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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근거한 노아 행동의 이해(창9:18-27)

새벽지기1 2023. 11. 30. 06:58

성경에 근거한 노아 행동의 이해(9:18-27)

 

우리는 노아에 대한 두 가지 선입견에 대해서 성경적 시각을 따라 교정해야 한다. 하나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6:9) 라는 표현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이와는 정반대의 사건이라 여기는 본문의 포도주 사건에 대한 것이다. 이 중, 본문과 관련하여 노아가 한 행동을 너무 쉽게 단지 "술 취한 늙은이의 추태"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먼저 포도주에 관해 생각해 보자. 성경에는 포도주를 먹고 취하는 것을 경고하는 구절이 간혹 등장하지만, 성경의 대부분에서 포도주는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진 음료다. 포도주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진 음료다." 혹은 "안식의 실현과 관련된 음료다."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신명기 295-6절의 말씀과 신명기 1423절의 말씀을 비교해 보면 도움이 된다. 한 곳에서는 금지된 형태로, 또 한 곳에서는 허용된 형태로 자세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즉 사십 년 동안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하나님이 그들에게 "입을 것 먹을 것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본문임에도 불구하고, 포도주와 떡도 금지되었다. 그 이유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떡을 먹는 대신 만나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이 자신들을 먹이신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셔서."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이해하려면 신명기 14장의 말씀을 보면 된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14:23). 신명기 14장의 말씀은 위의 말씀과 정반대되는 본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그들에게 포도주가 허락된다. 왜일까? 그것은 그들이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을 얻었을 때" 허락되는 것이다. 신명기 29장의 말씀은 그들이 광야에 있을 때에 포도주가 금지되었다는 본문이고, 신명기 14장의 말씀은 그들이 약속의 땅을 얻었을 때는 포도주가 허락되었다는 말씀이다. 이 둘을 통해 우리는 성경이 포도주를 "종말론적" 혹은 "안식이 성취되었을 때" 맛보는 음료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개념 곧, 약속의 땅을 차지하였을 때 포도주가 허락된다는 개념은 신명기의 다른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포도주는 약속의 땅을 차지했을 때의 즐거움의 도구이다(11:14, 12:17-18, 14:26).

 

성경에서 포도주는 약속과 언약의 종말론적인 음료이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많은 곳에서 "도래할 새 언약의 시대""포도주가 흘러넘치는 시대"로 묘사한다(25:6, 27:2, 55:1; 31:12; 2:22; 2:19, 24, 3:18).

 

성경에서 포도주가 이러한 종말론적 성격, 안식의 성취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새 시대를 여셨을 때, 첫 번째로 행하신 표적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결례의 물""포도주"로 바꾸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옛 언약을 새 언약의 종말론적 사건으로 성취하실 분이심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셨다.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에 이스라엘이 주로 무엇으로 비유되었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심으신 포도원"으로 비유되었다. 이 포도원은 과실을 잘 맺으면 과원지기에게 내쳐지지 않지만, 과실을 맺지 못하면 찍어 내버림을 당할 것이다(13:7, 누가복음 136절 이하는 재미있는 본문이다. 과원 지기는 '포도원''무화과나무'를 심은 후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시 무화과나무에게 하신 말씀과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이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신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이 본문에서도 역시, 마지막 날 과실을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에 관한 언급이 등장한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해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15:1-2).

 

포도주가 언약의 성취로써의 종말론적 사건을 보여주기 때문에 예수님이 마지막 돌아가시는 장면에서도 이 내용이 나타난다. 예수님은 분명히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26:29).

