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시온 산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좁은 문을 통과한 자에게는 예수님이 주시는 겉옷과 이마에 표식과 봉인된 두루마리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좁은 문을 통과하여 천성을 향해 가는 데 힘이 되고 마지막 천성 문에 들어갈 때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증거물 없이는 천성 문에 도달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좁은 문을 통과해 왔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뛰어 넘은 자들입니다. 이들의 이름은 형식주의자와 위선자들입니다. 이들은 헛된 영광의 땅에서 태어나서 영광을 얻기 위하여 시온 산으로 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불법인 줄은 알지만 관습에 젖어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 이해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형식주의와 위선자의 모습은 하나님의 지시 없이 인간의 경험과 관습에 따라 신앙 생활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율법과 의식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는 소리에 비웃음으로 쳐다볼 뿐입니다. 이들은 구원의 은혜의 수단 가운데 있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천로역정의 이 모습은 우리의 모습을 잘 비쳐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이래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경험을 더욱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보다는 온갖 율법을 통하여 말씀을 가리고 형식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이러한 형식의 폐해가 바로 중세의 로마가톨릭입니다. 이들은 말씀보다는 형식에 치우친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개혁자들을 보내어 교회를 새롭게 하였던 것입니다. 로마가톨릭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어가게 하였습니다. 면죄부를 팔고, 대형 성당을 건축하고 신부의 권위를 신성시 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형식과 위선은 교회를 몰락하게 할 뿐 아니라 성도들 역시 지옥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교훈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시대에 이러한 모습들이 점점 드러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기보다는 담을 넘는 것을 선호하는 모습을 봅니다. 십자가를 지며 죄를 아파하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현실을 이해하여, 힘든 설교는 그만하고 즐겁고 행복하고 안식을 누리는 설교를 할 것을 요청합니다. 죄를 지적하고 지옥의 문제를 말하는 설교는 더 이상 그만하자고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자는 설교,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대한 설교는 이제 멈추고, 편하고 쉼을 얻을 수 있는 설교와 공연을 하자고 합니다. 아주 그럴듯하게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안한 곳을 찾고 선호합니다. 그래서 웃기는 설교와 광대와 같은 과장된 몸짓을 드러내는 설교자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죄악을 통회하고 자복하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어 합니다.
여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교회는 점점 화려해지고 있습니다. 개척하는 목회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교회가 화려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작고 힘든 삶을 경험하기를 싫어하고 편한 것을 추구하기를 기뻐하기에 초라한 교회는 아예 발을 들어 놓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담한 도전(?)을 하는 분들을 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작은 교회를 떠나 대형교회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가 주는 서비스가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도 그렇게 광고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점점 대형화되고 사람들은 점점 대형교회로 모입니다. 교회의 대형화는 섬기는 일을 많이 할 수는 있지만 교회의 본질은 어쩔 수 없이 퇴보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교회의 옥한흠 목사님은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교회를 건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제 그러한 생각이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 정신은 옳았습니다.
교회의 대형화는 형식주의 신앙과 위선적 신앙인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을 낳게 합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대형교회 다니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자랑합니다. 교회의 크기로 신앙의 성숙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보다 이름 있는 교회 다니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만족해합니다.
이는 성도뿐만이 아닙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형교회가 목사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어느 면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역사상 이단들도 대형화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대형 그 자체가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교회를 허무는 일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중독에 빠져 살고 있습니까? 중독에 빠지면 자신들의 삶만을 바라봅니다. 역사의식을 갖지 않고 당장 불편한 것만을 걱정합니다.
그래서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유학파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한국교회 목사들만큼 유학을 많이 하는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유학이 큰 교회를 섬기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목사와 성도들이 가지고 있다면 담을 넘는 위선이며 형식주의자입니다. 쉽고 빠른 길을 가고자 한다면 당장은 편할 수 있지만 결국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사는 길이 있다면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조금 불편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좁은 길로 가야 소망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가는 길이 아니라 주님이 걸어가신 길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누군가 이 길을 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를 선배들이 아름답게 시작하였다가 결말이 부끄럽게 끝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이상하게도 마지막은 추악한 맘몬주의자가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나 불편합니다. 그럴듯한 합리화를 통하여 맘몬주의를 따라가는 것을 봅니다.
