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막 1:41)
나병환자를 보시고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연민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아주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을 볼 때 그런 연민을 느끼는 건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마음입니다. 그런 연민이 강한 사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지만 그걸 느끼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작용하는 이런 연민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다는 말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문제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되는 신학적 주제입니다. 가깝게는 바르트와 브룬너의 자연신학 논쟁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런 논쟁은 사실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서 이 두 입장은 완전히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의 가능성을 열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만 본다면 전적인 타락이 옳겠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인식할 수 있고 반응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본다면 전적인 타락은 옳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타락했으며, 그래서 원죄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인간은 여전히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 연민을 느낄 줄 아는 존재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그런 연민이 예수님의 연민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민은 상황에 따라서 아주 쉽게 흔들리지만 예수님의 연민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처럼 거의 일방적으로 경제 일원론적 가치관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에게 연민의 능력은 거의 유명무실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티브이 드라마에서 왕따 당하는 여자 주인공을 보고는 펑펑 눈물을 흘리는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동네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는 걸 결사반대합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단순한 연민만을 가리키는 건 아닙니다. 헬라어로 이 단어는 ‘분노’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연민은 분노에서 출발한다고, 아니면 최소한 분노를 수반한다고 보아야지요. 여기서 분노는 나병환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그 공동체를 향한 것입니다. 이 나병환자에게는 나병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완전히 소외당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사회의 마이너리티를 몰아내는 이런 마음이야말로 실제로 나병이 아닐까요? 그런 사회 구조에 안주한 채 분노할 줄 모르는 우리도 역시 정신적으로 나병환자가 아닐까요?
얼마 전에 헌법재판소는 안마사 자격을 시각장애인들에게만 주는 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했습니다. 법관들은 법 전문가들이니까 정확하게 법의 잣대로 판단했겠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들의 결정은 안식일 규정으로 예수님을 비난했던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과 똑같습니다. 법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기초를 외면하고 법 만능주의에서 빠졌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분노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나름으로 사회복지에 참여하고 있는 교회들도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단순히 사회복지와 봉사 차원이 아니라 기독론의 차원에서 사회 구조적인 불의 앞에서 투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는 사태 앞에서 일으키는 분노는 바로 신앙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이 사회가 어떻게 마성을 드러내는지, 어떻게 나병환자를 소외시키는지 면밀히 뚫어볼 수 있어야겠지요. 연민과 분노는 우리에게 여기에 대처할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을 허락할 것입니다.
주님, 나병환자를 향한 연민과 분노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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