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이드 존스

부흥을 위한 기도 (출33:12-17)

새벽지기1 2016. 6. 28. 06:55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다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라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의 앎이니라"(출33:12-17)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죄 때문에 그들에게서 그 임재를 어떻게 거두어 가셨으며, 그들이 어떻게 회개했고, 모세가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중보 기도를 했으며,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어떻게 들으시고 구름 기둥이 회막문에 어떻게 다시 돌아왔는가에 대해서 알아 보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실상 바로 이시점에서 부흥을 위한 기도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다시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더 나아가서, 제가 그처럼 강조하고 싶은 요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일어난 모든 일을 보고 매우 감사했습니다. 구름 기둥이 돌아온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백성들까지 그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머물러 서는 것을 보았으며 모든 백성들이 경배했고, 각자가 자기 장막 문에서 경배했다는 말씀을 봅니다. 모세는 이것을 더 분명히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것으로 인해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돌아오셔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모세가 그 시점에서 멈춰 버릴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는 분명히 그 이상은 더 필요한 것이 없었을 거라고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숙고하고 있는 이 대목의 전체 요점은 모세가 아직도 만족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더 많은 것을 바랐습니다. 그는 회막으로 다시 돌아와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가 받았던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더욱더 많은 것을 갈망했고 더 많은 것을 위해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부흥의 전체 문제에 있어서 사활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점입니다. 부흥은 가외의 것입니다. 그것은 부가적인 것이요,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제가 볼 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흥이란 정의상 일상적인 것에서 벗어난 어떤 것이요,
특별하고 비상하며, 예외적인 것이라는 요점을 전혀 포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부흥이라고 말할 때는, 교회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든지 그의 임재를 의식한다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수 있게 된다는 것등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세는 이미 그 모든 것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를 대면하여 말씀하실 때 개인적인 확신을 그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우리는 이제 예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다시 모든 것이 잘되었다. 하
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임재 하셨으니 우리는 이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논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부흥이란, 교회가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게 되며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특별한 경우에서 그 점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그 처지가 어떤 특별한 것, 범상한 것을 벗어난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상황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위해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제가 볼 때, 부흥과 부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요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날 이점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심지어 복음주의적인 사람들 중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정통적인 것 외에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정규적인 사역을 감당해 나가고, 회심하는 일이 일어나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그 이상 무엇을 요구하는가? 사람들이 회심하게 되고 성령충만을 알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이것이 곧 교회의 이상적인 상태가 아닌가? 사람들이 자기들이 믿는 이가 누구임을 알고, 그 믿음이 정통적이며, 그래서 에베소서 5:18에 나오는 사도의 권면을 따라 계속 성령 충만한 것, 이것이 이상적인 상태가 아닌가?"

이 논증은 부흥이 무엇인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부흥은 그 모든 것보다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에 부가되는 어떤 것, 예외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깜짝 놀랄 만한 특성을 지닌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점에 분명하지 못하면 부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며, 또한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태도를 취해 왔습니다. 그들은 모든 일들이 다 잘 되어 간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보라. 여러 공회들을 보라, 종교지에 나오는 기사들을 보라,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있으며, 참으로 놀랍다." 그래서 그들은 부흥에 대해서 생각지 않습니다. 부흥이 필요함을 느끼지도 못하여,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현재 우리의 상태를 계속 견지해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고 계시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 그들은 결정적으로 부흥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흥의 전체 문제에서 가장 중차대한 부분이라 할수 있는 것을 살펴보려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의 두번째 대목에 그 점이 매우 명백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얻은 모세가 더 많은 것을 원하여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더 많은 것을, 여분의 것을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제시된 첫번째 문제는 그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느낀 것은 이 부가적인 필요성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들을 살펴볼 때, 부흥을 위해서 부담감을 느낀 사람들의 기도의 특징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동질성은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지배하는 원리를 인식하는 순간, 더 이상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부흥이 오기 전에 중보 기도를 드리던 자들이 언제나 관심을 기울였던 것들이 여기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오늘날의 상황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이것들은 우리의 관심을 모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모세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했습니까? 그는 가장 우선적으로 개인적인 확신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13절의 메시지가 그러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그는 자기가 은총을 입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하나의 논증의 재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읽을수 있습니다. "내가 주의 은총을 입었사오니 이제 주의 길을 내게 보여 주소서, 내가 주를 알고, 주 앞에서 은총을 얻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주소서."