신앙의 길에는 지름길이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길은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가는 여정입니다. 이 길에는 사치와 향락 그리고 온갖 야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길에 동화되지 않고 이겨내는 것이 참된 신앙의 길입니다. 담을 넘어 쉽게 가는 것은 강도와 절도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고 두렵고 떨림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뛰어 넘은 자들입니다. 이들의 이름은 형식주의자와 위선자들입니다. 이들은 헛된 영광의 땅에서 태어나서 영광을 얻기 위하여 시온 산으로 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불법인 줄은 알지만 관습에 젖어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 이해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형식주의와 위선자의 모습은 하나님의 지시 없이 인간의 경험과 관습에 따라 신앙 생활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율법과 의식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는 소리에 비웃음으로 쳐다볼 뿐입니다. 이들은 구원의 은혜의 수단 가운데 있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천로역정의 이 모습은 우리의 모습을 잘 비쳐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이래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경험을 더욱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보다는 온갖 율법을 통하여 말씀을 가리고 형식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이러한 형식의 폐해가 바로 중세의 로마가톨릭입니다. 이들은 말씀보다는 형식에 치우친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개혁자들을 보내어 교회를 새롭게 하였던 것입니다. 로마가톨릭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어가게 하였습니다. 면죄부를 팔고, 대형 성당을 건축하고 신부의 권위를 신성시 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형식과 위선은 교회를 몰락하게 할 뿐 아니라 성도들 역시 지옥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교훈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시대에 이러한 모습들이 점점 드러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기보다는 담을 넘는 것을 선호하는 모습을 봅니다. 십자가를 지며 죄를 아파하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현실을 이해하여, 힘든 설교는 그만하고 즐겁고 행복하고 안식을 누리는 설교를 할 것을 요청합니다. 죄를 지적하고 지옥의 문제를 말하는 설교는 더 이상 그만하자고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자는 설교,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대한 설교는 이제 멈추고, 편하고 쉼을 얻을 수 있는 설교와 공연을 하자고 합니다. 아주 그럴듯하게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안한 곳을 찾고 선호합니다. 그래서 웃기는 설교와 광대와 같은 과장된 몸짓을 드러내는 설교자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죄악을 통회하고 자복하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어 합니다.
여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교회는 점점 화려해지고 있습니다. 개척하는 목회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교회가 화려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작고 힘든 삶을 경험하기를 싫어하고 편한 것을 추구하기를 기뻐하기에 초라한 교회는 아예 발을 들어 놓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담한 도전(?)을 하는 분들을 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작은 교회를 떠나 대형교회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가 주는 서비스가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도 그렇게 광고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점점 대형화되고 사람들은 점점 대형교회로 모입니다. 교회의 대형화는 섬기는 일을 많이 할 수는 있지만 교회의 본질은 어쩔 수 없이 퇴보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교회의 옥한흠 목사님은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교회를 건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제 그러한 생각이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 정신은 옳았습니다.
교회의 대형화는 형식주의 신앙과 위선적 신앙인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을 낳게 합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대형교회 다니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자랑합니다. 교회의 크기로 신앙의 성숙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보다 이름 있는 교회 다니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만족해합니다.
이는 성도뿐만이 아닙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형교회가 목사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어느 면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역사상 이단들도 대형화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대형 그 자체가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교회를 허무는 일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중독에 빠져 살고 있습니까? 중독에 빠지면 자신들의 삶만을 바라봅니다. 역사의식을 갖지 않고 당장 불편한 것만을 걱정합니다.
그래서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유학파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한국교회 목사들만큼 유학을 많이 하는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유학이 큰 교회를 섬기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목사와 성도들이 가지고 있다면 담을 넘는 위선이며 형식주의자입니다. 쉽고 빠른 길을 가고자 한다면 당장은 편할 수 있지만 결국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사는 길이 있다면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조금 불편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좁은 길로 가야 소망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가는 길이 아니라 주님이 걸어가신 길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누군가 이 길을 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를 선배들이 아름답게 시작하였다가 결말이 부끄럽게 끝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이상하게도 마지막은 추악한 맘몬주의자가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나 불편합니다. 그럴듯한 합리화를 통하여 맘몬주의를 따라가는 것을 봅니다.
신앙의 길에는 지름길이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길은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가는 여정입니다. 이 길에는 사치와 향락 그리고 온갖 야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길에 동화되지 않고 이겨내는 것이 참된 신앙의 길입니다. 담을 넘어 쉽게 가는 것은 강도와 절도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고 두렵고 떨림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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