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성령론

로이드 존스, 「성령론」(11)

새벽지기1 2016. 6. 9. 07:32


13 장 성령의 체험과 성화

 

영적인 체험은 더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마귀의 공격은 더 맹렬하다.

교회의 중추적인 교리는 항상 마귀의 공격의 특별 목표였다.

 

1. 성령의 체험과 성화와의 관계

 

성령의 인침이나 성령의 세례의 특별한 체험을 기초로 해서 완전주의 교리를 가르친 사람들이 많았다.

이 혼란은 존 웨슬리에 의해서 가장 큰 영향을 입어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이 체험과 성화를 동일시하는 효시이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가능하며, 그것을 받고 난 뒤에 그는 죄로부터 완전히 깨끗함을 입는다는 것이다.

 

새롭고 깨끗한 마음이 주어지고 완전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받게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완전한 사랑을 나타낸다고 한다. 죄는 그로부터 완전히 제거되고 그의 전체 성품 가운데서 축출되어 나간다. 그래서 완벽하고 철저하게 성화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성경적 근거는 두 가지다. 1) 15:8. 또 마음을 아시는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고넬료가족)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깨끗이 하다‘(마음이 믿음으로) 완전히 깨끗함을 입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2) 26:16-18.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해진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신자들이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기초로 해서 그리스도인이 완전히 성화되며 정결케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자기들은 완전히 성화되고 정결케 되어서 더 이상 자기들 속에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있다. 그들은 대체로 매우 진지하고 성령을 사랑하는 유능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성경의 난해한 진술을 만날 때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문맥과 흐름에서 살펴 보는 것이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하다. 문맥을 살펴 볼 때 성화의 교리가 어느 곳에서도 진술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5장에서 베드로는 그들의 성화의 상태를 다루고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이 기독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관심을 가질 뿐이다.

 

당시 예루살렘 공회는 할례는 구원의 진수가 된다고 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이제 같은 방식으로 곧 믿음으로 깨끗함을 입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이다. 바울에게 주신 사명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대인이나 이방이나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한다”. 성화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깨끗해졌다는 말이나 믿음으로 거룩함을 입었다는 말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상은 아니다.

 

고전 6:9-11,“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 의롭다함 앞의 거룩함은 성화가 아니라 구별(건짐)이다.

 

그러나 고전 1:30, “예수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 ‘의로움’(칭의), ‘거룩함’(점진적 성화), ‘구속’(영화)의 순서가 맞다.

 

살후 2:13,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케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 믿음보다 거룩을 앞에 놓고 있다. 이 거룩은 성화의 의미가 아니고 구별이다. 시내산이 구별되어 거룩한 성산으로 불리는 것과 같이, 이들도 성령에 의해서 구별되었으며, 믿음의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벧전 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케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 거룩케 하심(구별)으로 진리에 순종케 된 것이다.

 

성화의 교리의 순서는 먼저 믿고 의롭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는 일(성화)이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한 마디 말로 논증을 세워서는 안 된다. 전후 문맥에서 취급되어야 한다.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 봐야 한다. 고전 7: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러나 이제는 거룩하니라

- 거룩은 구별이지 성화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상상할 수 있는 입장을 다 동원한다 하여도 성령의 세례가 믿음으로 완전한 성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훈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다. 만일 완전한 성화교훈이 진리라면 신약의 모든 서신들은 아무런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불필요하게 된다. 완전 성결케 하는 성령세례만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죄는 갑자기 우리 가운데서 제거되지 않는다. 그 주장은 잘못되었음이 틀림없다.

 

2. 성령 체험과 성화는 간접적 관계이다.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간접적인 매우 중요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성령 체험을 할 때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에 있음을 알게 된다. 전체 분위기가 빛과 거룩이다. 그런데도 같은 순간에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죄를 미워하고 다시는 죄를 짓고 싶지가 않아진다.

 

죄를 죄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주의 임재하심이다! 여전히 그들의 지체 속에서는 죄가 있다. 사람들이 그 체험을 하는 순간 자기들이 완전히 죄로부터 깨끗해졌다고 느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의 체질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다. 어느 순간에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아마 성령세례를 받은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성화를 보증하지는 않았으며 또한 성결을 보증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들이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성려세례는 성화를 촉진시키고 자극시키는 것만은 사실이다.

 

실로 그것은 성화를 도우는데 있어서 가장 최대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그러므로 이 성령의 증거는 성화를 촉진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성화를 추구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그러나 자동적으로 그것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 성화의 과정이 시작된다. 생명과 거룩의 씨앗이 우리 속에 심기워져 있다. 성령 체험은 그 생명의 씨앗이 움터 자라나고 발전하고 모든 사람을 놀랠 정도로 나타내 보이도록 한다. 그것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관계가 아닌 간접적인 관계다. 그것은 성화를 이루는데 최대의 자극을 주지만 성화자체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