이것은 어떻게 보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는 "내가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이 일을 행하사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소서"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에게 모세를 알고, 사람이 그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에게 말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내게 주를 알리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서 우리는 특별한 구분을 하게 하는 요점들 중 하나를 대하게 됩니다. 모세는 자기가 하나님께 열납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단순한 지식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 있다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많은 것을 원했습니다. 모세는 말했습니다. "내게 주를 알리소서."

그는 하나님에 관해서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정말 관심을 갖고 계시며 인자하시다는 표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것을 원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원했습니다.
그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무런 의심의 여지 없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에 관한 절대적인 확신을 원했습니다.

여기에 여러시대에 걸친 하나님의 위대한 성도들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부흥과 중보 기도의 문제에 있어서 축복하셨던 사람들에게서 말입니다. 그들에게 일어났던 첫번째 일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을 사모하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훌륭하고 정통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자기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었으며, 구원의 확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에 그러한 확신을 얻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크고 더 깊은 어떤 것에 대한 갈급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에 대한 더 깊고 충만한 지식과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제가 교회의 보편적인 상태라고 부르는 그러한 상태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제가 교회의 보편적인 상태라고 부르는 그러한 상태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특이한 것, 비상한 것을 원합니다.

제가 볼 때 바로 그점을 아주 잘 나타내 주는 찬송시 몇 구절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온유하신 예수님 제가 기도하오니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달콤한지 말씀하소서,
저의 고민하는 심령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불어넣으소서.
저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소서. 오 구주여.
제게 분명한 확신을 허락하소서.........
                                    -윌리엄 윌리엄즈-

이것이 바로 제가 말씀드린 요점입니다. 그는 구세주가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너는 내것이라 말씀하소서. 오 구주여."

오직 구세주의 사랑을 아는 자만이 그에게 그러한 것을 구합니다. 여기 이 사람은 특별한 것. 비상한 것, 부가적인 어떤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해서 저는 이 점을 오래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적인 수준에서 우리는 모두 이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말을듣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치 못합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기 원합니다. 이것은 예외적인 것이고 부가적인 것이며, 정말 그와 같은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소서. 오 구주여."

모세는 바로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그는 일반적이고 평범하며 범상적인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입장에 있습니다. 저는 그보다 더한 것, 더 부가적인 것, 이 모든 것을 내 영과 내 마음에 인쳐 주는 특별한 것을 원합니다. " 이것을 위해서 그는 부르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흥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체험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를 매우 생생하고 절실하게 의식하기를 원하는 바람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교회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순절 이후로 교회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구하고 있는 것, 부흥을 간구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성령이 교회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거나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드러나 명백해지되 어떤 의심이나 어떤 주저함도 나타날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표증이요, 비상한 나타남이요, 사랑에 대한 부가적인 확증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가 기도했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흥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도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교회안에 계시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다 알고 정통적인 신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해 볼 때 우리가 접촉하지 못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바다 가운데서 노를 젓고 있는 어린아이들과 같습니다. 큰 대양과 그 깊이,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여기에 이러한 부가적인 것, 하나님의 사랑의 대양의 깊이와, 그 비상한 확증을 위해서 마음으로 부터 나오는 울부짖음이 있습니다.

"내게 주를 알리소서."

이것이 바로 부흥을 위한 기도입니다. -단지 매주, 매달, 매해 진전되어 나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부흥을 위한 기도입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는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사소한 일들을 하는 시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사소한 일들을 하는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만을 원할 뿐입니다.

