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칼빈

칼뱅, 이날까지 아무도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을 모른다 / 마이클 리브스

새벽지기1 2016. 7. 2. 23:04


칼뱅은 제네바를 복음을 전파하는 국제 중심지로 아주 열심히 바꿔 갔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프로테스탄트를 따르는 통치자들에게 조언자가 되어 주었고, 제네바에 왔다가 나중에 그들의 모국으로 돌아가는 난민들을 훈련했으며, 폴란드, 헝가리, 네덜란드, 이탈리아, 심지어 남아메리카까지 선교사들을 보냈다. 이 모든 일들을 할 수 있게 해준 진정한 기관실은 칼뱅이 1559년에 문을 연 대학과 아카데미였다. 이곳에서는 일반교양 교육에서 시작하여 신학과 성경 각 권을 자세히 연구하는 쪽으로 옮겨 가는 방식으로 목사들을 길러 냈다. 이 목사들은 나중에 완전히 훈련을 받고 무장을 갖추면, 제네바에서 파송을 받을 수 있었다.

 

칼뱅은 설교와 교육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한 주에 세 번 강의하고, 매주 주일에 두 번 설교했으며, 한 주씩 걸러 평일에도 그리했다. 그는 이를 종교개혁의 핵심으로 여겼는데, 이는 루터와 츠빙글리도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칼뱅은 다른 곳에 있는 설교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성경의 거의 모든 책을 다룬 주석을 썼다(대부분 그가 한 강의를 모아 놓은 것이었다). 이런 주석들은 그 전에 유럽이 알고 있던 주석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주석이었다. 칼뱅은 급작스런 회심을 통해,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되 오로지 당신의 말씀을 통해 새 생명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칼뱅 자신이 평생을 바친 작품의 본질이 되었다고 선포했다.

 

1555년은 종교개혁을 전진케 하는 칼뱅의 능력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해였지만, 동시에 그의 건강은 이후 다시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하강세를 타기 시작한 해였다. 방대한 결과물을 쏟아 내느라 지독하게 에너지를 소진하며 일하다 보니, 결국 그의 허약한 몸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 몸의 고통이 내 정신을 거의 마비시켰다고 털어놓았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들에게 이런 글을 써 보냈다.

 

관절염의 고통, 담석에 따른 복통, 치질의 괴로움, 각혈로 인한 생명의 위협, 이 모든 질환이 한꺼번에 저를 덮쳤습니다. 나흘 동안 몸살을 앓다 회복하자마자, 종아리에 지독히 아픈 통증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이윽고 이 통증은 제 관절을 병들게 했고, 관절염은 제 발에서 무릎까지 다 퍼졌습니다. 치질 부위 혈관에 생긴 종기는 제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 주었고, 장속에서 돌아다니는 회충은 고통스러운 간지러움을 일으켰습니다. 지난 여름이 지나자마자 신장염이 저를 공격했습니다. 말을 타면 흔들거리는 충격을 견딜 수 없어 들것에 실려 시골로 옮겨졌습니다. 돌아갈 때는 부디 여정의 일부만이라도 제 발로 걸어서 갈 수 있길 바랍니다. 제 신장이 피로해 쉬어야 할 때는 단 1마일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놀랍게도 제가 소변 대신 피를 흘리고 있다는 걸 발견했지요. 집으로 오자마자 자리에 누웠습니다. 신장염은 제게 격렬한 통증을 안겨 주었습니다. 결국 극도로 고통스러운 압박과 함께 결석을 하나 내보냈습니다. 결석의 크기가 아주 컸던 탓에 이 결석이 제 요도를 찢어 놓았고 상당한 출혈이 뒤따랐습니다. 이 출혈은 관장기로 우유를 주입하면서 겨우 멈췄습니다. 그 뒤에도 저는 결석을 몇 개 더 내보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신장 결석들은 신장을 압박하는 마비 증세를 만들어 내기 충분하더군요. 저는 발의 통풍 때문에 앉아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생활 방식 때문에 병을 고칠 가망이 아예 없습니다. 또 치질 때문에 말을 타는 운동을 할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어떤 음식을 먹든 소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담이 생기고, 이 담이 제 위에 풀처럼 촘촘히 달라붙는 것도 고역입니다.”

 

10년에 걸친 그의 병고는 1564년에 막을 내렸다. 그는 죽음이 다가왔음을 느끼자, 유언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구원을 얻을 방어책이나 피난처는 그분(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입양해 주시는 것뿐이요, 내 구원은 오직 여기에 달려 있소.” 자리에 누워 있어야만 하는 날이 늘어가자, 칼뱅은 제네바의 모든 목사들에게 자신을 마지막으로 한 번 찾아와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간청했다. “형제들이여, 내가 죽은 뒤에도 이 일을 계속 이어 가고, 낙심하지 마시오.” 마침내 그의 몸이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하여 아무것도 남지 않고 오로지 영혼만 남은 것처럼 보일 때”, 그는 침상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때가 527일이었다. 그의 제자인 테오도르 드 베즈는 그 순간의 무게를 느끼며, “해가 짐과 동시에 이 찬란한 빛이 우리에게서 사라졌다고 써놓았다.

 

칼뱅은 자신의 유골이 성물이 되거나 자신이 우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평범한 묘지에 묻고, 무덤에는 아무런 표시도 남기지 말라고 부탁했다. 무덤에는 신비한 매력도, 비석도 없었다. 그게 바로 칼뱅다운 무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