 

하지만 주님은 돌아가시기 직전 신 포도주를 마신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주님은 포도주를 받으실 때 그 이유를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19:28)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다 이루었다."(30)고 말씀하고 있다. 즉 앞의 26장의 말씀과 함께 생각해보자면, 주님은 모든 일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포도주를 받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의 용례를 따르면 포도주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 곧 안식이 임하는 때에 마시는 종말론적인 음료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포도주를 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차치하고,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성경이 포도주를 "술이기 때문에 금하고 있다"는 식으로 무조건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성경에서 포도주가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은 '포도' 자체가 가지는 종말론적 성격까지도 관련이 있다. 성경에서는 '포도주'가 아니라, '포도' 자체가 이런 성격을 가진다는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써는 나실 인에게 금지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거룩하게 구별된 나실 인에게는 "알코올 섭취가 금지된 것"으로 오해를 하지만, 말씀을 자세히 보면 문제는 '알코올'이 아니라, '포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 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 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며(6:2-4).

 

민수기 6장에는 나실 인으로 구별하게 되는 규례가 나오는데, 앞서 말한 대로 여기서 금지되고 있는 것은 ''이 아니다. 포인트는 '포도'이다. 포도는 생 포도나 건포도, 심지어 씨나 껍질까지 모두 금지되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중요한 것은 '포도'에 있다는 점이다. 포도가 이런 특성을 가지는 이유는 포도가 가진 종말론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종말론적인 안식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나무들이다. 이에 대한 구절은 굉장히 많지만,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종말론적 안식이 모형적으로 도래했을 때 나타나는 것들이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는다. 평안히 산다는 표현은 그들에게 안식이 임했음을 나타내는 상투적 표현들이다.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왕상4:25).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4:4).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3:10).

 

스가랴서의 말씀은 마지막 날 임하게 될 종말론적 안식 날의 초청을 말한다. 또한 성경에서는 그 안식의 박탈, 곧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인해 그들이 소유한 풍요를 빼앗기게 될 때도 같은 심상이 사용된다.

 

"그들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그들의 지경에 있는 나무를 찍으셨도다."(105:33).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발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34:4).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심상은 심판의 맥락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8:13).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1:7).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도다."(12) 이와 같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인간의 즐거움과 관련되어 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3:17).

 

우리가 잘 아는 이 구절 역시 단순히 농사거리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누렸던 참된 안식과 평안이 불순종으로 인해 박탈당해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노아의 이야기를 읽으면, 노아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여기서 '취하였다'는 말의 의미도 악한 의미로서가 아닌, "마시고 흡족하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창세기 9장의 이 사건은 "한 늙은이가 술을 먹고 주정을 부린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노아의 시대에 종말론적 안식이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 방편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몇 가지 근거를 살펴보자.

1. "노아"라는 이름은 안식과 관련이 있다.

 

성경에서 노아는 "안식을 주는 자"이다. 우리는 창세기 529절에서 노아가 "안식을 주는 자"로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아들이 안위하리라(안식하게 하리라)하였더라."

 

어렵게 볼 것 없이 '노아'라는 이름이 바로 '안식', '정착하다'라는 뜻이다. 히브리어로 '안식''누아흐'인데, 이 단어가 의미 있는 것은 대홍수의 날에 방주가 처음으로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노아(노아흐 : 안식)의 이름이 바로 이 누아흐에서 나왔다. , 성경에서 노아는 "수고로이 일하던 그 시대에 안식을 주는 자"였다. 노아가 안식을 주는 자라는 사실과, 홍수 후에 그가 종말론적/안식의 음료인 포도주를 마셨다는 사실을 결부시켜 본다면 여기에서 상당한 의미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언급한 성경 구절들을 잘 살펴보면, 포도주는 지극히 종말론적인 안식과 관련되어 있다. 종말론적 안식을 나타내는 포도주와 "안식을 성취하는 자"로 지목되어 있는 노아, 이 둘은 굉장히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노아는 안식을 주는 자였으므로 안식의 음료인 포도주를 마시고 장막 안에서 잠들었다. 이렇게 볼 때는 그가 장막 안에서 누린 안식은 '비난할'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다.

