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막 2:7)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제사장 등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언행에서 신성모독을 느낀 이유는 자신들이 절대적인 대상으로 생각하던 하나님을 예수님이 상대화 한다고 판단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이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여길 정도로 하나님의 신성을 절대화 하고 있었으니까 하나님을 아주 가까운 호칭인 ‘아빠’로 부른 예수님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무조건 배척하면 곤란합니다. 오히려 그들의 종교적인 태도를 존경해야 합니다. 만약 그들의 경건생활이 없었다면 유대교는 존속할 수 없었을 겁니다. 수많은 고대 종교가 한 때 번영했다가 일종의 박물관 종교로 떨어진 걸 보면 야훼 하나님의 신앙 전통을 지켜내려는 그들의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합니다.
포스트모던 이후로 전통은 모두 낡고 진부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와 신학에서도 역시 이런 흐름이 매우 강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신학 패러다임을 찾아가는 거야 마땅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토대를 허무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종교다원주의’ 같은 주장이 그렇습니다. 모든 종교가 진리이기 때문에 종교 사이에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들이 강력하게 제기됩니다. 결국 같은 정상에서 만나는 서로 다른 등산로와 진리에 이르는 여러 종교의 길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보살’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다원주의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를 내거는 기독교 패권주의와 마찬가지로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종교다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종교이기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여기서 기독교만이 실증적으로 진리이고 그 이외의 모든 종교는 사이비라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각각의 종교체험이 각각의 종교에서 궁극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종교적 특징을 얼버무려서 새로운 종교형식을 만들어가는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이는 흡사 자기 아내를 잘 알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내와 자기 아내를 비교하고, 더 나아가서 서로의 좋은 점을 딴 이상적인 아내를 머릿속으로 그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보살’은 그것이 아무리 기발한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무의한 착상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아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정확하게 따라가는 작업에 우리의 모든 삶을 투자해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섣불리 타종교와의 대화라거나 종교다원을 주장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그리스도교 전통으로 돌아가는 작업입니다. 사도신경의 전통 속으로, 복음서의 전통 속으로, 지난 2천년 역사에서 일어났던 많은 종교회의와 신앙고백의 전통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대화하는 게 곧 신앙생활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일은 전통을 문자적으로 답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자는 그 안에 영적인 리얼리티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은 오늘 새로운 삶의 자리에서 그런 영적인 리얼리티를 새롭게 제시할 수 있을 겁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수호하는 데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들은 요즘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들의 눈에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한 예수님의 언행이 신성모독으로 보였습니다.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어떻게 새로운 세계에 마음을 열 수 있을까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외줄 타는 광대와 같은 영적인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주님,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열린 눈으로 보기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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