이다. 우리 자신과 하늘 아버지 사이의 거래요 성자와의 성령과의 은밀한 거래이다.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지 않는다.

 

참된 체험이 가져오는 특징적인 결과들은 하나님께 대한 위대한 사람과 그를 기쁘시게 하려고 열망하는 것이다.아바 아버지라는 부르짖음을 빼 놓을 수 없다. 참된 체험은 언제나 기도에 있어서 전에는 전혀 알지 못하던 자유로움을 가져온다. 기도와 예배와 찬양에 있어서 자유롭게 된다. 공적인 기도에도 해당된다. 사람들을 두려워하거나 복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설교자라면 전에는 없었던 능력이 자기 설교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모든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참된 체험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더욱 더 알고 싶어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3:10). 이러한 체험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주 예수그리스도를 더욱 더 친근하고 친밀하고 능력있게 아는 것을 가장 큰 소원으로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일단 사람이 이 체험에 대해서 알게 되면 그는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한다. 그 이후 영원토록 그것이 영혼에 최고의 욕망과 바램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놀라운 체험들을 가지거나 방언을 말할 수 있거나 어떤 다른 은사들을 사용할 수 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하고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으려 간절히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