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 불통이 되면 망합니다.
제3회 기윤실 목회자 리더쉽 포럼의 주제로 소통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교회와 사회의 소통이 어떠한가? 교회와 교회의 소통은 어떠한가?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고 다루었습니다. 이렇게 소통의 문제를 다룬 것은 지난번 기윤실의 사회신뢰도 조사에서 나왔듯이 교회에 대한 불신에 있어서 32%나 되는 사람들이 교회 지도자들의 언행 불일치를 뽑았습니다. 지도자들의 언행불일치가 한국 교회 신뢰도를 떨어트리는 중요한 이유라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은 좋은데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 나가기 싫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 교회는 점점 숫자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도 점점 무너지고 있습니다. 주변의 대형교회들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한국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교회 숫자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일을 하다면 보면 이러한 현실을 몸으로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지역에서 지난 일 년 동안 사라진 교회가 10여개나 되었습니다. 작은 지역에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다면 전국적으로 볼 때 그 숫자는 심각한 수준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안타까움이 일어난 원인은 무엇일까? 김동호 목사는 한국 교회의 오만 때문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몸이 커지면서 남을 섬기는 자리에 서는 것 보다 점점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에 섰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한기총이 SBS에 대하여 한국 교회를 건딜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겠다는 발언을 들면서 이것은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의 전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세상과 대화를 하지 않고 싸우겠다는 선언입니다. 소통이 아니라 불통하겠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자신을 공개하고 소통을 하면 안티 기독교인을 더욱 활성화되고 양성화 하는 것이라 염려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부 옳은 이야기입니다. 내부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였던 내용을 알았으니 하이에나 같이 먹이감을 기다렸던 안티에게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나 안티의 역할은 늘 한계가 있습니다. 진리가 아니기에 사라집니다. 잠깐 아픔을 겪겠지만 염려할 존재는 아닙니다.
사실 안티는 언제나 존재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안티들이 수두룩하였습니다. 그리고 안티들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죽임까지 당하셨습니다. 안티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서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안티가 있다는 것은 예수가 진리임을 보여주는 선언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안티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안티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정말 힘들고 지칩니다. 왜냐하면 안티들이 정직한 질문을 던지고 정직한 답변을 얻고자 하는 모습이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티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면에서 큰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는 성경이 참 진리임을 확고하게 하여 줍니다. 둘째는 진리를 가진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안티가 귀찮기 하지만 소통을 포기할 정도로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예수도 좋고 예수 믿는 사람도 좋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소통이 주는 열매입니다. 소통은 하나님이 인격적이며 존재하시면 말씀하시는 분임을 확신하는 이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소통하는 일에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요즘 한국 정치를 보면 소통이 불통이 될 때 나라가 어떻게 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로가 자신의 주장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알지 못합니다. 결국 불통의 정치가 되고 국회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국회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국론이 분열되고 있습니다. 나라가 사분오열되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도 분명한 확신이 있기에 할 것입니다.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도 확신이 있어야 행동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확신과 확신이 만나서 더 좋은 확신을 얻기 위하여 소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의 모습은 이러한 면에서 매우 부족합니다.
이러한 소통의 부제는 온갖 부조리를 낳고 있습니다. 최근의 사법부에 대한 일부 단체들의 행동은 소통이 무너진 사회의 불행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통을 포기하는 것은 소인배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소인배들이 날 뛰는 소인국과 같이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대북관계에서도 위기를 낳고 있습니다. 유일한 분단국가의 현실은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언제까지 이러한 위험과 슬픔 가운데 살아야 합니까? 앞선 세대들은 치를 떠는 전쟁을 경험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경험은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은 이들은 없을 것입니다. 전쟁이 없는 나라가 되려면 소통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소통이 없으면 집안에서도 전쟁이 일어납니다. 하물며 국제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주적관계를 설정하고 선제 타격하겠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현실에서 우리는 전쟁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습니다. 전쟁을 맞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소통입니다. 힘들더라도 소통을 통하여 전쟁을 막아야 합니다. 소통이 불통 되면 모두가 망합니다.
소통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소통은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지으시고 그와 소통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셨고 함께 동산의 문제를 의논하셨습니다. 소통이 원할 할 때 동산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타락한 아담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첫 번째 모습은 하나님과의 불통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찾고 소통하고자 하였으나 아담은 도망쳤습니다. 결국 그의 삶은 땀을 흘리며 고통을 감내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인류의 현실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구원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회복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통이 무너진 교회를 보시기바랍니다. 그 곳은 더 이상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소통이 없는 공동체는 지옥입니다. 소통이 불통이 되면 모두가 망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여전히 소통입니다. 이러한 소통은 교회의 모습에서도 중요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대형교회와 작은 교회의 관계가 불통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소통이 무너지면 교회도 공멸합니다. 작은 교회 없는 대형교회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대형 교회를 무시할 수 없는 현실도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소통입니다. 김동호목사는 대형교회와 작은 교회의 소통을 위하여 작은 교회는 당당하고 대향교회는 겸손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대형교회의 헌신이 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대형교회가 겸손하게 작은 교회를 동역자로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통이 됩니다.
이렇게 소통이 자유로울 때 교회는 사회로부터 존경 받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언제나 이 일은 힘든 일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이러한 소통을 위하여 헌신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교의 본질이 소통이라는 견해는 오늘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소통을 위한 소통도 필요합니다. 목표를 위한 소통도 필요합니다. 불통이 되지 않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소통으로 서로가 살아나는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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