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지금까지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천사보다 더 크고 모세보다 더 높은 분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어서 저자는 14절부터 10장 18절까지 매우 장황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대제사장인 이유를 설명한다.바로 앞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했다(12-13절). 죄성에 물든 인간에게 그것은 공포스러운 일이다. 내면에 감추어진, 자신도 다 알지 못하는 죄가 모두 드러난다면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4절의 접속사 ‘운’을 “그러나”로 번역한 것은 잘 한 일이다. 우리에게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감싸주실 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시다.
여기서 저자는 예수님에 대해 세 가지의 수식어를 사용한다. 첫째는 “하늘에 올라가신”이다. 그분은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직접 경험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가셨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속죄 제사를 드렸던 지성소가 있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장소였다. 예수님은 지성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셨다. 둘째는 “위대한 대제사장”이다. 아론의 후손에서 나오는 인간 대제사장과 구분하기 위해 저자는 “위대한”이라는 말을 붙였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 가운데 사로잡혀 살아가는 인류를 위해 당신 자신의 몸으로 속죄 제사를 드린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셋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셨다.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신 후에 하나님의 보좌로 돌아가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시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가 샅샅이 드러난다 해도 두려워 떨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신앙고백”이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리킨다. “굳게 지키다”는 “바싹 잡아당기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15절)라는 표현에는,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의문 즉 “예수님이 과연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나 할까?”라는 의문이 전제되어 있다. “동정하다”로 번역된 ‘쉼파테오’는 영어의 “동정하다”(symphatize)의 어근이다. 이것은 값싼 연민이 아니라 같이 아파할 정도로 깊이 공감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실제로 경험하셨다. “시험”이라고 번역된 ‘페이라조‘는 “유혹”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시험은 주로 죄에 대한 유혹에서 온다. 그분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는 짓지 않으셨다.
여기서 저자는 다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면, 우리는 두려워 떨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16절)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에게 하나님의 보좌는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은혜의 자리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그 보좌 앞에 서야 하겠지만, 지금도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여 그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16절) 받을 수 있다. “제때”는 “적절한 때”를 의미한다.
묵상: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vere deus)이시고 ‘참 인간’(vere homo)이셨다”는 고백은 이단과 정통을 구분하는 기준입니다. 기독교 2 천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이 고백의 한쪽만 인정하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최초로 나타난 영지주의는,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의 몸을 빌어 잠시 동안 활동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운명하기 직전에 떠나셨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분이 참 인간이셨다는 사실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현설”(docetism)이라고 부릅니다. 온전히 성육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것처럼 가장했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분이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단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탁월한 예언자 혹은 위대한 교사로 인정할 뿐,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예수님을 예언자로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합니다.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크리스찬 싸이언스, 유니테리언 같은 교파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삼위일체시라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은 어떤 신학적 천재가 창안해 낸 교리가 아니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그 이후로 성령을 통해 이루어 오신 모든 일들을 종합하여 고대 교회가 내린 결론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면 신약성서의 기록들 중 많은 것들이 설명 되지 않고, 우리가 신앙 생활을 통해 경험하는 것들도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한 존재가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인간적인 이성과 상식과 경험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이 생깁니다.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지만, 믿음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분 앞에 서면 큰 위로와 만족과 용기를 얻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아시는 분이기 때문이며,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린 분이기 때문이며,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고 중보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분이 인간이기만 했다면,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만일 그분이 신이기만 했다면, 우리는 그분이 너무나 낯설고 무섭기만 했을 것입니다.
기도: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요술 부리기를 마다하시고, 친히 저희의 모습으로 낮아지셨고, 그리하여 저희의 연약함의 한계와 저희가 당하는 유혹의 한계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에 넘어질 때에도 저희는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는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렇게 넘어지고 일어날 때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저희의 희망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좋은 말씀 > -사귐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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