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돼지는 진주의 가치를 모릅니다 (마태복음 7:6 / 사무엘하 24:10~15)

새벽지기1 2017. 8. 19. 05:58


제이미 핫첼은 영국 공영 방송 BBC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잘나가는 PD였습니다.
그가 만든 다큐는 만드는 것마다 성공하였습니다.
돈도 벌고 명예도 있습니다.

그런 그가 매주 복권을 삽니다.
“이번 주에는 제발 대박이 터져라!”
그는 주식에도 투자하고 경매에도 열심히 참가합니다.
언제나 돈벼락을 꿈꿉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는 욕심 많은 속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돈을 벌려고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누군가를 돕고 싶어서입니다.
다큐를 만들면서
세상에는 도와야 할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뼛속으로 절감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꿈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에게 엄청난 유산이 생긴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며 남긴 것입니다.
평소에 지나치게 검소하다 싶었던 아버지가 그렇게 부자인 줄 몰랐습니다.
벼락부자가 된 제이미는 생각했습니다. '이 돈을 어떻게 쓸까?'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건물을 구입해서 임대사업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편안히 놀고먹으며 인생을 즐기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제이미가
아닙니다.

거의 공짜로 사무실을 임대해 주기로 하고 입주할 회사를 모집하였는데, 조건은 단 하나.
자신의 주머니만 채우는 게 아니라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거나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웃을 돕는 착한 기업, 사회 단체가 커나갈 밑거름을 마련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제이미의 ‘착한 부동산’은 시작되었습니다.
몇 달 후에 정책을 바꿔 임대료를 받았지만 다른 건물에 비하면 반값이었습니다.
입주한 회사나 단체들도 기꺼이 동참하였고 행복해했습니다.
비슷한 조직들이 함께 모여 있으므로 시너지 효과가 생겨 활동 영역이 넓어지고
이익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그만큼 도움의 영역도 넓어졌습니다.

13년이 흘렀습니다.
오늘날 제이미의 '착한 부동산'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국에 건물 열다섯 개, 브뤼셀에도 두 개의 지점이 생겼고, 올해 유럽 본토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습니다.
제이미가 말합니다.
"다 함께 나누며 살기 위해서는 꿈과 이상을 자꾸 사업화해야 해요."

요즈음 청년들이 자신의 꿈을 사업화하여 그 이익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사회적 기업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 중에서도 사회적 기업의 CEO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책 “하나님의 모략”에서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을 살고 있는 복된 사람들의 특징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인간의 역사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여 그 분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
둘째, 자신과 관계하는 모든 이들의 유익을 진심으로 도모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줄곧 거룩한 성숙을 이루어가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많은 피조물들을 다스리게’(창 1:28)됩니다.
(‘다스리다’는 히브리어 ‘라다rada’로서 ‘돌보다’는 뜻입니다.)

이런 거룩한 성숙과 건강한 성공을 방해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경건함으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
둘째, 물질적인 부를 통해 자신의 안전을 꾀하려는 욕망.

곧 기복신앙을 말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런 태도는 사람이 봐도 옳지 않은데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나쁘게 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거룩한 것은 과연 무엇이며, 개나 돼지는 누구일까요?

‘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개나 돼지’는 이방인들, 하나님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일까요?
어떤 교파에서는 세례 받지 않은 사람들(개)에게 성찬(거룩한 것)을 베풀어서는 안 되는
근거로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들은,
하나님을 믿는 나는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또 받을 자격이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럴 자격이 없다는 식인데,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질책당한 것은 ‘왜곡된 선민의식’과 ‘기복신앙’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태도는, 나는 그 어떤 자격이 없음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살고 있음을 언제나 감사하며 늘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에 담긴 깊은 의미를 찾아가 봅시다.

‘거룩’이란 말의 뜻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늘 말씀 드렸습니다.
‘거룩’은 히브리어로 ‘카도시’로서 가장 기본적인 뜻은 ‘구별하다’입니다.

그런데 구별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까마귀 무리 중에 한 마리의 백로도 구별되고, 백로 무리 중에 까마귀 한 마리도 구별됩니다.
구별의 방향과 방법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가 됩니다.

카도시의 뜻은
‘밝게 빛나다’ ‘따뜻하다’ ‘새롭게 하다’ ‘헌신하다’ 등 여러 개가 있습니다.
이런 뜻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별의 방향과 방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거룩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아다마)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아담)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창 2:5)

이 말씀에서, 땅은 ‘아다마’이고 사람은 ‘아담’입니다.
땅은 아담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최초의 남자 이름(고유명사)이기도 하지만, ‘사람’이라는 보통명사이기도 합니다.
즉, 내 인생이 아름다운 꽃과 열매로 가득할 것인지,
아니면 엉겅퀴와 가시나무로 뒤덮일 것인지, 나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 2:19)

하나님께서 각 사물들의 이름을 아담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아담이 부르는 그대로 피조물의 이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담이 사자에게 쥐라고 이름을 지어주면
사자의 용맹은 사라지고 쥐의 비겁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바 역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들이 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값진 것을 주셨지만 더럽고 가치 없는 것이 되기도 하고 하찮은 것들을 주셨지만
둘도 없는 값진 것이 되기도 합니다.

