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막 2:13)
예수님은 바닷가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평소에 사람들에게 ‘랍비’라는 호칭을 얻었듯이 예수님은 가르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기독교 교육학자들은 healing, teaching, preaching을 예수님의 삼대업무였다고 말하지만, 여기서 가르침과 설교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구분은 가능합니다. 설교는 선포의 성격이 강한 반면에 가르침은 설득의 성격이 강합니다. 선포는 계시에 근거하지만 설득은 인식에 근거합니다. 선포는 위로부터의 일이라면 설득은 아래로부터의 일이겠지요. 선포로서의 설교에는 믿음이 요구되지만 설득으로서의 가르침에는 합리성이 요구됩니다. 그렇지만 설교는 기본적으로 선포이면서 동시에 설득이며, 가르침도 역시 설득이면서 동시에 선포입니다. 어쨌든지 오늘 본문이 보도하듯이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 현실에서 가르침이 작동하고 있을까요? 교회에서 예배와 기도회, 구역모임, 성경공부, 각종 모임이 전천후로 열리고 있으니까 당연히 가르침이 살아있을 것으로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종교 행사나 모임 자체가 바로 가르침과 직결되는 게 아닙니다. 상당히 많은 경우에 종교행사와 모임들은 이미 규정된 교회생활을 강화할 뿐이지 종교의 근본인 생명의 세계로 끌어들이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사회교육도 그렇지만 교회교육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신앙경험을 일종의 정보축적으로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교육의 못자리라 할 신학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생들은 신학교에서 경건의 모양을 배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따라서 기도하고, 리더십을 공부하고, 교리를 공부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신학적 영성으로 들어가는 일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로 졸업한 그들은 이제 신학적 사유와 담을 쌓고 오직 조직(institution)으로서의 교회 관리에만 마음을 쏟습니다. 이런 목회자들에게서 신앙교육을 받는 평신도들은 결국 신앙의 심층을 맛볼 없습니다. 마치 동네바둑을 두는 사람에게서 바둑을 배우는 것처럼 신앙의 본질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 앞에서 우리는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비단 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이고, 더 근본적으로 모든 교육 자체가 이런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더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진리는 누가 가르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남으로써만 가능한 세계입니다. 이 말은 아무리 괜찮은 목사를 만난다고 해도 그가 그리스도교 진리를 무조건 경험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준비가 안 된 목사를 만난다고 해서 그런 경험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진리 자체가 각각의 사람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용어로 말한다면 성령은 성령 스스로 사람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남에게 배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나는 것, 스스로 깨닫는 것이라는 말은 모든 교육 현장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태에 대한 표면적인 이해가 바로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테니스를 대충 배우는 건 가능하지만 테니스공을 몸으로 느끼는 경험은 배워서 되는 게 아닙니다. 라켓과 공과 사람이 일치되는 그 순간은 본인 스스로 깨우쳐야 합니다. 운동도 그럴진대 신앙은 오죽하겠습니까? 성령 체험은 목사로부터 배우는 게 아니라 성령 자체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몇 가지 신앙 정보를 신앙 자체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도달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인 성령만이 우리를 바르게 가르치십니다. 그 사실을 바르게 알려주는 역할이 바로 목사에게 주어진 업무입니다. 따라서 목사들은 자신들이 직접 신자들을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주님, 당신만이 저의 선생이심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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