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참된 예배 (요4:20~24) / 박영선 목사

새벽지기1 2016. 4. 2. 07:26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니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으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오늘은 요한복음 4:20~24절까지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참된 예배에 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마리아 동네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나누는 대화와 거기에 기록된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생명의 말씀을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설교 말씀은 두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겪은 현실적인 문제에서부터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을 추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현실과 내가 지금 부딪힌 상황 없이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님의 시각에서 추적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들을 우리의 현실이나 순서에 관계없이 나가고자 합니다. 이런 시각이 때로는 우리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은 옳은 생각이고 말씀이기도 합니다만 조만간 우리도 이 말씀들을 인용하게 되고 사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 깊은 맛을 느끼시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주고 받던 중 사마리아 여인이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하며 어떤 초월자의 임재를 느끼는 자리까지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은 ‘때는 지금이라면서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맞습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이 얼마나 날카로운 지적을 하는가를 느끼게 하는 말씀 중의 하나인데, 오늘날에도 우리가 맘에 맞는 교회를 찾는다든가 솔직한 목사님을 어쩌다 만나게 되면 자기의 어떤 급박한 질문을 들고 나옵니다. 많은 질문 중에서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하나님은 창세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하나님은 자기가 들 수 없는 무거운 물건을 만드실 수 있는가?’ 등등의 질문을 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때는 이때라는 말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질문과 호기심은 늘 동일하다고 성경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들어 있는 내용을 조금 살피고 지나갑시다. 20절 이하의 말씀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가리키는 예배하는 산은 그리심 산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출애굽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입구까지 오지만 그리심 산에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들어가거든 이렇게 하라고 유언을 한 것이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전쟁을 마치고 부족 간에 국토를 나누어 가지고서는 그리심 산에서는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고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축복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심 산은 창세기12장에 보면 더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이르렀다가 하란에서 드디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아브람이 이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12::5,6) ‘세겜’땅 ‘모레’라는 곳에 이릅니다. 그런데 계속하여 7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렀고 거기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셨고 거기에서 단을 쌓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11:25~30에는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이 두 산은 요단강 저 편 해 돋고 지는 편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 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앞에 말했던 지명과 같은 곳으로 시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장소가 아니었겠는가 생각됩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고 지명이 자주 바뀌므로 확신 할 수는 없습니다만 맞는다고 생각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지금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루살렘은 솔로몬이 지은 솔로몬 성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한 번도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그리심 산이 예루살렘과 같은 양대 산맥인 것 같이 대조되는 지위를 얻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열왕기상12:25-29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만 이 사건의 내용을 좀더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처음에는 부족사회였습니다. 그러다가 사울 때부터 왕국이 됩니다. 초대 왕 사울, 둘째 왕 다윗, 셋째 왕 솔로몬까지만 통일된 왕국으로 있다가 솔로몬 왕의 사후에는 나라가 둘로 나뉘었습니다. 12파중 10지파가 다윗 왕조를 배반하고 북쪽 지방에 나라를 세우고는 국호를 그대로 이스라엘로 씁니다. 남쪽 지역은 다윗의 왕통을 인정한 그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두 지파만으로 남쪽 왕조를 설립하였고 국호는 주를 아루는 유다 지파를 따라서 ‘유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영어로 변역되면서 ‘유’가 ‘ㅈ’ 발음으로 변화되어 ‘쥬’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유대주의는 ‘쥬대이즘’이라는 영어 단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분열된 이유는 이러합니다. 솔로몬이 궁전을 짓느라고 이스라엘의 경제는 압박을 받고 있었으므로 민심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마치 중국의 진시황이 아방궁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을 때 백성의 생활이 도탄에 빠졌던 것과 비슷합니다. 마침내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대를 이어 왕이 됩니다. 그러자 원로 대신들이 르호보암에게 ‘당신도 당신의 아버지같이 세금을 중하게 부과시킬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르호보암은 원로 대신들은 가볍게 해 주라고 하고 젊은 동료들은 더욱 중하게 해야 한다고 할 때에 포악한 말을 권한 젊은 동료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내 새끼 손가락이 우리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지 아니하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 아버지가 손에 채찍을 들었다면 나는 M16을 들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10지파는 그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습니다.

 

북 왕조는 여로보암이 통치를 하게 되었는데 그가 가만히 보니 이스라엘은 원래 시정국가로서 종교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성전이 남 왕조 유다에 속한 예루살렘에 있으므로 그 곳으로 가는 백성들의 발걸음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그곳을 오다가다 왕통의 정통성이 유다 쪽으로 기울어 버리면 자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리라는 걱정 때문에 여로보암은 방금 읽은 말씀처럼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두고 또 하나는 이스라엘의 최 북단에 위치한 단에 세워서 예배를 드리러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 없이 여기서 예배를 드리라고 명합니다.

