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유신 정권 말기와 제 5 공화국 시대에 청년기를 지났습니다. 그 시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대학 4 년 동안 목회자로서의 소명감을 벗어 보려고 여러가지로 궁리해 보았지만 결국 하나님께 손을 들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신학대학에 가려다가 아버님의 반대로 인해 4년이 늦어진 셈입니다.
신학 공부를 하면서 저는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저의 입장을 정하기로 했습니다. 목회자의 삶에는 특별한 고려 사항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하나가 결혼의 문제였습니다.
유신 시대에도, 전두환 정권 시대에도, 천주교 사제들은 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싸우는 이들이 많았는데 개신교 목회자들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저는 사제와 목회자는 예언자로서 사회적인 불의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천주교 사제들에 비해 개신교 목회자들이 사회적 불의에 대해 상대적으로 침묵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는 여러가지일 것입니다. 저는, 그 이유 중 하나가 가족의 안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독신으로 사는 것에 대해 깊이 고민했었습니다. 독신으로 살면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더 잘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문제를 두고 몇몇 선배들을 찾아가 조언을 받기도 했습니다.
장고 끝에 저는 결국 결혼을 하기로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목회 현장의 필요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흔히 있는 교회’의 ‘흔히 있는 목사’로 살고 싶었습니다. 보통 교회에서 일반적인 목회를 하기 위해서 결혼은 필수적인 요건으로 보였습니다. 선배 목사님들은 “독신 목사를 오라고 할 교회가 있을지 생각해 보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지 못해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정의 제도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도 어긋나고, 저의 배우자가 될 사람에게도 예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저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결혼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결혼을 선택했다면, 저의 결혼을 제 믿음과 헌신의 열매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결혼 초기부터 지금까지 제가 힘써 온 일입니다. 저의 믿음이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언행을 통해 가장 먼저 실천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결혼 초기부터 그 노력에 있어서 수 없이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했습니다. 그 실패들을 통해 오늘의 제가 빚어졌고 제 가정이 빚어졌습니다. 오늘의 저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제 아내이고 제 자녀들입니다.
가정은 우리의 믿음에 대해 가장 일차적이고 치열한 시험장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성적표입니다. 부부 생활과 가정 생활에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려운 이유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함께 풀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온 가족이 같은 목적을 위해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고 희생할 때 가정은 지상 천국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상 천국의 순간은 수 많은 실패를 통해 가족 구성원 모두가 새로 빚어지는 과정에서 때로 임하는 선물입니다. 실패는 노력과 시도가 없이는 경험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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