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귀신 축출 (막 1:39)

새벽지기1 2022. 6. 27. 06:01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막 1:39)

마가복음 기자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예수님의 활동을 요약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의 여러 회당에서 설교하셨으며, 귀신을 축출하셨다고 말입니다. 설교는 말이고 축귀는 행위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언어로 해명하는 것이라면 축귀는 사건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이 양자는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언어와 사건은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사건이고, 사건은 언어로 표현되고 전승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와 축귀를 대립적으로 우열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와 축귀를 동일한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도 좀 곤란합니다. 설교는 예수님의 정체성에서 제거할 수 없는 결정적인 요소인 반면에, 축귀는 그것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사실은 복음의 본질이지만 축귀 보도는 없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종속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들이 축귀 보도를 그렇게 자주 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대인들의 세계 이해가 그런 방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의 세계 이해가 유치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이 세계를 더 잘 아는 게 아닙니다. 다섯 살짜리 아이와 일곱 살짜리 아이가 이 세상을 아는 데는 별 차이가 없듯이 2천 년 전 사람들이나 지금 우리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오늘의 문명은 이런 점에서는 거의 무능력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무(無)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2천 년 전 사람이나 오늘 우리가 그것을 모르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어쨌거나 성서 시대의 고대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리얼리티(reality of life)가 무엇인지 매우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와 존재의 신비에 당황하고 놀라워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심층의 세계가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생명과 무슨 관계를 맺고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 깊이에서 작용하는 세력 중의 하나를 귀신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악한 영이지요. 생명을 파괴하는 악한 영입니다. 이와 달리 생명을 살리는 힘은 영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대인들이 생명의 심층을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생명은 그 심층의 힘에 의해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만약 오늘 어떤 사람이 귀신을 보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서의 차원과는 다른 경험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영혼이 원한에 사무쳐 구천을 떠돌다가 어떤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거나 누구에게 환상으로 보인다는 말은 그것이 아무리 리얼하다고 하더라도 신학적으로 정당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귀신 신앙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신자들의 몸, 이곳저곳에 붙은 귀신을 본다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귀신들을 내쫓으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악한 세력이 허물어지는 것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귀신이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오늘 무속적인 차원의 귀신신앙과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성서 귀신은 악한 영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악한 영 말입니다. 심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스스로 치유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악한 영에 사로잡힌 게 분명합니다. 대한민국이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스스로 치유할 수 없다면 분명히 악한 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제가 주변에서 경험하는 지역감정도 악한 영의 작용이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교회는 이런 귀신을 내쫓는 일에 앞장 서야하는 게 아닐는지요.

주님, 악한 영을 내쫓는 일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