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시편 43편: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

새벽지기1 2022. 1. 20. 06:42

 

해설:

이 시편은 앞의 시편 42편과 연결된 시입니다. 마지막 절(5절)은 앞의 시편에서 두 번 반복되었습니다(5절, 11절). 아마도 하나의 시편이 편집 과정에서 둘로 나뉜 것 같습니다.  

새번역은 “비정한 무리”라고 했지만 개역개정은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라고 했습니다(1절). 유다를 멸망시킨 바빌로니아를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내 송사를 변호하여 주십시오”라는 말은 그 나라를 징벌해 달라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 달라는 뜻입니다. 기도자는 하나님을 요새로 삼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것 같은 심정에 빠집니다(2절). 

 

3절에서는 기도자의 정서가 달라집니다. 42편에서 본 것처럼 그는 현실에 잠시 눈 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묵상하는 중에 낙심 했던 마음이 회복되고 믿음이 되살아납니다. 묵상을 통해 “주님의 빛과 주님의 진리”(3절)가 그에게 임하자, 그는 상상 속에서 주님의 산으로 가서 주님이 계시는 장막에 들어가 제단 앞에 섭니다. 그곳에서 그는 수금 가락에 맞추어 기뻐 춤추는 상상을 합니다(3-4절). 주님께서 살아계시니 언젠가 유배 생활을 청산하고 몸으로 시온 산에 이르러 성전에서 춤을 추며 기뻐할 날이 올 것입니다. 

 

이 소망으로 그는 자신을 다시 격려합니다. 낙심이 될 때 자신의 마음을 향해 “내 영혼아, 어찌하여 그렇게도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도 괴로워하느냐?”고 묻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 스스로를 다독이고 믿음을 회복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다시 찬양할 때가 올 것입니다(5절). 

 

묵상:

기도자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나를 크게 기쁘게 하시는 하나님”(4절)이라고 말합니다. 개역개정에는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들은 주로 “my exceeding joy” 혹은 “my greatest joy”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반면,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은 “the source of all my joy”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기도자는 이 말로써 1) “하나님은 내가 기뻐하는 모든 것들 중에서 최고이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이거나 2) “하나님은 내 모든 기쁨의 원천이십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기도자의 마음에는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낄 뿐 아니라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기쁨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만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그분 안에 있을 때 온전한 만족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의 품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충만한 안식과 위로와 사랑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만족을 얻기 전까지 온전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분 안에서 완전한 기쁨을 경험 하면 우리는 고갈되지 않는 기쁨에 젖어 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을 성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힘씁니다. 

 

유배지에서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기도자처럼 우리도 언제 어디서든 예배와 기도와 묵상을 통해 지성소로 나아갑니다. 그분 안에 있을 때 우리의 존재는 흔들림 없는 터전 위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머물러 사는 것은 기쁨의 샘물을 품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