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6:16~18)

새벽지기1 2017. 8. 2. 13:33


친하지는 않지만 잘 아는 목사가 한 사람 있는데,
목회를 하던 중 교회가 큰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어려움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주로 목사의 잘못된 리더십과 석연찮은 개인사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일은 점점 꼬여만 가고 고민은 커졌습니다.
그러던 중, 그 목사는 금식기도에 들어갔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한 주가 지났습니다.
두 주가 지났습니다.
떠들던 교인들이 입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일각에서 목사님과 교회를 위한 기도가 시작되었고,
목사님의 금식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였고,
교회가 조용해졌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

정말 이사야서 말씀대로,
금식으로 교회의 흉악한 결박과 목사 개인의 멍에의 줄이 풀렸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그 목사는 교회에 좀 어려운 일만 생기면 금식기도에 들어갔습니다.
사나흘, 일주일 등 그 기간은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목사의 금식기도 횟수가 많아질수록 점점 교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교인들은 하나 둘 교회를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저버리신 것일까요?
금식 기도의 약발(?)이 떨어진 것일까요?
뭐가 문제일까요?

이번에는 사업하는 제 중고등학교 동창 친구 이야기입니다.
새로 사무실을 열었다고 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눈길을 확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벽 한가운데 실타래로 묶은 북어였습니다.
여기저기 부적들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친한 친구고 또 제 말도 잘 듣는지라 치우라고 말했습니다.
저런 것들은 아무 효력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사업에 방해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북어와 부적을 떼어냈습니다.

이 두 사람의 행동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뭘까요?

그것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적 존재(하나님이든 귀신이든)를
움직여 보겠다는 의도입니다.

종교의 기원은 무력한 인간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원시인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나무막대 하나 들고 있는 자신들은 굶주림과 추위,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에 너무나 무력하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인간은 동물들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이라는 개념이 생겼고 그 신을 달래거나 그 신에게 기원을 하여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한 것이 종교입니다.

모든 종교에는 신을 모시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다양한 방법들은 대개 세 범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제나 헌금과 같이 베푸는 것
(대표적인 것이 불교에서의 적선積善이나 복전福田과 같은 것입니다.),
둘째는 신에게 올리는 기도문이나 악귀를 몰아내는 주문과 같은 발원,
셋째는 금식 등과 같은 고행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계율이나 율법으로 만들고,
그 계율을 열심히 잘 지키면 섬기는 신이 어여삐 여겨 복을 내려주고
죽어서는 천국이나 극락과 같은 좋은 곳으로 데려간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서는
이 세 가지 부류인 구제와 기도와 금식과 같은 것을 열심히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렇게 하며,
가장 열심히 행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무서운 책망을 들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행한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들은 가장 무서운 책망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입니다.
또 예수님은 백성들을 가르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지적은 그래도 나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예수님의 이 무서운 지적들은, 그들은 잘못 가르치고 있으며,
엉뚱한 방향으로 인도하여 애는 애대로 쓰면서 지옥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여러 종교행위들에 대하여
진지하게 검토하고 반성하여야 합니다.
그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가르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옛 사람은 그렇게 하라고 하였으나,
너희는 이렇게 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옛 방식은 본래의 목적과 본질에서 벗어나 오용되고 남용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갚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구제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도,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4),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도,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오늘 본문 중, 금식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도,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7-18)고 하셨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란, 내가 무슨 마음을 먹고 그렇게 하는지,
무슨 의도로 그렇게 하는지 하나님께서는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들은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구해도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왜 그토록 구하는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반복하시는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으니라.”는 말씀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거리에서 교회에서 나팔을 불며 행하면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이며,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는 것은 그렇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절대로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구제를 열심히 하고, 밤새도록 부르짖어 기도하고 40일 동안 금식하고
넘치는 헌금을 하더라도 남에게 보이려고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고, 나아가서는
바리새인들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처럼 된다는 뜻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잡아주신 것을
오늘날 교회가 또 다시 뒤집고 있음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원하시는 바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내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남들의 눈도장을 찍으려는 모든 종교 행위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높이려는 헛된 몸부림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시며”
내 나라가 굳건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내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행하는 기도의 내용들을 점검해 보십시오.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어떻게든지 움직여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거룩한 성숙’과 하나님의 뜻을
어떤 상황에서도 이루는 ‘순전한 복종’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흉악의 결박과 멍에의 줄을 끊어준다는 금식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부연 설명합니다.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과 같을 것이라.”(사 58:9-11)

