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사건(마26:1-13, 막14:3-9, 눅7:36-50)
마리아와 마르다의 향유 사건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 7장에서는 유일하게 '죄인인 한 여자'로서 또 다른 독립된 본문이다. 나머지는 모두 동일한 본문에 대한 기록이다.
1.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여 향유를 붓는 사건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 후에 기록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 위한 유대 지도자들의 음모 사건과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사건 사이에 마리아의 아름다운 사랑과 헌신적인 행위를 기록함으로 한 영혼의 아름다움과 사악함을 의도적으로 대조하고 있는 샌드위치 본문이다.
가롯 유다가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에게 돈을 받고 팔기로 결심한 것은 분명히 마리아의 향유 부은 사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요12:3에서는 마리아의 아름다운 행동으로 인하여 "향내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유다가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 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12:5)라고 말한 내용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마리아의 아름다운 행동을 통해 놀라운 향내가 집에 가득 찼듯이 유다의 말을 통해 또 다른 영적 악취가 풍겨 나온 것이다. 결국 마리아의 향유 사건은 온 천하에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인의 아름다운 행동도 영원히 기억되고 전해 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명의 길을 벗어나 멸망의 길을 택하고 말았던 것이다.
2. 반면, 요한은 예수님의 몸에 향유 붓는 사건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전에 기록했다. 즉 "유월절 엿새 전에"(요12:1)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요한이 그렇게 배열한 이유는 예수님의 매장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왕으로서 죽음의 고난을 통해 장차 영광과 존귀로 승귀하게 되실 분으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고 계심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3. 또한 마태복음(26:12)과 마가복음(14:8)을 근거로 해서 볼 때,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고 표현한 것은 마태와 마가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예수님을 높이기 위한 의도가 담겨져 있고, 반면, 요한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고 표현한 것은 그 여인이 자신을 무가치하게 생각한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4. 요한복음에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발생한 만찬 식은 아마도 예수님이 나사로를 부활시켰기 때문에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한 감사의 식사인 것으로 보인다. 나사로가 거기에 있었다고 언급한 사실은 그가 실제로 다시 살아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일 것이다(요12:1).
5. 특별히 눅7:36-50까지에 기록된 죄 많은 한 여인의 향유사건은 더욱 우리에게 죄 용서 받음의 은혜를 새기게 한다. 예수께서 그 시몬의 집에 당도하시던 날, 이 죄 많은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그 집에 찾아갔다. 그것도 종교 우등생들 앞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주님께 가까이 나왔다. 소위 "의로운"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너무나 초라한 한 여인의 등장이었다. 그곳에는 종교 우등생들이라 자처했던 발새인들과 그의 영적 교만 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는 불결하다고 여겼고, 예수는 예수는 수준 이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여자의 헌신을 칭찬하셨다. 39절부터 이어지는 내용을 읽어보라.
결론
이 아름다운 여인이 옥합을 쏟아 주님께 바쳐드리는 헌신은 가장 완벽한 경배의 모델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드린 옥합은 그녀의 전 재산을 쏟아 붙는 행위였다. 그녀의 전 인격과 전 존재를 쏟아 붙는 행위였다. 그녀가 드린 옥합은 물질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는 한 여인의 갈채요 환호성이었다. 한 여인의 헌신의 극치요, 감사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이 여인의 눈물은 단순한 과거의 회한의 눈물이 아니라 천국에 이르는 값진 눈물이었다. 그녀의 눈물의 농도는 끈끈한 진액과도 같았을 것이다. 이 여인은 처음으로 그 주님의 눈동자 속에서 잃어버린 부모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생명의 눈동자를 만났을 것이다. 환희의 코러스가 울려퍼지고 행복의 퍼레이드가 펼쳐지기 시작하고 생명의 샘이 터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인 옥체를 깨뜨리셨고, 우리를 위해 최상의 헌신과 섬김을 몸소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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