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권인목사

고난 주간 셋째 날(마21장, 눅20-21)

새벽지기1 2025. 4. 17. 08:34

고난 주간 셋째 날(마21장, 눅20-21)

햇살이 예루살렘 성을 꿰뚫듯 내리쬘 때, 성전의 흰 돌들은 마치 불에 달궈진 쇳덩이처럼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위에 내려앉은 정적은 단순한 고요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기 직전의 숨죽임이었다. 사람들의 속삭임은 낮게 깔렸고, 성전 안으로 말없이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흔들림이 없었고, 눈빛은 마치 사람들의 심연을 꿰뚫고 하늘까지 닿았다. 그의 눈빛은 어딘가 멀리 있는 것을 꿰뚫는 듯했지만, 발걸음은 성전의 중심을 정확히 향하고 있었다. 

그가 들어섰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파문처럼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어떤 이는 그를 선지자라 했고, 어떤 이는 메시아라 속삭였다. 그러나 그의 발 앞에는 늘 그렇듯이 권세 자들이 서있었다. 화려한 율법의 옷자락을 두른 바리새인들,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기득권자들은 눈부신 대리석과 금으로 치장된 허세의 자존심 뒤에서 똬리를 틀고, 기둥 아래 가려진 사람들의 욕망과 휘장 뒤에 숨겨진 것은 신앙이 아닌 종교의 관습이었다. 저들은 율법 조항을 무기삼아 예수를 향해 칼날을 날렸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눅20:2). 

질문은 날이 서있었고, 대답은 함정을 품고 있었다. 대답에 따라 예수는 율법을 어긴 자가 될 수도 있었고, 민중의 기대에서 벗어난 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질문의 바닥을 드러내듯이 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셨다. 

"요한의 세례는 하늘로부터냐, 사람에게서였느냐?"(4절) 

그 순간, 질문을 던졌던 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바람이 멎은 듯한 정적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곤란한 침묵에 빠졌다. 하늘로부터라 하면, 왜 요한을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요, 사람에게서라 하면, 백성들이 두려웠다. 민중의 눈에는 요한도, 예수도 하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침묵은 진실을 피하려는 이들의 연약함이었고, 권위의 껍질 아래 숨겨진 두려움이었다. 예수님은 저들의 침묵보다 더 큰 권위의 말씀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그 침묵은 회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심판이었다. 그 침묵은 수천 년의 제사와 율법을 뚫고, 성소, 지성소를 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참된 길을 여는 계시의 말씀이었다. 예수의 말씀의 무게가 저들의 심령을 짓눌렀다. 이후, 예수는 비유로 진리를 전하셨다. 포도원의 악한 농부 이야기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인내와 사람의 배반, 둘째 아들의 순종 속에 드러난 참된 회개, 그리고 건축자들이 버린 돌, 사람들에겐 버림 받았으나 하나님께는 모퉁잇돌이 되신 그 돌, 이 모든 정점을 찍는 자신을 가리키는 계시의 이야기, 하나같이 날카롭고 무거운 진실이었다. 

예수는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조용히 성전을 나섰다. 돌처럼 단단한 성전도, 무게 있는 침묵 앞에서는 속살이 드러났다. 손으로 지을 건물이 아니라, 찢긴 육체 위에 세워질 사랑의 집, 찢기고, 깨어지고, 무너져 사흘 만에 다시 세워질 성전을 저들은 도무지 알지 못한 채, 인류가 쌓아올린 종교 권력의 돌탑, 돌로 세워진 건물은 그 기능과 효력을 다했다. 이스라엘의 신앙 중심이었고, 예배의 심장이었던 그 건물로서의 메커니즘(mechanism)은 주님의 주권적인 임재로부터 사라질 화려한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다. 율법은 외웠으나, 사랑은 잃어버렸고, 성전은 살아있는 하나님을 담기보다 죽은 규범을 담는 껍질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직접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그 시작은 십자가라는 마지막 제단에서 온전히 단번에 드려질 한 분의 몸에서 성취되고 완성될 것이다. 하늘의 지성소 그 성전에서 영원히 예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구원은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