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1973

아무에게 아무 말도 (막 1: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막 1:44) 앞서 43절에서 예수님이 이 나병환자에게 엄하게 경고하신 이유가 44,45절에 걸쳐서 설명됩니다. 나병치유 사건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 사람이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될 줄 알았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 나병환자의 마음을 우리가 모른 바는 아닙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어떻게 숨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런 일들은 아직 드러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하고 말씀하셨는데,..

엄한 경고 (막 1: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막 1:43) 헬라어 성경에 따르면 이 43절은 44절과 독립적인 문장입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읽는다면 43절과 44절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사만 연결하면 “보내시며, 경고하사, 이르시되”가 됩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으로는 이 동사들이 각각의 문장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루터 성경도 역시 43절에서 예수님이 그를 위협하셨으며, 곧바로 내어 쫓으셨다고 번역한 다음에 44절은 다시 “그리고”로 시작합니다. 제가 여기서 헬라어 성경의 문장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헬라어 성경과 우리말 성경에 뉘앙스의 차이가 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마가복음 기자가 44절을 강조하기 위해서 43절의 말씀을 언급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보통 때..

나병 치유 (막 1: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막 1:42) “깨끗함을 받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해졌습니다. 마가복음 기자의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나병이 나았다고 하든지, 그냥 깨끗해졌다고 하면 충분할 텐데도 굳이 나병이 “떠나가고 깨끗해졌다.”고, 이중적으로 진술했습니다. 그 사실을 강조한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나병이 떠났다는 사실과 몸이 깨끗해졌다는 사실 사이에 무언가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일까요? 고대인들은 인간의 병과 장애를 모두 악한 영의 조화로 생각했다는 게 이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들은 악한 영을 실체로 생각했습니다. 악한 영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 몸을 망가뜨리고, 마음에 들어오면 마음을 망가뜨립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악한..

'내가 원하노니' (막 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막 1:41)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며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 말고 누가 나병환자에게 이렇게 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메시아 성이 바로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바로 임박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을 고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일치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곧 메시아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말이 되겠지요. 그것을 믿는가, 아닌가는 각자가 판단해야 합니다. 성서 기자들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을 뿐입니..

예수님의 터치 (막 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막 1:41)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대셨다고 합니다. 손을 잡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깨에 손을 올리셨을지도, 아니면 등을 두드렸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지 예수님에게 그에게 손을 대셨다는 건 예수님이 그와 한 마음이 되었다는 징표이겠지요. 열병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실 때는 손을 잡았습니다. 어떤 때는 진흙을 이겨 시간 장애인의 눈에 바른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유는 거의 말씀만으로 일어납니다. 손을 대시는 경우에도 말씀은 반드시 따릅니다. 직접 손을 대며 말씀하시는 것과 그저 말씀만 하시는 경우가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

예수님의 연민 (막 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막 1:41) 나병환자를 보시고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연민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아주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을 볼 때 그런 연민을 느끼는 건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마음입니다. 그런 연민이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지만 그걸 느끼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작용하는 이런 연민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다는 말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문제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나병환자 (막 1: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막 1:40) 우리는 마가복음 기자가 40-15절에서 보도한 나병환자 이야기에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도움을 청했고, 예수님은 그를 고치시고 유대교의 규례에 따라서 제사장에게 보냈습니다. 그 사람이 제사장에게 실제로 갔는지에 대해서 본문은 말이 없고, 대신 나병환자였던 사람이 자기에게 벌어진 일을 사람들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당분간 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복음의 실체에 접근해보려고 합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부터 시작합시다. 여기 예수에게 와서 꿇어 엎드린 이 나병환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본문은 그 지역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습니다. 예..

귀신 축출 (막 1: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막 1:39) 마가복음 기자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예수님의 활동을 요약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의 여러 회당에서 설교하셨으며, 귀신을 축출하셨다고 말입니다. 설교는 말이고 축귀는 행위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언어로 해명하는 것이라면 축귀는 사건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이 양자는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언어와 사건은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사건이고, 사건은 언어로 표현되고 전승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와 축귀를 대립적으로 우열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와 축귀를 동일한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도 좀 곤란합니다. 설교는 예수님의 정체..

예수가 오신 이유? (4)(막 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막 1:38) “예수가 오신 이유?”라는 제목의 묵상은 오늘이 끝입니다. 이런 제목으로 나눌 수 있는 생각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접으려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이와 관련해서 생각할 거리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고 한다면 도대체 ‘어디서’ 오셨는가에 관해서 생각해봐야겠지요. 그리고 그는 도대체 어디로 다시 돌아가신 걸까요? 예수님이 오심으로 율법이 새롭게 해석되었다는 사실도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재림도 역시 이 주제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문제들이 언급될 기회가 있을 테니까 이만 줄이고, 오늘은 예수님의 설교 내용이 무슨 이유로 예수님 자신과 일치하게 되었는지..

예수가 오신 이유? (3) (막 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막 1:38)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까이 오심을 전했다는 의미입니다. 전도, 또는 설교는 바로 이 사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우리의 삶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직면한 하나님의 나라, 또는 그의 통치에 의해서 예수님은 치유와 축귀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위는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에 집중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별로 실감하지 못합니다. 한국교회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설교에서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의 임박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가장 큰 비극입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