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고린도전서 15:16~22)

새벽지기1 2017. 8. 7. 07:37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신 것일까요?
그런데 왜 사복음서마다 그날을 서로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자, 우리 함께 그때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확인된 후,
당시 세력가이면서도 예수님을 따랐던 아리마대 요셉의 요청에 따라
예수님의 시신을 그의 동굴 무덤에 안치하였습니다.
그리고 큰 돌로 그 입구를 봉쇄하였고 군인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마 27:62-64)

그래서 빌라도는 군사를 보내 무덤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기간이 끝이 나고 새벽이 되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의 내용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두 여자가 예수님의 동굴 무덤에 갔습니다.
그때 큰 지진이 일어났고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돌 위에 앉았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군사들과 여자들은 너무나 무서워 벌벌 떨었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5-6)
그래서 동굴 속을 보았더니 정말 예수님이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되돌아서서 달리는데,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 28:10)
여자들은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알렸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의 내용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 세 여자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들고 동굴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가는 중에 누가 그 무거운 돌을 치워줄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습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앉아 있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막 16:6)
여자들은 놀라서 무덤에서 도망쳐 나왔고,
너무나 무서워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의 내용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향료를 바르려고 무덤을 찾아갔는데, 이미 돌은 치워져 있었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찌된 일일까 걱정하고 있는 순간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돌아가서 열한 사도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베드로가 가서 확인해 본 결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의 내용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혼자 무덤에 갔는데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놀라서 베드로와 다른 한 제자에게 알려 함께 다시 무덤에 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몸을 쌌던 세마포만 놓여 있었습니다.
두 남자는 돌아가고 막달라 마리아만 남아 울고 있었습니다.

무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일까?
마리아가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있고,
그 천사가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다.”라고
무덤을 향해 대답하는데, 인기척을 느껴 되돌아보니 한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 물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막달라 마리아는 그가 무덤을 지키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그 남자가 “마리아야.” 하고 부르는데,
그제야 마리아는 예수님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한 걸음에 달려가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그 날 저녁 제자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의 한 장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날 일어났던 복음서의 기록들을 읽어보면 혼란스럽습니다.

몇 사람의 여자가 간 거야?
막달라 마리아가 간 것은 확실한 데 다른 여자들은 왜 차이가 나지?
돌이 어떻게 치워진 거야?
지진이 난 거야, 아니면 누군가 치운 거야?
베드로가 확인한 거야, 안 한 거야?
무덤에 나타난 천사가 두 사람이야, 한 사람이야?
또 천사들만 나타난 거야, 아니면 예수님도 나타나신 거야?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 나타나신 것이 예루살렘이야 엠마오 가는 길이야,
아니면 갈릴리야?

예루살렘과 갈릴리는 70킬로나 떨어져 있는데, 여자들의 말을 듣고
제자들은 부활하셨다는 예수님을 만나러 그 먼 길을 한숨에 달려갔다는 거야?
아무리 빨라도 3일은 걸렸을 텐데.

세상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을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치부하고 경멸까지 합니다.
교인들 중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믿는다는 사람들도 그 믿음의 정도에 따라 여러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도 그렇다고 하니까 그러려니 하는 사람,
예수님이 부활하셔야 우리들도 부활하니까 당연히 믿어야지 하는 사람,
부활은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에 영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죽어서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산다는 것이 곧 부활을 의미한다는 사람,
심지어 예수님은 잘 믿으면 죽었어도 나사로처럼 이 땅에서 다시 살아난다고
믿어서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 잘 모셔놓는 사람 등등 실로 다양합니다.

여러분들은 부활에 대해서 어떤 견해와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2,000년 동안 예수님의 부활을 여러 근거와 논리로 반박해왔고,
오늘도 미래에도 기독교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대체로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죽음을 너무나 안타까워 한 나머지 환상을 본
것이며 그 증거가 바로 서로 다른 복음서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종교지도자들이 염려한대로 예수의 시체를 훔쳐가 놓고는
부활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가장 먼저 불일치하는 내용들부터 정리하였을 것이고 증인들을
여자로 내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는 여자들의 증언은 법적 효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여자들이 한 이야기들과 또 들었던 내용들을 서로 다른
그대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황당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애타게 세상의 구원자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시면 로마나 다른 대적자들을 무찌르고
자신들은 그 메시야와 함께 세상을 통치하리라 굳게 믿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종교지도자들도 이 믿음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수시로 메시야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오늘날에는 이상한 사람들만이 그런 사람들을 추종하지만 당시에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혹시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인가 하고
사람들이 몰려갔고, 유대교 당국도 그때마다 사람들을 보내 그가
정말 메시야인가를 확인하도록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내린 결론은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메시야’는 다윗과 같아야 한다는 명백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한방에 물리치듯, 로마를 일격에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 기준에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을뿐더러 어부나 창녀, 가난한 사람들과
같은 하층민들하고나 어울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당국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처단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동안 로마 당국도 메시야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체포하여 처형했고
예수님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소동이 수그러들었습니다.

또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두개파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왕조차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마 14:2)라고 말했고,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가시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제자들이,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눅 9:19)고 대답했습니다.

즉, 부활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생소한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면 반드시 부활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메시야의 부활 사상이 보편화된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운명하시자 제자들은
“괜찮아, 곧 예수님은 부활하실 거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렇게 힘 한번 못 쓰고 맥없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었구나.’라고 예외 없이 생각했습니다.

왜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전에도 메시야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처형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 끝난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며 실망하며 숨어버렸습니다.

안식일 후 첫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자들도 '혹시 예수님이
부활하셨나?’ 해서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고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다만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따랐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여자들은 놀랐고,
그 사실을 전해들은 사람들도 너무나 놀라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놀란 것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사실 여부에 매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부활했느냐 아니냐의 논쟁에 빠져 있는 한,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깊은 뜻은 알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저희(악인)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지옥에, 부활을 믿는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믿음 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영원히 산다는 뜻입니다.
즉, 영원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과 사람들은 갑자기 변했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목격한 내용들을 정리하고 말고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거리로 달려나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원자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벌벌 떨었던 로마도 종교당국도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가난도 소외도 병도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억울함도 원통함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너그러워졌습니다. 깊어졌습니다.
시기, 질투, 초초함, 시시함, 불의, 간사함, 권모와 술수 모두 사라졌습니다.
죽음 앞에서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이들이 변화의 원천은,
‘죽은 자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예수님이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그렇게 저주를 받고 처형당한 사람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기 껄끄러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과학적 사고의 헬라인들에게 현대인들처럼 이성에 맞지 않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란 무엇일까?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가르침과 행동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그 나라를 어떻게 살며 누리는 곳인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성경을 통해, 특히 산상수훈을 통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어떤 상태, 어떤 상황에서 태어났든지 이미 네 안에는 하나님의 복으로 가득하단다.
너는 밟히고 치이는 시시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자녀요,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밝은 빛이고 소중한 소금이란다.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지 말거라.
어떤 수모를 당해도 억울해 하지 말고 복수하려고 하지 말거라.
그런 것은 다 사탄에게 놀아나는 것이란다.
너의 복을 극대화하여 너보다 못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리며 베풀며 살아라.
아무 걱정도 말고 내가 가르쳐준 대로 살아라.
그러면 너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풍성히 경험하게 된단다.”

구원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반대와 고난과 역경 앞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신나게 당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삶은 무슨 직업에 종사하든 반드시 성공하며,
훗날 육체를 벗은 후 그 삶은 영광스러운 완성을 보게 됩니다.
그 복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며 베풀며 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