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탐험에 나선 사람들이 원주민을 포터로 고용하고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이틀 동안 빠른 발걸음으로 열심히 갔습니다.
미처 따라가지 못할 속도였습니다.
그런데 삼 일째 되는 날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원주민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돈을 더 준다고 해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원주민들이 대답했습니다.
“뒤처진 우리 영혼이 따라오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어디로 가는 줄 모르고 무작정 달려가는 현대인들입니다.
영혼을 어디에 두고 왔는지 잊은 지 오랩니다.
심령은 피폐해지고, 남은 것은 피곤에 찌든 몸뿐입니다.
요즈음 서점가에서 큰 인기를 끄는 책이 있습니다.
이름 하여 ‘생각 버리기 연습’입니다.
토쿄 대학을 나온 일본의 30대 젊은 스님인 '코이케 류노스케'가 쓴 책입니다.
그 스님은 “사람은 생각하기 때문에 멍청해 진다.
우리를 지배하는 생각을 멈추고 오감을 사용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수많은 잡생각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 생각들은,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가뜩이나 바쁜 삶을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삶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런 것들을 코이케 스님은
‘생각병’이라 명명하고 여기서 자유로워지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 위에 반짝! 의문표가 생깁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에 멍청해진다고?”
워싱턴에서 택시를 운전하고 있는 75세의 흑인 할아버지 카터는
자신을 단순한 택시 운전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택시 운전사'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손님들을 극진하게 모셨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온 손님을 태우게 되었고,
같은 아프리카계 사람이라 많은 대화가 친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1998년 초청을 받아 말라위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카터는 그곳에서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가난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마음이 너무 아파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이 마을에 기쁨을 주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저를 도우소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카터 할아버지는 택시 운전사답게 마을에 도로가 없는 것을 가장 먼저 보았습니다.
좁은 진흙길뿐이었습니다.
마침 가지고 온 돈이 조금 있어서 마을 사람들을 고용하여 도로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대단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1인당 임금은 1달러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카터의 관대한 마음에서 떠오른 ‘생각’,
곧 하나님 나라 정신이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로 3일 후에 약 2킬로미터의 도로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카터는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1년 후 카터는 이곳이 자꾸 '생각'나 다시 방문했습니다.
한 청년이 절도범으로 잘못 기소되어 감옥에 갇힌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터 할아버지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와 정의를 구했기 때문에
그 사건에 적극 개입해서 그 청년을 석방시켰습니다.
위급한 소년을 만나서는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그 마을을 도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 마을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다음 해에도 또 그 마을에 갔습니다.
이번에는 몇몇 청년들에게 농사개량법을 가르쳐주고 그들에게 씨앗을 사주었습니다.
그 마을 어린이들에게 축구공 26개를 사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즐거움과 놀이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후에는 그 아이들에게 유니폼도 마련해 주었는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부심도 중요하다고 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하는 하나님 나라 택시 운전사 카터에게
하나님께서는 많은 후원자들을 붙여주셨습니다.
그 마을에 갈 때마다
그 마을에 여유가 조금 있는 사람들도 달라져 기부금을 내놓았고,
주변 어려운 사람들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학교도 세워졌습니다.
17명이던 학생 수가 곧 85명으로 불어났습니다.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졌고, 비례해서 카터도 더 바빠졌고 더 즐거워졌습니다.
카터 할아버지의 취미는 그 마을을 잘 돕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카터 할아버지를 보면, 생각을 많이 하면 멍청해지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생각도 생각 나름입니다.
코이케 스님이 버리라는 생각은 “쓸데없는 내 생각들”이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각의 능력을 주신 것은 카터처럼 '하나님의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절에서는 내 안의 망상과 욕망과 싸우라하고,
교회에서는 사탄, 마귀와 싸우라고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싸움을 멈추라고 조언합니다.
내 안의 망상이나 욕망을 끊어내는 일이나 사탄 마귀와 싸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죽 했으면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했겠습니까?
내 능력은 거의 전무하고,
또한 인간은 어리석어서 싸우다 보면 그 대상에 집착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이름은 '새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과 겨루는 자’입니다.
이 불경스럽기까지 한 이름에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어린 손자가 놀이터에서 한 대 맞고 와서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 꼬마에게 할아버지가 “내 그 녀석들 나중에 혼내 주마.”하시며 씨름이나
한판 하자고 하십니다.
싫다는 놈을 얼러서 한바탕 뒹굽니다.
어느새 꼬마는 놀이터의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깔깔 웃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기독교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바로 ‘포이에마’를 말합니다.
헬라어 ‘포이에마’에서 poem, 즉 시(詩)라는 말이 유래하였습니다.
시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인은 끊임없이 시어를 생각하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시를
창조해 냅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 아름다운 시를 창조해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내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들입니다.