그래서 북 왕조는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역사적인 근거를 밝혀 이런 방법이 어떠냐 하는 것을 아브라함이 그리심 산에서 단을 쌓은 것과 연결을 시켜서 누구인가가 정당화시키지 않았었는가 하는 추측을 낳게 했습니다. 그런 추측들이 섞인 구전을 이 사마리아 여인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습니다’라는 말로 한 데 묶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를 드리는데 왜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도 여기서 예배를 드렸으니 이쪽이 더 정통이 아닙니까? 그런데 당신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데 어느 것이 맞습니까?’ 이것이 이 여인에게는 가장 큰 질문거리였던 모양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라고 말씀하시고는 이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추적하려는 것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 있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만 이 말씀이 실감납니다.

잠시 말머리를 돌려서 도대체 종교란 무엇이며 교회가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 정리를 해 봅시다. 교회는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까? 교회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입니까? 종교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입니까? 아니면 교회나 종교가 없이는 하나님을 못 만납니까? 또한 하나님을 만나고 무릇 신을 만나는 데는 꼭 종교적인 어떤 지도자가 필요한 것입니까? 하는 질문을 우리도 한 번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만인제사장론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므로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칭호가 붙었습니다. 누구나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목사나 장로의 도움이나, 또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도 아니고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면회하게 하는 비서실장도 아닙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와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서 우리는 쓸데없는 정력을 낭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과 연결시키시는지 조심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21절을 다시 보시면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요? “ 신령과 진정으로” 하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처음부터 꺼내지 않으시고 그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하나의 징검다리를 놓고서야 말씀하십니다.

‘때’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게 왜 필요한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인데 너희는 ‘신령과 진정으로’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한다는 것’에 왜 ‘때’가 필요합니까?

성경이 신령과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어떤 예배 형식이나 종교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나 통로에 관한 것이나 과정에 관한 것이나 방법에 관한 싸움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을 잘 연결해 봅시다.

‘이 산에서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예배를 드리는 데는 장소와 방법과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 대상이 문제다.’ 라는 대답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23절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이 대화 중에서 가장 놀랍게 부딪쳐야 하는 단어는 아버지라는 단어입니다. 21절을 다시 봅시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이 말씀은 그냥 적어 놓은 단어의 열거가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오.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형식에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라는 것은 버릇이 없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면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하는데 그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해야 하고, 아버지께 예배하는 때가 온다.” 이 말씀을 다 묶어 보면 결국 ‘예배가 무엇이냐?입니다.

예배란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 마땅한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이란 결국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며 아버지께 영광과 경배를 바로 드리고 있느냐로 참된 예배냐 아니냐를 가리지 그 어떤 형식과 방법으로 하느냐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는데 그 때 너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라고 하셨습니까? 이 말을 왜 등장시켰습니까?

 

예수님은 아버지가 누구신 줄을 밝히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오시기 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큰 일이 난다는 정도밖에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자 하나님이 누구인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여기서 아버지라는 것은 권위와 물질을 충족시켜 주시는 분으로 표현되는 것보다 오히려 사랑이 있고 성품이 있고 내가 깊이 알고 있는 끊을 수 없는 혈육관계의 밀접성 같은 것들이 베어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 이전에는 참다운 예배가 불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때’라는 말을 등장시킵니다.

요한복음 1:17~18에서 왜 모세가 등장하는지 아십니까? 모세가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이것을 좋아하며 이것을 싫어하신다는 육법전서 식의 이야기밖에 없었고, 하나님은 감정이 있고 의지가 있는 인격적인 분이라는 설명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밖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누구이신 줄을 아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우리로 인해 안타까워하시며 우리로 인해 애를 태우고 계시는 분이라고 느끼는 감각이 있기 전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것은 성경이 언제나 요구하는 계명-중에서 가장 큰 계명 - “너희는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입니다.

다른 어느 것도 그 예배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요한복음 14:6이하에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그러자 우리와 같은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이렇게 질문을 하는데 이런 사람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어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려면 복음서를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면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베드로가 자른 말고의 귀를 붙여 주신 분입니다. 그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신 분입니다. 그는 자신이 기른 제자에게 팔리신 분입니다. 그가 세상에서 받은 것은 구유와 십자가밖에는 없었을 정도로 푸대접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분입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도 그 예배가 어느 정도의 감격과 진심 속에 드려지는지 늘 두드려 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말씀이 왜 성경의 제일 앞부분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구약에서부터 연결하여 요한복음 4장에 이르러서야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말씀을 왜 창세기의 천지창조(1), 사람을 지음(2), 타락(3), 이 다음 즈음에 기록하지 않았느냐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그렇게 빨리 알아듣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누구인 줄을 가장 잘 아십니다. 직접 만드셨으니까 가장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아듣는 순서를 정하셨는데 그것이 여기에 있는 이 사건에 그대로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리심 산에서도 단을 쌓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을 하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라를 나누었고 단 위에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가리켜 “이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왕상12:28)했습니다.

