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스마트 폰에 내장된 위치추적 장치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스마트 폰을 가진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움직임이 낱낱이 기록되고 저장됩니다.
이를 만든 스티브 잡스는 이에 대해 명쾌한 해명을 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갔습니다.
무슨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일까요?
저는 스티브 잡스를 좋아했습니다.
그의 남다른 깊이와 상상력과 예술성을 좋아했습니다.
선불교에 심취한 그를 설교나 책에서 왜 거론하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리스도인 중에는 왜 그만한 깊이와 자유로움과 꿈을 가진 사람들이 없을까 안타까워하며,
제발 그에게 자극을 받아 그를 능가하는 크리스천 리더들이 많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는 왜 그랬을까요?
그런 장치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의도였다면 왜 쌈빡한 설명을 하지 못한 것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실망감도 듭니다.
스티브 잡스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와 단 한 번이라도 식사를 할 수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겠다.”
소크라테스는 ‘질문법’으로 당시 세상, 특히 청년들을 깨웠던 사람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그의 질문들은 당시 소피스트들의 말장난 차원이나 논리를 위한 논리가 아니라,
핵심적이며 본질적인 것이어서
사람들의 기존의 생각들을 깨뜨리고 더 깊이, 더 넓게 나가게 하였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누구보다 앞선 생각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깨뜨려주고 앞으로 나가게 하는 멘토입니다.
그런 멘토를 현재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는 소크라테스와의 한 끼 식사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을
용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소크라테스일까?
왜 예수님이 아닐까?
우리 교회 홈피에 올라온 어떤 분의 질문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꼭 받아야 되나요?
어떤 분이 방언을 아직 받지도 않았냐면서 무시하시더라구요. ㅠㅠ
정말 슬프고 괴롭네요.
받고는 싶어도, 어떻게 해야할지. 휴.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을 읽자마자, 제 숨이 ‘턱’ 막혀버렸습니다.
답답함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고통을 참으시며 세우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이런 질문이나 하게 하므로 스티브 잡스는 예수님에게서는 아무런 해답도 찾지 못하고,
선불교에 심취하고 소크라테스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힌두교의 성자 밑에서 십수 년을 수도하던 제자가, 어느 날 스승님께 달려왔습니다.
희색이 만면했습니다.
“스승님 기뻐해 주십시오. 드디어 물 위를 걸어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애 많이 썼구나. 그런데 이 강을 건너는 뱃삯이 얼마더냐?”
“20 루피입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너는 십 년 동안 그 고생을 하면서 20 루피를 번 것이니라.”
방언이 뭔지, 그 본질이나 가치를 전혀 모른 채 방언을 못 받았다고 한숨 쉬며,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절망하는 그분께 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요?
힌두교가 물 위를 걷게 하는 종교가 아니듯이, 기독교는 방언이나 예언이나 환상이나
병 고치는 은사를 가르치고 받게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바다를 탐험하던 사람들이 망망대해에서 연이어 있는 섬들을 발견하였습니다.
한 섬을 상륙해 보니 섬사람들의 생활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분쟁과 기아와 불신이 섬 전체를 뒤덮었고 사람들은 서로 경계하며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섬들도 대동소이했습니다.
실망하며 마지막 남은 섬에 상륙했습니다.
뜻밖에도 그 섬은 별천지였습니다.
풍요롭고 건강하고 사랑과 생기가 넘쳤습니다.
상륙한 그들을,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촌장과 마을 사람들이 친절히 맞이하였습니다.
선장은 촌장에게 왜 이 섬은 이토록 풍요와 평화가 넘치는가 물었습니다.
촌장이 대답합니다.
“모두 벤저민 어른 덕분입니다.
그분이 농사에서부터 건강관리 육아법까지 다 가르쳐주셨습니다.”
선장이 말했습니다.
“그분을 뵙고 싶습니다. 안내해주시겠습니까?”
촌장은,
건강하고 똘똘한 아이들이 가득한 학교로, 한 눈에 봐도 시설이 훌륭한 병원으로,
친절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관공서로, 선장과 선원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어디를 가나 누구든지 사랑받고 사랑하는 곳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선장은 이제나저제나
벤저민 어른을 만날까 하였지만 그 어디에도 벤저민이란 분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선장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벤저민 어른은 언제나 뵐 수 있을까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마을 사람과 열심히 토론하더니 마침내 결론을 내린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데려간 곳은 마을 언덕에 위치한 교회였습니다.
“아, 저기에 그 양반이 사시는구나.” 생각하며 올랐습니다.
교회로 들어가서는 십자가와 성경책을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벤저민 어르신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 어른이 여기에 사십니까? 얼른 만나게 해주십시오.”
선장이 재촉하자 그것은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여러 해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선장이 폭발했습니다.