그러나 큰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더 큰 일들을 갈망하는 모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그것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큰일을 하실 것을 제게 말씀해 주실수 없습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녀가 아버지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태도입니다. 그와 같이 하는 것은 자식 뿐입니다. 자식은, 종들이 감히 물어볼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을 과감히 아버지께 물어봅니다. 아버지는 일어날 어떤 일에 대한 암시를 주셨습니다. 어린 자식은 참지 못하고 "아버지, 무엇을 하시려는지 제게 말씀해 주세요. 그것을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더 잘알게 해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는 기다릴수 없습니다. 그는 좀이 쑤십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물론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린아이 같은 심령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제가 평안을 누리고 행복해질수 있도록 그것을 알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내가 너의 걱정거리를 덮어 주겠다. 내가 할일을 네게 알려 주어, 네가 어떤 염려나 걱정을 할 필요가 없도록 해 주겠다"고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간구, 즉 개인적인 확신에 대한 소원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와 제안과 생각의 비밀을 알수 있도록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소원에 대해서 무엇인가 느꼈습니까? 비밀을 알게 되기를 바라는 강렬한 열망을 느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실지 안 하실지 바로 이 순간에도 알고 싶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모세의 기도였습니다.

모세가 기도한 첫번째 사항을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두번째 사항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물론 그것은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즉 능력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는 하나님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능력을 위한 기도는 부흥이 있기 전의 교회사에 언제나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중보자들이 언제나 가장 긴박하다고 느끼는 것인데, 그 이유가 여러가지 있습니다.

물론 첫번째 이유는 자기들이 직면한 난제가 대단히 크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요, 자기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원수들의 힘과 약속의 땅에서 만나게 될 강력한 족속들-아말렉 족속과 그 밖에 다른 족속들, 그리고 땅을 정복해야 하는 막대한 사명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와 같이 걸어서 여행하던 일종의 유목민들이었으며, 한곳에 정착하여 그곳을 정복하고 그곳을 자기들의 터전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갑자기 자기들이 직면한 난제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제가 볼 때 오늘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직면한 난제의 엄청남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비극적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난제의 거대함을 인식하기만 하면 부흥을 위해 기도하라고 강권할 필요성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닫혀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모든 것이 다 잘되어 간다.
신문 보도를 보라, 놀랍다.
저 활동들을 보라.
모든 것이 잘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상황을 언제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기 전에 어떤 광신주의자들에 의해 쉽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역시 다른 상황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신문을 통해 여러 교단들의 통계를 살펴보십시오. 교인 수가 줄어들고, 주일학교 출석률이 낮아지고, 예배에 참석하는 인원이 줄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모든 교단들에서 그 비율이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참으로 놀라운 비율로 말입니다.

여러분은 몇몇 기독교 신문들을 보면서 어떤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회심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통계숫자가 그렇지 않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수가 매년 마다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습니다. 악과 죄와 불경건과 신성을 모독하는 모습이 증가함을 우리는 분명히 볼수 없습니까? 영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그것을 볼수 없습니까? 복음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현대 지성주의를 볼수 없습니까? 번영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영혼과 하나님에 관해서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볼수 없습니까? 이것은 이 나라에만 속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 사람들 중 10퍼센트만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그 중 절반 만이 교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안심할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 처지를 보고 득의 양양해 할수 있습니까? 모든 것이 잘되어 간다고 할수 있습니까?

제가 말씀드리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갈수록 두려운 양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노력을 강구해도 그 주된 상황을 해결하지 못함을 저는 명백히 압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들의 회심을 얕보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전체 요점은 이것입니다.