금식은, 하나님이나 사람들을 조종하는 종교의식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육체를 비워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깨닫는 정결 의식입니다.
나를 얽매고 있는 내 욕심의 멍에를 풀어내고,
남을 조종하여 내 뜻을 관철시키려는 헛된 마음과 허망한 말을 끊어내고,
길 잃은 영혼들, 불쌍한 사람들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리라 결단하는 것이
바로 금식을 제정해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남들이 전혀 눈치채지 않도록 하는 금식이
효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기도 자체에, 금식 자체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일상의 대화라면,
금식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 더 긴밀한 교통의 시간입니다.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능력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지는 시간,
그래서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깨닫는 시간이 바로 금식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며 되돌아서면,
내 욕심을 끊어내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하고 있다면, 비록 내 일이 풀리지 않고
나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이미 들어간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인간의 논리나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저 그런 성가대가 있었습니다.
교인들은 성가대의 찬양을 들어주었습니다.
예배에 성가대가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몇 년이 지나도 소리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쁜 습관들은 고착화되었습니다.

새로운 성가대 지휘자가 부임하였습니다.
새 지휘자는 대원들이 버리고 고쳐야 할 일과 해야만 하는 일들을 조용히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소리가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이 부르지만 새로운 음악이 탄생한 것입니다.
대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고,
더 나은 소리를 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의 새로운 성가에 교인들이 감동하기 시작했고,
대원들도 더욱 열심히 신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 일들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축구팀 감독이 바뀌자 매일 지던 똑같은 멤버들이 이기기 시작합니다.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자녀들은 달라지지 않고
나쁜 일들이 더욱 많이 일어납니다.
전도, 봉사, 헌금, 새벽기도, 일천 번제, 구제, 금식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감독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질을 회복하지 않았고
바리새인들처럼 했기 때문입니다.

라커룸을 지어 놓고 거기에 모여 잘못된 코치 말을 들으며
폼 나는 유니폼과 고급 장비를 달라고,
더 좋은 라커룸과 넓은 운동장을 달라고 더 많은 관객을 보내달라고 아우성칩니다.
그리고는 그저 자기들끼리 동네 축구에만 열중하는 꼴입니다.

의욕만 있다고 좋은 선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은 받지 않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교회에 너무나 많습니다.
관객들을 끌어 모으고 기분 좋게 한다고 좋은 선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나쁜 습관을 고치고 버리고 강한 체력과 좋은 기술을 습득해야 합니다.
각종 경기,
나아가서는 월드컵에서 서로 협력하여 골을 넣어야 하고 승리해야 합니다.

마음에 새기십시오.
감독은 목사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운동장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나는 안 돼.”라고 당하고만 살던 내게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 너는 빛이고 소금이다,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받아들이시면서 내가 지향해야 하는 방향과
구체적인 훈련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따라 하려고 애를 쓰는 나를 어여삐 보시며 격려하시고 능력과 용기와 힘을 주십니다.

나는 더욱 잘 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기회도 열어주십니다.
나는 성공을 경험합니다. 신이 납니다.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나를 교정하고 전진합니다.
나를 당당하게 키워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더욱 열심히 신나게 살아갑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은 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중심을 보신다고 해서 감시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넘치도록 공급하시고,
내 잘못을 친절히 교정해주시고, 영원한 평강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은 나를 자만하게 하지 않으면서 칭찬해주시고,
깎아내리지 않으시면서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들어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금식에 대한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립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8-9)

엄청난 말씀입니다.
그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이
먼지만도 못 한 내 뒤에서 호위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복을 누리기 위해서 40일 금식을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절제를 통해서 깨끗해진 내 영이 하나님의 영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만난(萬難)을 이기며 그 뜻을 살아갈 때 내 삶은 밝게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 엄청난 복을 온 몸으로 증거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