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내게 있는 빛은 얼마나 밝은가? (마태복음 6:19~24)

새벽지기1 2017. 8. 4. 08:37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60대 부부 앞에 천사가 나타나 소원을 한 가지씩 들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아이고 좋아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아보셨구나.”
할머니가 먼저 말했습니다. “세계일주요.”
천사가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 차례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무슨 소원을 말할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갑자기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속사포처럼 말했습니다.
“나보다 삼십 세 젊은 여자와 함께 하는 세계일주!”
할머니는 미처 듣지 못했는데 천사는 들었습니다.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과 함께 천사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구십 세 할아버지와 세상 어디든지 갈 수 있는 패키지 상품권 두 장이었습니다.
구해도 욕심을 따라 구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을 할아버지가 잊은 것입니다.

누구나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원들이 있습니다.
고3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일 게고,
대학 졸업생들은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일 게고,
몸이 아픈 사람들은 병이 낫는 것입니다.
돈 걱정 안 하고 살아 봤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고,
화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소원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소원들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 소원들이 다 이루어진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소원이 이루어지고 나면 곧 다른 소원을 바랄 것입니다.
이렇듯 크고 작은 소원들을 좇다가 대부분의 인생이 끝이 납니다.

교인들이 원하는 바는,
세상에서는 남부럽지 않게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서는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많이 벌려고 하고,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 자체에 깊고 깊은 수렁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들의 '생각 없는 막연한 믿음'들을 무너뜨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내 보물을 쌓는 일은,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전도, 봉사, 헌금, 예배, 성수주일 등등을 열심히 하면 죽어서는
천국에 가며, 여기에 세상일의 형통이 보너스로 주어진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들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 23:23)

소득의 십일조를 열심히 내면서 종교생활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아보겠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관심이 없는 것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와 인과 신을 십일조 헌금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두 가지 모두 열심히 행해야 한다고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보면,
우리들이 배웠던 것이나 잘 한다고 생각한 것 모두가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은 지금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들을 단순한 교훈으로,
또 죽어서 천국에 가는 길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산상수훈의 결론을 예수님은 이렇게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는 어떤 난관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서는 풍성한 삶을 누리다가 그 삶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까지 이어져
완성되는 가장 중요한 유일한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 이런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와 아름다운 지구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지난 시간 박 경 교수님을 통해 지구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지구의 축이 기울어져 있어서 사계절이 생기고 바람과 해류를 통해 순환하며,
균일하지 않으므로 산과 강과 골짜기와 열대우림과 사막 등 다양한 자연환경이
생겼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태풍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모두 지구를 보다 안전하고 쾌적하고 다양한 장소로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창조 법칙에 의한 것입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부모라는 것을 모릅니다.
자연재해나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런 재난 등을 피하고 무병장수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신을 만들어 섬깁니다.
치성을 드려 잘 보여 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그런 식으로 섬깁니다.
그것이 최대 잘못입니다.

요즈음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두 가지 크나큰 오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닌 옆집에 사는 부자 아저씨로 섬기게 합니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옆집 아저씨에게 뭔가를 얻으려면 잘 보여야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드리고 일이 생기면 쏜살같이 달려가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그 아저씨를 선전하며 다른 사람들을 끌어 모아 그 집일을 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이제나저제나 아저씨 지갑이 열리기를, 재산 한 뭉텅이 떼어주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저 푼돈이나 던져줍니다.
그것도 감지덕지, 그 아저씨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냅니다.
이것이 소위 간증입니다.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이 부모인 줄은 압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나 살아가면서 복이나 내려주기를 기다리게 만듭니다.

시골 부모님의 땅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습니다.
그러자 도시에 살던 자녀들이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갖은 핑계를 대고 일 년에 한두 번으로 끝냈던 방문이 주말마다 이어집니다.
요리조리 부모님의 눈치를 살피고, 다른 형제들과 피나는 암투를 벌입니다.