돈이나 권력은 저마다 갖기를 소원하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히틀러가 권력을 쟁취하였습니다.
그 권력으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6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였습니다.
권력으로 자신과 패거리들의 이익만 챙기는 일은,
귀한 것을 더럽고 추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주를 짓밟는 개나 돼지’입니다.

건강, 좋은 머리, 아름다운 외모, 좋은 집안 등등.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없다고 한탄하는 데 골몰하지 말고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들이 무엇인가 점검해 보십시오.
아무리 받은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생명과 시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어떤 진주와도 비교 되지 않는 값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것으로 나는 뭘 하고 있는가, 찬찬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불평만 하고 있거나 탕진하고 있거나 자신의 이득만을 챙기고 있다면,
펄쩍 뛸 일이겠지만 내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돼지이며 개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일까요?

각 종교마다 각자의 규율들이 있습니다.
그 규율들을 열심히 행하면 그 신神으로부터 복을 받아,
첫째 신의 반열에 오르고,
둘째 잘 먹고 잘 살고,
셋째 죽어서는 좋은 곳으로 간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열심히 행합니다.
그 결과, 잘한 사람과 잘못한 사람들 간에 수많은 계급이 생기고, 잘한 사람들은
잘못한 사람들 위에 군림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점입니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아니다. 너희들은 태초부터 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리고는 가장 비천한 계급으로 살던 노예들을 구원하고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잘 지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규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길’입니다.
자유와 사랑과 공의와 풍성함을 누리며 베푸는 최고의 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2,134개의 규율로 만들어 지키게 했습니다.
유래를 찾을 수 없는 2,134개의 감옥과 계급이 생겼습니다.
더불어 억압과 감시와 정죄와 차별과 부조리 등 온갖 나쁜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으셨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과 자유와 공의와 풍성함을 회복해 주시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최고의 진주이신 예수님의 가치를 모르고 그 진주를 발로 밟고
산산이 부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순다고 부서질 진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한 초대교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히 구가하였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창녀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최고 권력자, 재정장관의 아내 요안나가
함께 일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한 단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인종, 신분, 계급, 재산 유무를 따지지 않고 함께 나누었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눈을 떴다는 것이고, 억압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독교가 천여 년이 지나는 동안에 다시 계급화되었습니다.
교황은 세속의 왕들 위에 군림하였고, 죄를 사하는 하나님의 권한까지 행사하며
면죄부를 팔아 치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원래의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로부터 600여 년이 지난 오늘, 기독교는 다시 종교화하고 계급화되었습니다.
목사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반열에 올려놓고 왕처럼 군림합니다.
교인들을 종교생활에 몰입시킵니다.
교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며 지시에 맹종합니다.
가뜩이나 무거운 삶의 짐이 더욱 무거워집니다.

현재 기독교의 잘못된 신앙 행태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실태를 올바로 깨닫고 다시 주님께서 열어놓으신 자유와 생명과 사랑의 길을 가자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진주의 가치를 모르고 짓밟는 개와 돼지가 되지 말고 그 가치를
누리고 베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진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로 창조(창 1:27)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령(르아흐, 성령)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곧 사람은 흙으로 지은 육적 생명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적 생명의 결합체로서 ‘생령’,
곧 살아있는 영입니다.

왜 우리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셨는가?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통달케 하는 영’(고전 2:10),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라.
그 사랑을 받아라.
그 뜻에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태초부터 ‘이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께 치성을 드린다고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충분하게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생육’은 히브리어 ‘파라’로 ‘열매를 맺다.’는 뜻입니다.
‘번성하라.’ 이미 주신 복을 개발하여 많은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충만하라.’ 온 땅에 생명의 열매를 퍼뜨리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다스리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라다’는 ‘돌보다.’‘살게 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왕국이 최고의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자, 다윗은 백성과 군대의 수를 계수하라 명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하신 일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삼 일 동안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퍼져 칠만 명이나 죽게 됩니다.
강한 의문이 듭니다.
왕이 백성과 군대의 수를 세는 것이 왜 죄일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다윗을 세우신 목적은 ‘부국강병’과 ‘만사형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권력과 부와 명예는 다른 사람들과 피조물들을 효율적으로 잘 돌보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얼마나 모았는지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는지 세어본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에게 좋은 것을 많이 주셨습니다.
나를 잘 개발하여 많은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혹시 그 열매를 창고에 쌓아두고 세고 있지나 않으십니까?
그러지 말기로 합시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곳에서 잘 훈련을 받아 하나님의 작품(포이에마)들이 되고, 산적한 주님의 일을 힘써 행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어 나 살고 남 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친 헌금으로 많은 인재들을 양육하고 장애우 가정과 미혼모 가정 100개쯤 세우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리할 때 돈은 거룩하고 복된 것으로 바뀝니다.

가장 저주스러운 십자가마저 가장 거룩한 것으로 바꾸신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