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살리는 영성, 죽이는 종교성 (마태복음 6:5~8)

새벽지기1 2017. 8. 1. 12:11


미 공군 전투기 조종사였던 하워드 러트리지는
베트남전 초기 북 베트남에서 전투기가 추락되어 포로로 잡혔습니다.
전쟁이 끝나기까지 기약도 소망도 없는 긴 시간 동안 비참한 포로생활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당시 포로 생활의 경험을 "나의 적 앞에서"라는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그 책에서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던 나날을 이길 힘의 원천을 다음과 같이
성찰하고 있습니다.

“강제로 주어진 이 기나긴 자기 성찰의 기간 동안,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
가치 있는 것과 무가치한 것을 구분하기가 훨씬 쉬웠다.
과거에 나는 일요일이면 다른 일을 하거나 노느라 교회에 갈 시간은 없었다.
아내는 교회에 가자고 권유하였지만, 나는 다른 일에 몰두한 나머지, 주일
예배와 같이 중요한 것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이제는 끔찍한 죽음의 장면과 소리, 냄새가 온통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다.
배가 너무 고팠고 육체의 고통은 참을 수 없이 극심했지만, 영의 양식에 대한
굶주림을 더 심하게 느꼈다.
이제 결코 죽지 않을 그 부분에 대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얘기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 포로 수용소에는 목사님도, 성경도, 찬송가도, 나를 지도하고 보살펴줄
교회도 없었다.
감옥에 갇혀서야 하나님 없는 삶이 얼마나 공허하고 끔찍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하워드 러트리지는 그동안 무시해 왔던 영혼이 음식보다도 육체의 안녕보다도
더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 그 무엇보다도 영혼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절감한 그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도 교회도 목사도 없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그는 모든 것이 완비된 그 어떤 교인들보다도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 믿음으로 지옥과 같은 상황을 이겨냈습니다.

영혼은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는 영역입니다.
영혼이 건강할수록 하나님 아버지와 더 긴밀하게 교통하여 땅에서 일어나는
어떤 어려움도 이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이요, 그 영혼을 강화시켜
하나님께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올바로 깨닫고 또 그렇게 열심히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건강한 영혼을 갖추기 위해서 당연히 영혼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것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건강한 몸을 위해서는 몸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몸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적당한 운동과 바른 식생활입니다.
운동은 하지 않고 몸에 좋다는 것을 닥치는 대로 찾아먹다간 돈은 돈대로 쓰고
몸은 몸대로 망가져 버립니다.

그와 같은 현상이 교회에서 너무나 흔히 일어나고 있고, 애는 애대로 쓰면서
치유불능의 병든 영혼들을 양산해 내고 있습니다.
그 웅장한 예배당과 많은 예배와 헌금과 봉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외식하는 자’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 외식하는 병이 얼마나 깊은지, 가장 정성스러운 제사와 기도와 율법과 종교
행위에도 불구하고 정작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영혼이 병든 백성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간단한 지시에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자신들을 구하러 온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고는 환호성을 지릅니다.
외식하는 병은 개인은 물론 교회와 사회 모두를 병들게 합니다.

영혼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의 맨 처음 부분, 창세기 첫 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 모두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태초부터 ‘영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 구체적인 과정을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생기(生氣)’입니다.
생기를 히브리어로 ‘르아흐’라고 하는데 곧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은 흙으로 만드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러자 우리들은 ‘생령(The living spirit)’이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영, ‘육체를 가진 영’이 우리들의 원래 이름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혼’에 대한 것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그냥 ‘영’입니다.
원래 인간은 영(spirit), 혼(soul), 육(body)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고래로부터 그저 ‘영혼’이라고 뭉뚱그려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에 사람들이 모르는 깊은 함정이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어떤’ 것입니다.
‘혼’은 생각하고 느끼는 정신적인 활동을 담당하고,
‘육’은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활동을 담당합니다.
그런데 ‘영혼’이라고 모호하게 사용함으로써 혼란이 일어납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일들을 모두 신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일입니다.
모든 사물들 속에는 신령한 기운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숭배하는 일입니다.

‘영’은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동물이 사람보다 ‘영특’하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래서 동물들에게도 영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큰 잘못입니다.

1970년경에 스탠퍼드 대학에서 코코라는 고릴라에게 수화를 가르쳐 400단어
정도를 배워 사람과 대화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코코는 어린 시절 어미가 죽은 경험을 수화로 정확하게 설명하며 슬퍼했고,
애완동물로 키우던 고양이가 죽자 그 아픔을 말할 정도로 똑똑했습니다.

그런 코코에게
‘너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말하자 코코가 ‘하나님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코코가 아는 단어들을 조합하여 열심히 설명해도 결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동물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는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코코는 서너 살 아이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는데, 이 정도의 어린아이들 중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렴풋이 깨닫는 아이도 있습니다.
바로 인간에게만 주신 ‘영’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이 믿어지십니까?
내 영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 분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이 믿어지지 않으십니까?
내 영이 죽었다는 증거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주신 영이 내게서 떠났다는 뜻입니다.

언제 내 영이 죽을까요?
언제 내게서 영이 떠날까요?