“어르신을 보여 달라고 누누이 부탁했잖소!
그런데 그 양반이 돌아가셨다는 말은 하지 않고 여기저기 끌고만 다니고!”
그러자 촌장이 말했습니다.
“어르신은 마을 어디에나 하나님과 함께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본다고(요1 4:12)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인들이 살고 있는 섬이 있다면 가장 이상하고 우스꽝스럽고 불합리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닮겠다고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쓴 붉은 십자가를 들고 고성방가하고,
서로 자기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경쟁하고,
저마다 더 큰 건물을 짓느라 열을 올리고,
시도 때도 없이 부르짖는 소리로 넘쳐나고...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하고 닮아가는 것이 그런 것일까요?
가는 발걸음을 멈추고 깊이 생각해봐야만 합니다.
우리가 섬이라면, 가장 아름답고 풍요롭고 합리적이고 매력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누구나 가까이 가고 싶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21세기 최고의 인간 중 하나인 스티브 잡스의 멘토,
소크라테스가 보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은 꿰뚫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최고의 가치 중 하나는,
인간이 그동안 생각하지도 못했던 최고의 것들을 보여주신다는 점입니다.
그 최고의 것들이 구절구절마다 적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6:43-44)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도 그 어떤 인간도 전혀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청년들을 오도한다는 죄목으로 독배형에 처해집니다.
그는 "악법도 법이다"는 말을 남기고 독배를 듭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생각해 낸 가장 훌륭한 정치 형태가 법치 민주주의 국가이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훌륭합니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할 생각이나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스티브 잡스가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았고 그분을 멘토로 모셨다면, 또 위치추적 장치가
그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 달리 만들어 적용하였을 것이며 또한 달리 해명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해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질을 깨닫고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나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고 머물면 그것 자체가 지옥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떠나기를 원하십니다.
귀를 열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보입니다.
이 자체가 은혜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더 이상 고아가 아닙니다.
또한 가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지옥을 벗어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평강을 이 땅에서 이미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더욱 깊이, 하나님의 은혜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그분의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환히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4)
이 말씀은,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전도, 봉사, 헌금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복을 주신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교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곧 전도, 봉사, 헌금,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기독교가 막강 종교가 되는 동시에 교인들도 모두 행복하게 되었을 것이고 기독교에 대한
신뢰와 칭송이 드높았을 것입니다.
왜요?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날이 갈수록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탄식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과거에 종교를 가졌던 사람이 800여만 명인데,
그 중 기독교가 58%, 불교 28%, 천주교가 20%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한마디로 교인들에게도 ‘버림받은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을까요?
당연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따뜻하고 친절하고 넓고 깊은 분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이 넘치는 분입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종교’가 만들어낸 기형아들입니다.
신통하다는 무당일수록 이상하고 기괴합니다.
종교가 만들어낸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즈음 많은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점점 이상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
시편 37편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을 베풀며 사는 것이 종교생활보다 앞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과 우리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십니다.
그 창조의 법칙은 사랑입니다.
악한 것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악한 것은 바늘 끝만큼도 발을 못 붙이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에서도 그 증거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살핍니다.
만약 나쁜 의도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알게 되면 우리들은 상대방을 믿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고,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설사 그들이 잘되는 것 같아도 그들의 번성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입니다.(시 37:1-2)
그렇다고 죄 지을까 악을 행할까 노심초사하며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나게 살되 열심히, 사랑을 베풀되 내 안에 나쁜 의도가 있는가 늘 살피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러고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사나?” 하시겠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늘 정직과 성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라는 구절은 번역이 잘못되었습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는 “쉐콘 에레츠 르에 에므나”,
“땅에서 하나님의 안전보장을 즐거워하다”는 뜻입니다.
즉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기뻐하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아나그’,
그 뜻은 “유연하다, 부드럽다, 즐거워하다.”입니다.
하나님 한 분이면 족합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그분과 동행하는 것으로도 행복합니다.
그래서 안달복달하지 않고 유연합니다.
완악해지지 않고 부드럽습니다.
끓탕하지 않고 오늘에 감사하며 성실히 정직하게 삽니다.
그것으로도 족한데, 하나님의 은혜는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상급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합니다.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6)
악착같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돈도 많이 벌고 출세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로지 내 목표를 내 힘으로 이룩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높아진 만큼 그림자도 어둡고 길어집니다.
그 그림자 밑에서 나를 향한 원성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나라에 살며, 예수님처럼 남들을 살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무리 높아져도 그림자가 생기지 않습니다.
정오의 빛같이 바로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내리비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합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중략)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중략)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4-19)
이 기도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온전히 이루어져서,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칭찬할 만한
그리스도인'(빌 4:8)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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