그 모양을 보면서 부모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제대로 된 부모라면 아무것도 주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보다 제대로 된 숨겨놓은 중심까지도 꿰뚫고 보시는 참 부모님입니다.
이런 신앙행태는 하나님의 당당한 자녀들을 요리조리 눈치나 보는 거지로 만듭니다.
애는 애대로 쓰면서 그 마음은 비참해지고 황폐해지고 그 삶은 초라해 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

내 관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까, 아니면 유산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마 6:22)

내 눈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무병장수, 부귀영화입니까?

아홉 살 소년 마르코는
남미로 돈 벌러 떠난 엄마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를 떠납니다.
온갖 어려움을 오로지 엄마를 만난다는 생각으로 이겨냅니다.
마침내 엄마를 만납니다.
이것이 '엄마 찾아 삼만 리'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다만 다른 점은 마르코의 엄마는 가난하고 병들었으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점입니다.

아브라함, 백 세 때 얻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습니다.
모리아 산으로 가는 삼 일 밤낮, 뭘 생각했겠습니까?
단 하나, 하나님이냐 이삭이냐 양자택일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침내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을 택하기로.
이삭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려는 아브라함을 급히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아브라함의 그 길고 험한 여정은
바로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 하나를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얻은 것이 '여호와 이레',
‘여호와의 산에서 모든 것이 준비되리라’는 복입니다.
이삭보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비로소 이삭과 함께 모든 것이 준비된
하나님의 성산에 오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기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하나님의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중요한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릅니까?
바로 이삭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외의 마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아무리 전도, 봉사, 헌금, 새벽기도, 성수주일 등 종교생활을 열심히
해도 ‘참 신앙’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지옥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저 그렇게만 산다면,
유한하고 어리석고 연약한 인간이므로 그 사랑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이 식어 그저 입술에만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경고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6-17)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어디로?

예수님께서
하늘에 보화를 쌓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십니다.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
다른 말로 하면, 내게서 얼마나 많은 빛이 나오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제너럴 일렉트릭의 전설적 CEO, 잭 웰치는 회사 임원을 선발할 때 반드시
점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부하 직원들이 얼마나 발전했는가입니다.
즉 그는 부하 직원들을 살리는 사람인가 그저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인가를  체크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똑똑해도 남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서는 아무런
빛도 나오지 않습니다.

빛이 있어야 생명이 살아납니다.
빛은 곧 생명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첫 부분에 예수님을 빛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예수님이 빛이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남을 살리는 데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빛은 학벌, 권력, 능력, 미모, 재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존재인가에 따라 내 빛의 밝기가 결정됩니다.

진정으로 유익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살리고 도와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복 받기 위해서 칭찬받기 위해서 그 일을 하거나 또한 생색을 낸다면,
그 순간 내 빛은 꺼져버립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늘에 보화를 쌓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지 않으신다는 것이며,
녹슬어 버린다는 것이며, 구멍이 뚫려 다 빠져 나가버린다는 뜻입니다.

랍비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새벽이 오는 것을 아느냐?”
한 제자가 대답합니다.
“고양이와 양을 구별할 수 있을 때 새벽이 온 것을 압니다.”
다른 제자가 대답합니다.
“무화과나무 잎과 포도나무 잎을 구별할 수 있을 때입니다.”
랍비가 말합니다.
“모두 다 틀렸다. 이웃이 네 눈에 보일 때가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오는 때니라.”

다른 사람들의 곤고함이 눈에 들어올 때,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려고 다가갈 때 비로소 내 안에서
빛이 발하기 시작합니다.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도와주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무엇을 하든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반드시 성공합니다.
거기에 존경이 더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좋은 세상’ 조화로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목적이 서로 도우며 살리며 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내 비록 보잘것없지만,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과 함께 남을 살리러 떠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를 호위하며, 내 빛은 점점 더 밝아집니다.
죽어가는 모든 것들이 나로 인하여 살아납니다.
그리고 백 배의 결실을 맺어 누리고도 베풀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들이 여기에 모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