성경은 문학적인 표현으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
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 6:2-3)

‘하나님의 아들’이란,
생령(生靈)으로서 영적 존재들인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사람의 딸의 아름다움’을 보았다는 것은 그저 눈에 드러나는 겉모습에
현혹되었다는 뜻이고, ‘아내로 삼았다’는 것은 ‘한 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들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지 아니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물질에 눈이
팔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신, 성령이 사람 안에 거할 곳을 찾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르아흐’는 사라지고 그저 ‘살덩어리’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우리의 이름이 ‘생령’에서 ‘육체’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런 인간을 당장 없애야 마땅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육체가 ‘일백이십 년’은 살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일백이십 년 동안 잃어버린 영을 찾을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무너져가는 육체에 아등바등 집착하는 가련한 거지 신세, 이 살덩어리를 남보다
더 잘 보존한답시고 제사장이라는 사람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바위에도 절하고
개구리도 숭배하는 딱하기 그지없는 노예 신세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이 되돌아오며, 건강해질 수 있을까요?
표현을 달리 하면, 어떻게 하면 믿음이 생기고, 굳건한 믿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듣습니다.
고개가 끄덕여지십니까?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어쩌면 더 이전에 믿음이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이미 인생은 이런 것이 아닐 거야.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닐 거야. 누가 알고
있을까?” 하는 갈급한 마음을 가졌다면 이미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워드 러트리지가 그랬습니다.
“아, 아내가 그토록 가자고 했던 교회에서 이 갈급함을 채울 수 있었구나.”
그 말 한 마디로 그의 안에는 영이 되돌아 있었고 믿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곧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인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보다는 ‘권세가 회복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영이 돌아오는 일, 믿음이 생기는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너무나 원하고 바라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이제 남은 일은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함께 사는 일입니다.
이것이 곧, 내게 임한 영을 강화시키는 일이며 곧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일입니다.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함께 살 때만 영이 건강해지고 믿음이 굳건해집니다.
그러므로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영성(靈性)’과 ‘종교성(宗敎性)’을 구분하는 일입니다.

영과 혼과 육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삶 가장 깊고 낮은 곳까지 스스럼없이 내려가셨습니다.
창녀와 세리들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과 허물없이 먹고 마시며 어울리셨습니다.
홀로 기도하러 퇴수(退受)하시기도 하셨지만 일상의 삶과 전혀 유리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영성이 무엇인지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영성’은 일상의 삶에서 추구하는 ‘살아있는 거룩’입니다.
나와 남을 살리고 새롭게 하는 ‘창조적 영성’입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종교성’을 추구하였습니다.
세상과 육체를 더러운 것으로 보고, 천하고 낮은 것은 멀리하고 각종 복잡한
종교 계율을 철저히 지키며 세상과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세속과 거리를 두면 둘수록 훌륭한 바리새인이 된다고,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
잘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게 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바리새’라는 명칭은 ‘거룩을 추구하는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한 것은 일상을 떠난 ‘죽은 종교성’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을 상실한’(딤후 3:5) 종교성입니다.

문둥병자가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살리러 가까이 가지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천벌을 받은 더러운 자라고 한 걸음 더 물러나 돌을 들어 쳤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도 ‘거룩’을 추구하였으나 정반대로 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영성’을, 바리새인들은 ‘죽은 종교성’을 추구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신앙생활이 종교성 강화로 변질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헛된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바리새인들의 율법대신 목사들이 만든 새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세상을 멀리 하고 교회에서 살라고 합니다.
교회와 세상과의 장벽은 점점 높아집니다.
소위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나 신령한 목사들은 자신을 점점 높입니다.
“나는 너희들과 달라.”라는 태도로 세상과 사람들은 대합니다.

회당과 큰 거리에서 소리 높여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처럼,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그와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야! 너희들과는 차원이 달라.”라는 말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뭐든지 보여주신다고 암암리에 선전하며 교묘히 사람들을
모읍니다.
소위 ‘기도하는 사람’, 신종 기독교 무당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아, 저 분은 신령한 분이야.”하고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더욱 자신을 종교적으로 탁월한 사람으로 드높입니다.
기적이나 입신이나 방언과 같은 기이한 현상들이 강조됩니다.
이 모두 종교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단 한 번도 그렇게 하신 적이 없습니다.
몰려드는 사람들을 오히려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가셨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6-27)

그들의 귀가 번쩍 뜨입니다.
“아니 뭐라고? 영생하도록 먹는 양식이라고?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요?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집니다.

그들은 온통 영원히 먹을 양식, 부귀영화와 만사형통에 몰두할 뿐입니다.

종교성 추구의 무서운 오류를 명심해야 합니다.
영성 대신 종교성을 추구할 때,
예배는 무당굿이 되고, 기도는 주문이 되고, 헌금은 복채로 전락해 버립니다.
목사는 무당이 되고 교인들은 영적 의존증에 빠진 ‘병신도’들로 전락합니다.

몸으로 비유하자면, 영성 강화는 운동과 적절한 식사요,
종교성 강화는 몸에 좋다는 음식만 찾아 먹는 일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한 하워드 조종사를 하나님이 어여삐 여겨 살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보상으로 살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기도로 영이 튼튼해진 하워드가 만난을 이긴 것입니다.
설사 그가 죽었다고 해도 영생하는 그의 영이 살았음으로 그는 하나님께
한 걸음으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기도, 누구보다 언제나 열심히 해야 합니다.
조용한 곳을 찾아 시간을 정해 놓고,
또 매순간 언제나 일상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어리석고 연약한 존재,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지혜와 능력과 위로를 구해야 합니다.

대표기도 잘 하셔야 합니다.
목사가 설교를 준비하듯
하나님께 간구하며 최선을 다해 신령과 진정으로 준비하셔야 합니다.
‘중언부언’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예배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그 어떤 시간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듣고 느끼고 배운 바를 일상의 삶에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내 삶의 모든 것이 바로 잡히며 풍성해지며,
내 삶에서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마침내 나는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봉사자로 거듭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