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성령론

로이드 존스, 「성령론」(14)

새벽지기1 2016. 6. 16. 07:32


16 장 성령의 주권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8:15)

 

1. 수동적으로 받음에 대한 신약적인 용법

 

성령을 받는 것에 관한 교훈을 살펴 보면 모든 진술들은 예외없이 수동적인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 기본적인 진술은 눅 3:16에서 발견되며 다른 복음서의 병행구절에서도 나타난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전체 교리에 대한 열쇠다. 그 능동성은 세례를 베푸는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주님은 세례요한의 말을 인용한다. “요한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1:5).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8).

두 진술에서 주님은 주님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제공된 것을 그들이 취하다는 의미에서 그들 편의 어떤 행동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2장의 오순절 사건에서 전체를 꿰뚫고 있는 강조점도 같다. 그들에게 일어난 일에 주어졌다. 성령은 그들에게 보내졌고 그들이 성령을 마시기로 결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다. 주님도 받아서 주셨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성령은 주님에게 주어지셨으며 그래서 주님은 그 성령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2:38). 성령께서 그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받다라는 동사는 이 문맥에서 능동적일 수가 없다. 분명히 수동적이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그러하니라”(5:32).

언제나 강조점은 아버지나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심에 강조점이 있다. 절대로 우리에 대한 능동적인 취함을 강조하지 않았다. 8장의 진술들은 이 주제에 큰 빛을 준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15). 성령이 오순절에 단번에 주어졌다고 가르치는 대중적인 교훈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그저 공기를 마시듯이그를 취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전도자 빌립이 그러한 교훈을 알지 못했다. 그저 믿음으로 취하라고 했으면 될 일이지 사도들이 내려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내려가서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기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성령을 받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결과이다 우리가 그를 취하지않는다.

 

2. 안수

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모든 강조점은 주시는 하나님의 능동성에 있으며 받는자리에 있는 제자들의 수동에 있다.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심으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성령은 우리에게 주어진다.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성령은 우리에게 주어진다. 계속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들이, ‘부어지다’, ‘내리다’, ‘넘쳐 흐른다는 말들임을 주목하자. 어떤 말도 우리가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취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은 없다.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요일 2:27,“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1) 강조점이 언제나 취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심에 있음을 알게 되며 그것은 명백히 수동적이다.

2)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취하기로어느 사람이 결정했다는 경우가 한 번도 없다.

3) 안수했다는 사실 자체가 취함이 아니라 선물을 주심이라는 점이 이 체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임을 강력히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이 선물이 안수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임하여지도록 정하셨다. 이 안수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안수하여 선물을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손이 그들 위에 얹혀지고 그들은 수동적으로 그것을 받는다. 그것이 로마서 8:15받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3. 성령의 주권

 

우리가 성령을 취할 수없다. 성령은 인격이시오 주권적인 주님이시다. 고전 12장에서 그 점을 강조하고 있다. 성령께서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11).

칭의마저도 그런 식으로 취해지지않는다는 것을 상기하자. 일반적인 주장은 이렇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듯이 믿음으로 또 다른 축복을 취하라”. 그러나 칭의는 사람이 원할 때는 언제나 취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이다. 그 점을 잊지 말자. 우리의 칭의마저도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통로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칭의를 붙잡고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칭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다.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믿음이 홀로 있는 일은 없다. 믿음은 결코 혼자 있지 않다. 10:8-10를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만일 사람이 ,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내 죄를 위해서 죽었음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너희 존재 전체를 드려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인격의 중심이다. 그것은 느낌만이 아니고 전인의 중심이다. 만일 사람이 자기 마음으로 이 진리를 믿으면 그의 전체 삶은 그것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 너희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느낌의 요소가 수반되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아니다. 그러한 요소가 없으면 그것은 지적인 승인에 불과할 것이며 역사적 믿음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믿음을 위한 여러 가지의 전제들에 대해서 그저 순전히 지적인 태도로만 그것을 승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믿음은 깊은 것이다. 사람이 참된 믿음을 정말 가지고 있다면 자기 영혼 속에서 안식을 체험하지 않을 리가 없다. 5:1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한다. 평화와 안식에 대해서 무엇인가 알기까지 자기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저 믿음만이라는 말에 관해서 매우 주의해야 한다.

참된 믿음은 느낌을 수반해야 하며 지적인 이지뿐만 아니라 의지까지를 수반해야 한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4. 받은 자들은 알았다.

 

신약성경에서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에 언제나 강한 느낌을 수반하고 있으며 그들이 그것을 받았음을 의식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사람도 그것을 안다. 오순절날의 사도들을 보라. 그 이후에 기독교의 역사 곧 부흥시대에서나 개인적인 경우에서 보편적으로 그러하였다.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거나’, ‘충만해질 때그것을 결코 모를 수가 없다. 우리가 전혀 아무 것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고 설득하는 그 교훈은 전적으로 성경의 교훈에 위배될 뿐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체험기록과도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