문제는 생각의 방향입니다.
분노와 이기심으로 치닫는 내 생각을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어떻게 잘 할 수 있을까 그 생각으로 나를 몰아가는 일입니다.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이란 무엇일까?
너무나 명백합니다.
살리려는 생각입니다.
가장 먼저 나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리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남을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원수마저도 살리려는 생각입니다.
그 구체적인 실현이 바로 ‘구제’입니다.
구제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일도 구제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구제가 있습니다.
흔히 하는 말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내가 당신을 구제해 준 거야.”
맞는 말입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세상 모든 일이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구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제, 남을 돕는 일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보상이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정말 너무나 심플하고 명백하여 보탤 말도 없습니다.
쌀장사가 좋은 단골에게는 쌀을 됫박에 담아 누릅니다.
더 많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됫박을 흔듭니다. 틈새를 메우기 위해서입니다.
그 위에 더 얹습니다. 덤을 더 얹습니다.
그리고는 안겨줍니다.
손이 모자라 더 가져갈 수도 없게 줍니다.
하나님께서 구제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좋다”고 하셨고,
우리들을 만드시고 “심히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좋은’ 세상입니다.
‘좋다’는 것은 조화롭다는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나쁘다’는 말은 ‘나뿐이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남이 없는 것을 내가 채워주며 조화롭게 살라는 것이 하나님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렇게 사는 세상이 좋은 세상입니다.
베풀며 사는 것이 창조법칙에 따르는 삶이며,
더욱 잘 살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구제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나가자는 것입니다.
구제하는 마음으로,
냉랭한 부부는 서로를,
화목한 가정은 이웃들을,
직장인들은 동료들을 대하며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할 때 정말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으니라.”(마 6:2)
‘그러므로’,
즉 ‘하나님께서 서로 도우며 살라고 만드신 세상이므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칭송이나 사람들의 영광을 받으려고 하면,
생색을 내면 제대로 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뭣 좀 했다하면 목사는 그 사람을 띄웁니다.
교인들이 경쟁에 돌입합니다.
체면 때문이라도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한국 교회가 힘을 잃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금하신 사람들의 영광을 구하고 또 나발을 불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을 하고는 칭찬받기를 원하고 생색을 내십니까?
바로 그 점이 내 삶에 언제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어 꽃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 5:41)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이런 말씀을 예수님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이리저리 눈도장 찍기 바쁜 땅에서는 구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저도 여러분들로부터 영광을 구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에게 눈도장 찍으려는 일을 그만 두십시오.
다 쓸데없는 몸부림이며,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무산시키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3-4)
어떻게 내 오른손이 한 일을 내 왼손이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도울 생각을 하게 하신 분도,
도울 힘을 주신 분도,
남을 돕고도 나를 넉넉하게 하신 분도 모두 모두 하나님임을 아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할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마음,
하나님을 향한 무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나는 더욱 낮아집니다.
나를 높일수록 내 그릇은 작아집니다.
최고로 높이면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낮아질수록 내 그릇은 더 커집니다.
그 큰 그릇 안에 더 큰 복을 담아주십니다.
글로벌 기업으로 떠오르는 ‘탐스 슈즈’라는 기업이 있습니다.
창업자는 블레이크 마이코스키입니다.
그는 탐스 슈즈 이전에 모두 다섯 번에 걸쳐 회사를 차렸지만 모두 실패한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2006년 자포자기한 상태로 남미를 여행하던 중 한 자원봉사 팀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신발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그 어린이들은 맨발로 지내다가 흙속의 기생충에 감염되어 발이 기형이 되는
상피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블레이크는 생각했습니다.
“그 어린이들에게 신발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방법은 없을까?”
내내 그 일을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온 것이 one for one, 일 대 일 기부 방식입니다.
고객들이 신발을 한 켤레 살 때마다 한 켤레를 가난한 아이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결과는 대성공!
그렇게 시작한 탐스 슈즈는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불과 5년이 지나 글로벌 기업이 되었습니다.
탐스 슈즈는 광고를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기부 과정과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했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사업은 자신만을 위해 지속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내 안의 숭고함과 다른 이들의 숭고함이 함께 할 때,
그것은 기업을 뛰어 넘어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이 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살아내기를 원하시는 좋은 세상입니다.
블레이크 마이코스키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을 사업으로 실현시킨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특히 청년 여러분.
제발 먹고 사는 일에 골몰하지 마시고,
내 안의 숭고함을 개발하는 일에 매진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고,
상대방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일에 헌신하십시오.
죽은 것마저 살려내는 하나님의 리더들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고대로, 우리 모두 모든 일을,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골 3:17-24)하며 살기로 합시다.
하나님께서 100배의 결실로 보상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외상을 지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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