곧 모세와 그 백성들이 이미 그러한 입장에 있었으나, 그들은 여분의 특별한 것, 비상한것, 예외적인 것을 간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일아나고 있는 일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함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비극은 사람들이 "이것이면 충분하다. 그러한 일이 일아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된 상황은 그 어느때 보다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능력과 비상한 표증을 위해서 울부짖고 간청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모세와 백성들은 난제의 본질을 인식했습니다.
그들은 난제의 본질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연약함도 인식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만일"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보내지 마옵소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모세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고들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인식했습니다.
그런 모세가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가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시면 저는 한 걸음도 더 가지 않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러한 상황을 대처하겠습니까?
주께서 제게 주신 지혜로도 충분치 못합니다.
저는 절대적인 확실성을 원합니다.
저는 능력과 힘을 원합니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모세는 하나님 없이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 없이는 나아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다시 이것은 부흥이 있기 전 교회 안에서 언제나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로 하여금 우리가 가야 할 긴 경로가 있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너무나 확신합니다.
우리는 심지어 그것을 떠벌립니다.
또한 우리는 여전히 기이한 일을 하고 있다고 너무나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능한 상태를 의식하지 못하며,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함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조직화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에겐 어떠한 소망도 없습니다.
부흥의 시작은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할수 없을을 인식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말을 아무리 인용해도 지겹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든 분파 앞에 그 어떤 말씀보다 제시하고 싶은 것이 바로 다음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3-5)

저는 과거에 하나님께 쓰임받은 어떤 목회자들의 경우를 인용하는 것이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자기들과 함께 강단에 서셔서 그들에게 능력으로 옷입혀 주실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을 갖기 전에는
감히 설교단에 올라가 설교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바로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 특별한 능력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것을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주시는 확신과 능력을 구하는 모세의 기도를 생각해 왔습니다.

세번째로, 그는 또한 당시의 교회와 교회의 사명에 대한 특별한 확증을 요구하며 기도했습니다.
16절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논증하며 아뢰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친히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다른 말로해서 이 기도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습을 취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독특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지금 이 특별한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주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주의 백성들인 줄 다른 모든 민족들이 어떻게 압니까?
그들은 우리를 비웃고 조롱하며 야유하고 압도하려고 합니다.
저는 우리가 세상의 여러족속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 않고 주님의 백성들이며 구별되고 독특하며 전혀 다른 백성임을 절대적으로 확증해 줄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을 위한 기도는 교회가 다시 교회답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제 논증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비상한 부어주심이 아니고서는 그 어느것도 그러한 일을 해낼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필요로하는 것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온 세계의 관심을 사로잡을 만큼 두르러지고 표적적인 것을 필요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부흥은 언제나 그러한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일을 흉내도 낼수 없습니다.
우리는 대단히 많은 일을 할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할수 있는 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진리를 설교하고, 옹호하여, 변증할도 있고, 켐페인을 위해서 계획을 수립할 수도 있으며, 세상앞에 대단한 기세를 나타내 보이려고 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것은 세상에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매우 압도적이고 신적이며 특별해서 세상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고, 우리가 주장하는 대로
하나님의 특별하고 구별된 백성들임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기도 속에 드러난 세번째 간구 제목의 진수입니다.
만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긴박한 요구사항입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문제가 됩니까?
사라진 것은 바로 교회의 독특성입니다.
교회는 다른 기관들이나 다른 집단들과 거의 방불해 보이며, 다른 어떤 제도와도 똑같아 보입니다.

교회와 어떤 선한일을 하기 위해 구성된 공회와 세상에 속한 조직들 사이의 차이점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까?
그것이 어떤 교단이든 교회 총회를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정치적인 집단이나 문화적인 집단을 살펴보십시오.
그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말할수 있습니까?

저는 이것이 의문스럽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고위 성직자나 어떤 공식적인 인물이 착용하는 특별한 의상을 볼수 없다면 그 차이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면, 과연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므로 하나님의 교회에는 어떤 독특한 것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는 우리의 독특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훌륭하고 존경할 만하며, 옷을 잘 차려입은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기간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큰 일들을 할 수 있잖아요
우리는 큰 캠페인을 벌이고, 교회에 나올 많은 신자들을 얻을 수 있잖아요?"

