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회복하자
기독교 방송 관계자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요즘 불교계가 축구선수들의 세례머니를 문제 삼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들을 어떻게 보며, 요즘 교회 밖에서 교회를 향한 태도를 볼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실 이러한 질문은 어제 오늘 받은 것은 아닙니다. 내용은 다르지만 동일한 질문을 자주 받았습니다. 2년 전에 국가 인권위원회실에 있었던 종교편향에 대한 포럼에 참석하여 발표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주 발제자로 나오신 분이 기독교의 불교 편향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맹공격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고 반면에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불교계의 공동의 움직임을 주장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매우 위험스러운 내용이지만 기독교에 대한 불교인들의 보이지 않는 불만을 여과 없이 볼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반면에 불교인들이 누리고 있는 특혜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 것도 보았습니다. 당시에 이렇게 흥분을 하는 이유가 혹시라도 그동안 누려왔던 기득권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면 참으로 슬픈 일이라고 말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전국 사찰이 누리고 있는 혜택은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는 현 시점에 매우 독특한 구조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시점에서 점점 기독교에 대한 안티 세력들의 공개적 비판과 타 종교인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있어서 타부시할 것이 아니라 다시금 우리의 자리를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삶의 문제는 언제나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문제임이 분명합니다.
우선 신앙의 삶이란 언제나 어려웠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기에 사람들은 꺼려합니다. 내가 믿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믿음의 순종을 말하기에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늘 자기 주도의 삶을 원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자기의 주도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주도적인 삶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 살아가기에 세상은 아주 못 마땅하게 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모든 역사에서 힘들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반대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할수록 진리는 더욱 왕성하여진 것이 역사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안티 운동은 소모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난타전을 버리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오히려 이들의 소리에 우리의 모습을 차분하게 살펴보고 진리로 더욱 굳게 무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명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두 번째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종교로 바꾸는 불의함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종교는 삶의 부족을 채워주기 위하여 만들어낸 자연의식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진리라고 하셨을 때 이러한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종교로 만들어서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일에 사용한다면 사람들의 조롱거리 이전에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삶입니다.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교전쟁을 할 것이 진리전쟁을 해야 합니다. 삶의 전쟁을 치뤄야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 한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자신도 진리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서 누구를 비판하고 소망 없다고 하겠습니까? 진리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말로 끝나면 종교로 떨어집니다. 하지만 진리는 말에서 시작하고 삶으로 완성됩니다. 말과 삶이 하나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시대에 무엇보다도 회복해야 할 것은 종교성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셋째는 복음의 핵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복음 진리가 주는 복된 소식은 삶의 질이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의 복음도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샤머니즘도 아닙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복음이 침몰한 채 떠오르지 않고 이 상한 소식들이 교회를 뒤 덮고 있습니다. 부의 복음이라고 하는 쓰레기가 강단을 휘감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회복하지 않는 한, 그는 거짓 복음을 가지고 있는 자이며, 교회에 있으나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일생을 십자가를 전하는 일에 바쳤습니다. 십자가는 미련하며 저주의 상징이지만 부름 받은 자들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자랑할 것이 십자가외에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절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하나님께 버림 받으심입니다.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아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게 하였고 그 피로 믿는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 아래 있으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십자가가 교회에서 날마다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며 삶에 대하여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랑 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없음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결코 커지는 것을 자랑하지 못합니다. 부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학력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권력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자랑하는 자는 아직도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오직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이러한 자랑이 교회에 있다면 세상을 교회를 두려워합니다. 교회가 보여주는 빛에 세상의 양심은 찔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복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 부활의 영광을 소유한 자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자랑합니다. 그것은 부활은 재창조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첫 창조 이후 아담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죄의 저주에서 해방을 맛보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다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왜 인간에 죽음이 오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별과 슬픔과 고통 그리고 두려움이 있는 이 죽음이 왜 존재해애 합니까? 사람들은 지금도 이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두려움과 슬픔의 현장인 죽음이 인간에게 오는 것은 아담이 물려준 죄 때문입니다. 인간이 물려받은 죄의 저주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의 저주를 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의 죽음을 지시고 죽으셨던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신 날입니다. 부활의 날은 새 생명의 날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으면 죽음의 공포에 의하여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끝이라면 우리는 슬프고 두렵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잠시 헤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만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감을 가지게 합니다. 이것이 부활이 주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은 십자가 없이 불가능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이 땅의 소망에 목숨 걸지 않습니다. 이 땅의 것에 최선을 다하고 아낌없이 남겨주고 나눠줍니다. 이것이 부활의 예수를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겨 쌈을 당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겨 쌈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가진 권력으로 짓 눌려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이러한 시대에 더욱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회복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교회가 앞장 서야 할 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시대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은 분명합니다.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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