이런 것을 신학적 용어로 ‘여호와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한 사건이 또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과 율법들을 받기 위해 40일 동안 금식을 하고 있을 때 산 밑에서는 기다리다 지친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지칭하기를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이로다.(32:4). 그 때에도 하나님이라고 그랬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건들로서, 즉 인간이 처음에는 종교성을 어떠한 모양으로 가지는가 하면 인격적 대상으로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처음으로 종교성을 가질 때는 자기 최면으로 가진다고 합니다. 자기의 손으로 만들어 놓고 경배를 한다는 얼마나 웃을 일입니까?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고개를 숙일 만큼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어리석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타락하다 못해 이지러진 영적인 실력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기억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을 섬기고 아세라를 섬길 때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싸웠던 사건들이 면면이 이어오는 것이 구약의 연속입니다. 이런 것이 언제 없어지는지 아십니까? 이것이 바벨론의 포로가 됨으로써 없어집니다.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사람은 자기 최면과 자기 눈가림을 하던 것에서부터 손을 놓게 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바로 전의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이 등장만 했다 하면 도처에 편만하여 있는 우상 숭배를 지적하곤 합니다. 신약에 예수님이 오셔서부터는 우상 숭배로 인하여 싸우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자기 최면의 종교성을 없애고 나니까 두 번째로 도덕적 경건주의가 종교 대신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바리새인과 싸움을 했습니다. 도덕적 경건주의, 즉 스스로 어떤 아름다운 도덕과 윤리를 지키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싸우셨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한 인간이 그의 신앙의 수준을 높여 가는 데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 두 과정을 지나가야만 됩니다. 극복되어야만 합니다. 어디까지 극복되어야 하느냐 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리에까지입니다.


신령과 진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또한 나의 아버지라는 뜨거운 인식과 만남이 있으며 또 그것을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형식도 필요없습니까? 교회도 필요없습니까? 그렇다면 아무 데나 앉아서 혼자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낫지 굳이 교회에 와서 집사니 장로니 목사니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혼자서 진심을 가지게 되면 진심이 너무 많이 생기기 때문에 혼자서 생각하면 늘 독재자가 되게 마련인 것입니다. 독단으로 흐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견제 세력이 필요하게 됩니다. 마치 빨갛게 달아오른 석탄 덩어리도 꺼내 놓으면 식듯이 인간은 자신을 지 킬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갖는 가장 중요한 필요성입니다.

교회에 모이라고 하는 것이 통로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를 믿는 사람인 줄 아는 향기를 피우라고 해서 모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가능한 한 성경이 밖으로 보이도록 들고 다니십시오. 심장에 가깝게 들수록 영성이 높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형식주의와 진정한 형식이 필요한 것과의 차이를 여기서 인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만 재학 시에는 누구나 가슴 근처에 성경책을 끼고 다니기 때문에 제가 몹시 기분이 상했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 중의 한 분이 제일 작은 성경책과 찬송가 두 권을 가볍게 들고 강대상에 오르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그러한 면에 대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반발은 귀중히 여겨야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형식이란 성의의 표현을 말합니다. 형식에 내용을 대치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 형식은 정성이 없게 되면 생기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이 연애를 하실 때 연애 편지를 노트를 쭉 찢어서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색깔도 핑크색에다가 몇 번이나 쓰고 찢고, 썼다가는 찢고 이렇게 반복하면서 쓰는 성의를 보입니다. 이렇게 형식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내면의 가득 찬 정성이 바깥으로 흘러나온 표이지 형식이 내용을 대치하거나, 형식이 있어야만 이 일이 가능한 조건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조금 전의 말과 같이 ‘예, 저는 하나님을 목숨을 걸고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면서도 거기에는 늘 이런 조건이 붙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계명이요. (22:34-38)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로는 39절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있고 그것이 흘러 넘치면 결국은 옆으로 흘러 내릴 수밖에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몸을 사랑하는 것같이 옆으로 흘러 넘치고 있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물론 이것은 완성적 차원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물론 이것은 완성적 차원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셔야 됩니다.

 

그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여기에 모인 여러분을 향하여 요구하시는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것을 참된 예배라고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안 계시면 못 살겠습니다.’라고 그렇게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하라시면 목숨이라도 내놓고 불 속에 뛰어들겠습니다.’하는 식으로 살벌하게 증명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봄볕이 따스하게 얼음을 녹이듯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녹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증명하셨는가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그 수치스러운 죽음을 감당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향한 열심을 기억하십시오. 기억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 만큼 알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을 스스로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다시 출발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게 해 주옵소서, 그 사랑에 정당한 반응을 할 수 있게 하시고 내가 누리고 마땅히 감격할 것들을 알려 주옵소서’라고 요구하십시오.

이것을 알게 될 때 비로서 우리는 마음 속으로부터 흘러 넘치는 찬송과 감사와 기쁨을, 모여서 이렇게 늘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땅히 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축복을 얻고 있는 것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