그러나 불교도 오늘날 그와 똑같은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불교에 대 부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불교로 갑니다.
인도나 다른 나라들이나 심지어 영국에서도 말입니다.

이단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들도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힘껏 노력하여 수많은 신봉자들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들도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거짓된 종교들도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말해서 세상은 영향받지 않고 감동받지 않습니다.
세상은 아무런 인상을 받지 못합니다.
그 모든것에 독특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나왔음을 아주 명백히 보여 준 어떤 초자연적인 표증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필요한 것은 오순절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읽어 보십시오 바로 그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큰 바람 소리를 들려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결코 그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또 반드시 방언을 하게 해달라고 구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다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도록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제가 구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 4장에 기록된 사건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가 큰 난제를 만났습니다.
설교를 하면 옥에 가두고 죽이겠다는 위협과 함께 금지령이 내렸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돌아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특별한 일을 행하소서, 우리로 능력 있게 설교하게 하시고, 그에 뒤따른 표적을 보내소서."
그러자 그 건물이 진동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위대한 능력으로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하나님의 성령의 부어 주심이었습니다.
그것은 오순절의 반복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세례였습니다.
다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그들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다시 한번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즉 이미 오순절에 충만함을 입었던 사람들이 또 다시 충만함을 입은 것입니다.

제가 구하고 있는 것은 사도행전 10장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 식구들에게 설교했을 때 일어났던 일 말입니다,
그가 설교할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고 편협한 유대인 베드로에게 이방 사람들이 진실로 회심했다는 확증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베드로가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줌을 금하리요"(행10:47).
이것이 바로 제가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해줄 하나님의 능력의 표증, 바로 이것을 저는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또 다른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2:3-4 말씀을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이것에 대한 하나의 놀라운 예증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리라."

곧 이것이 초대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비상하고 예외적인 인증과 확증을 주셔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설교하고 있음을 확증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정확히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11-12에서 그 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로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시를 원하는 것이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
그 교회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교회는 독특하며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님을 하나님께서 비상하게 확증하고 시사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설교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성령 없이 설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적으로 이 말씀을 상세하게 강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치 못합니다.
우리는 성령과 능력의 나타남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이 예배를 인도할 수 있습니다.
또 회심자들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 기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전혀 할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행하십니다.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능력을 부어 주시고, 이 독특하고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내려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바라며 기도했던 바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번째 간구입니다.
많은 의미에서 오늘날의 상황과 부흥의 필요성을 아는 사람들의 입과 입술에서 가장 긴급하게 나와야 할 간구가 이것입니다.
"주 하나님. 주의 말씀을 확증하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알리시고,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게 알리소서, 우리를 흔드소서!"

저는 건물을 진동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를 진동시켜 달라고 구합니다.

너무나 놀랍고 신적이어서 온 세상이 보고 오순절에 그랬던 것처럼 "이 어찐 일이냐?" 고 말하게 할 그 무엇을 저는 구하고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때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고, 성령께서 휘트필드와 웨슬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부어졌던 200년 전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또한 100여 년 전 미국이나 북아일랜드나 웨일즈나 스코틀랜드나 다른 여러곳에서 일어난 부흥을 보고도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어찐 일이냐? 이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사람이 산출하거나 조직화하여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임에 틀립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자기 백성들임을 확증하시고, 그들의 일과 메시지가 진짜임을 확증하시면서,

"자, 이 사람들은 내 백성들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는 행하지 않았던 일을 그들 가운데서 하고 있다. 나는 그러한 일을 내 백성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흥을 위한 기도는 어떤 사역에 대한 일상적인 축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기도는 항상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흥을 위한 기도는 그 일상적인 축복위에 특별한 것을 덧붙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 그 백성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과 그의 역사를 확증해 주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