 

2. 노아는 "포도원을 심었다"

 

창세기 920절의 한글 성경은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 번역은 정확하지 않다. 정확한 번역은 "포도나무를 심었다."가 아니라 "포도원을 심었다."이다. 여기서 '심었다'에 사용된 단어는 창세기 28절에서 하나님께서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심으시고)"에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신약 성경에서 포도원을 심는 이는 항상 하나님이시다. 과원 주인은 항상 하나님이다. 그런데 창세기 9장에서는 포도원을 심는 이가 노아이다. 이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여기서 '심다'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심으실 때와 같은 단어이다. 이런 점들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어들의 나열일 뿐일까? 아마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에서 노아가 하나님이 처음 에덴동산에서 하셨던 일과 유사한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하나님이 에덴을 창설하셨을 때 거기에는 안식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창세기 215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라고 할 때의 '두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안식하다'이다. 그들은 "안식하게 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설하셨을 때 거기에는 '안식'이 있었다. 이런 제반 내용들을 노아와 관련시켜 생각해보면, 연관 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벌거벗었다는 것

 

노아의 행위가 "에덴을 심으신 하나님의 행위"와 관련이 있고, "안식을 준다."는 점에서도 관련성이 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그가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보게 되면, 조금 다른 면이 보인다. 우리는 전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이를 '추태'라고만 생각하지만,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던 것을 기억한다면, 앞의 여러 가지 에덴에서의 정황과의 유사성 안에 이것까지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창세기 9장의 본문은 에덴동산과 연관성이 너무 많다. 그런 시각 안에서 본다면, 노아가 벌거벗은 것이 결코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노아는 아담과 같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원초적인 모습 바로 그 원형에 이르러 참 안식을 누리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내용들을 종합해 보자면, 노아가 한 행동은 이렇다.

 

1) 노아는 하나님이 에덴을 심으신 것처럼 포도원을 심었다.

2) 노아의 존재는 근원적으로 '안식'과 연결되어 있어 에덴의 안식을 연상시킨다.

3) 노아는 이 포도원에서 수확한 포도주를 마셨는데, 이는 종말론적 안식을 의미한다.

4) 그러므로 그가 취하였다는 것은 흡족케 된 행복한 상태(안식)를 의미한다.

5) 그가 벌거벗었다는 것은 앞의 정황들과 함께 생각해 보면 아담의 첫 모습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이 본문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앞에서 제기했던 난제들이 쉽게 해결된다. 함은 어떠한 자인가? 함은 단순히 아버지의 벌거벗었음을 비웃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을 비웃은 자다. , 그는 불경건한 자다. 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종말론적 안식을 비웃는 불신자의 행동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노아가 잠이 깨었을 때 그를 향하여 진노하고, 저주한 것은 대단히 성경적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왜 성경이 노아에 관하여 질책하거나 악한 행동을 한 것으로 묘사하지 않고 있는지도 명백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고서, 아들을 저주나 하는 괘씸한 늙은이"를 발견하는 대신, 하나님의 종말론적 안식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발견해야 한다.

 

 

참고사항

 

히브리어 '누아흐''안식하다'라는 말에서 장소를 나타내는 접두어가 붙어 명사화된 말인 '메누하''안식할 곳, 쉴 곳'이라 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 총 20번 정도 나온다. 대표적인 말씀은 민수기 1033절에 등장한다. 신명기 12:9에서도 안식과 기업에 라고 할 때, '안식'의 보다 더 정확한 의미는 '안식처'이다. 9절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아직 안식처에 이르지 못하였다. 신명기 12:9절 말씀의 맥락은 분명히 광야 생활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명기의 정황도 앞의 민수기에서와 같이 이스라엘이 아직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이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민수기에서도 안식을 찾아 이스라엘이 떠돌고 있는 것처럼 묘사했듯, 신명기 12:9절도 같은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아직 안식처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열왕기상 856절에 나오는 말씀도 역시 '메누하'이다. 여기서 이 말을 하고 있는 왕은 솔로몬이다. 한마디로 '메누하'"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고 번역한 말, 이것이 '안식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