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성령론

로이드 존스, 「성령론」(13)

새벽지기1 2016. 6. 15. 07:22


15 장 성령세례를 어떻게 받는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8:15)

 

1. 구원이 아닌 구원의 확신

 

양자의 영은 구원의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양자의 영에 대해서 조금 밖에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의 대부분은 이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가르치는 경향은 구원의 확신은 구원의 필수적인 것이었다. 루터와 칼빈도 구원 자체와 구원의 확신 사이를 구별짓는 것에 실패하였다.

그들은 성도가 자기가 구원 받은 것을 알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했다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었다.

부르짖음이라는 말은 매우 강한 말이며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절규이다. 그것은 단순히 아바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이다. 사도는 양자의 영이 그러한 감정으로 인도한다고 말하고 있다.

 

구원의 확신을 구원의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으로 가르치는 교훈이 왜 틀렸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18장에서 구원 받은 것과 자기가 구원받은 그 사실을 아는 것사이를 구별하고 있다. 사람이 구원받았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에 대한 부족이 있을 수 있으며 그 확신은 구원의 절대적인 필수 요건이 아니라고 말한다.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그 개념 자체가 믿는 것에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자기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고 확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면서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는 중차대한 구별이 있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단계들이다.

 

2. 부흥시대에 있어서 구원의 확신

 

본문을 보면, ‘양자의 영을 받아 부르짖는 것이 로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진리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 같다. 서신의 수신자들이 양자의 영으로 인도해 주는 위대한 체험을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 위에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시대에는 성령께서 참으로 엄청나게 부어졌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의 대부분은 전부가 아니라 할지라도 구원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후에 부흥시대에도 그러한 일이 되풀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는 그 후 교회 역사에서 맛보지 못했던 상태였다.

 

3. 성령세례를 받는 방식

 

그것을 믿음으로 받으라는 교훈은 잘못된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듯이 거룩함도 성령의 충만함도 믿음으로 받았다고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치료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교훈만큼 15절에서 묘사하는 체험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없다. 성령의 세례는 어떻게 받는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3:2),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3: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3:14).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다.

그러면 어째서 이 선물을 받은 사람이 적은가? 이 선물은 갈급해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갈급해 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그렇다. 또 중요한 사실은 이 은사를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성령의 세례를 받는 이 체험을 목이 갈한 사람이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말씀이다.

 

위 갈라디아서의 진술들에 대해 바울이 행위에 의지하는 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도 칭의를 받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받음을 의미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거기서 사도가 첫째, 칭의 외에 아무것도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 성령을 받는 것도 칭의를 받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받는다는 것을 사도는 의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전체 지위가 믿음에서 나온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행위를 의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은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사실상 그 이상 다른 어떤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성령의 은사가 특별한 방식으로 갈라디아 사람에게 임하였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다만 우리가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은 우리가 믿음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요 율법 아래 더 이상 있지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 뿐이다.

 

성령은 인격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요 복되신 31체의 제3위되시는 분이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언제 어디서나 공기를 마시듯이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성경에서 성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배우고 있다. 우리는 성령을 슬프게 하지 아니하고’ ‘소멸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이처럼 단순하고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그를 취하라는 암시가 전혀 없다.

내가 볼 때 이 교훈 자체가 성령의 인격 자체에 대해서 무리를 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받다라는 말과 관련해서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그들은 받는 것을 우리 편에서의 행동과 취함의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받다라는 단어가 여러 다른 헬라어 말을 번역하는데 쓰여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헬라어의 단어들이 여기 로마서 8:15에서 사용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받았다라는 말이 수동적인 의미가 아니라 능동적인 의미로 번역되고 있고, 그 말들은 우리의 행동에 강조점을 두고 있으며 우리가 취한다는 행동에 치중하고 있다. 예를 들면,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니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매우 능동적인 의미를 전달하고 있으며 우리 편의 취하는 행동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농부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취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농부에게 부어지는 것이고 농부는 그것을 받을 뿐이다. 이러한 받다라는 말의 의미들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벧전 4:10, 벧후 1:17도 같은 해석을 해야 한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요일 3:22도 같은 용법이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이것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의미이다. 이 양자의 영은 내가 하고 싶을 때는 언제나 취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받다라는 말이 '취하다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피할 수 없는 추론에 우리는 도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