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이드 존스

마틴 로이드 존스를 다시 생각한다 / J. I. Packer

새벽지기1 2016. 6. 28. 22:25


마틴 로이드 존스를 다시 생각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청교도의 후예”
제임스 패커(James Packer) / 리전트칼리지 조직신학 교수
 

“때로 보면 그는 청교도 같아요.” 판단의 근거는 전혀 잘못된 것이지만, 세익피스피어의 글에서 마리아가 심술 꽃은 익살광대 말볼리오를 가리켜 했던 말이 이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데이빗 마틴 로이드 존스에 대해서도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 ‘청교도’ 라고 부른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한 의미의 청교도는 어떤 사람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청교도들이 남의 흥이나 깨고 항상 얼굴이 굳어 있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청교도들은 쾌락이 경건을 배제하거나 역(遊)으로 경건이 쾌락을 배제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칼빈처럼 청교도들은 오히려 이런 자세를 정죄하였다. 로이드 존스 박사도 그들과 같은 노선을 걸었다. 금욕주의를 가장하는 것은 미신적인 어리석음 아니면 어린애처럼 미숙 한 것 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로이드 존스는 순수한 청교도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청교도 목사들은 언제나, 건전한 경건은 명랑하고 기쁨이 충만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로이드존스박사는. 공적인 자리에서 엄숙해 보이고 카메라 앞에서도 보기 좋은 미소를 지은적은 없지만, 확실히 매우 명랑하고 상냥하며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 즐거움이라는 하나님의 선물, 즉 피조물을 즐기는데서오는 기쁨과 구원의 즐거움, 이것 은 로이드존스가 늘 강조하던 바이다.


청교도의 노선을 따라


   로이드 존스 박사는 역사적인 실제의 청교도 사상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사상의 대부분에 진심으로 공감하였다. 그는 자신이 17세기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18세기 사람이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 이 말은, 복음 전도와 부흥신학에 있어서 조지 횟필드 및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과 스타일이 교회를 위한 로이드 존스 자신의 최고 이상이자 자기 삶의 최고 목표라는 의미였다 .
그러나 그가 17세기의 청교도 자료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설교 시에 그가 청교도 저술가들의 글을 여러 차례 언급한 점, 목회 초년병들과 심신이 지친 목회자들에게 청교도의 서적들을 읽으라고 끊임없이 권한 점, 그자신이 이 저술들을 탐독했다는 사실 (그의 결혼예물 가운데는 오웬과 백스터의 작품들도 있었다), 1950년부터 1979년까지 연례의 청교도와 개혁주의 연구모임(Puritan and Reformed Studies Conference, 나중에는 주관자가 바뀌고 Westminster Conference로 개칭됨) 을 주관했다는 사실, 출판사Banner of Truth Trust의 청교도 서적 복간 프로그램을 후원한 사실, 청교도들의 저술과 청교도에 관한 서적들을 주로 다룬 복음주의 문고 (Evangelical Library)의 사역을 뒷받침한 점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 또한 1971년의 "청교도사상과 그 기원” (Puritanism and its Origins)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기도 했다. 1925년부터 “청교도들과 그들의 작품들에 관한 살아있는 진정한 관심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나의 사역 전체가 지금까지 이것의 지배를 받아왔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바입니다.” 그가 일생 동안거의 언제나 청교도사상에 의존하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놀랄 만큼 독자성이 강한 사상가였으나 자신이 받은 유산(웨일즈인, 비국교도, 개혁주의)을 늘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 유산에 대단한 매력을 느끼고 이를 매우 존중하였다. 그리고 이 유산들 중에서도 역사적 청교도들이 대단히 영예로운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
 

내가 로이드 존스 박사를 처음만난 것은, 레이몬드 존스톤과 내가 둘 다 아직 학생의 신분으로서 , 연례 청교도 연구모임에 관한 우리의 비전을 박사님 앞에 펼쳐 보이고 이를 실현하는데 도움을 얻기 위해 그의 교회 집무실로 찾아갔을 때였다. 당시 이 아이디어를 환영하면서 그가 보여준 침착한 모습 속의 상기된 표정에, 그리고 극도로 친절한 그의 태도에 나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 그는 우리를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손님으로 환대하면서 우리 모임의 영구의장직을 수락하고, 교회의 여성도들을 통해 점심식사와 차까지 대접하였다. 그 후 해마다 그는 이틀간의 이 모임을 어길 수 없는 중대한 약속으로 간주하였다. 어느 해에는 내가 하루 밖에 참석하지 못하자 나의 우선순위가 잘못됐다며 아주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책망하였다. 세월이 흘러 이 회의의 참석 인원이 1950년의 20 명에서 200명 이상으로 늘어났을 때 박사님은 내게 이런 말을 하였다. 즉 그때까지 박사님은, 레이몬드와 내가 청교도 신앙과 경건의 표준을 세상에 알리고자 애쓰면서 보여준 이러한 열성(熱誠)을, 하나님께서 영국에서 영적 사역을 부흥시키고 있다는 일련의 징후 가운데 하나로 생각해왔으므로, 그 자신도 이 회의에 할 수 있는한 모든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
청교도사상연구모임에서 그는 탁월한 기억력으로 연사가 발표한 내용을 정확히 지적하였다. 모임의 참석자 대부분은 목사들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토론문제들은 목회 지향적이었다. 1959년부터 1978년까지 그가 폐회강연을 맡았는데, 이때 발표한 주제들이 대단히 흥미롭고 다양하다. 그 중에는 “부흥 : 역사적, 신학적 조망” (1959), “존 칼빈과 조지 휫필드” (1964), “프랑스혁명과 그 후” (1975) 등 도 있다. 이런 것들과 기타 많은 주제들은 사건과 인물, 역사에 대한 그의 놀라운 식견과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폐회강연을 통해 로이드 존스 박사는 영적 건덕을 위한 열정적인 지혜와 비전, 정신적 지극과 도전을 주었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여러 면모들
우선, 그는 웨일즈인이었다. 웨일즈인답게 친절하고 예의바르며 민감하고 따스하며 매력적이고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전형적인 웨일즈인처럼 감상적이지는 않았다. 또 전형적인 웨일즈 설교가처럼 설교에서 제멋대로 상상의 비약을 감행하지도 않았다. 그는 법정의 변호사처럼 말하며 사고했다.
둘째로, 로이드 존스는 훈련을 잘 받은 유능한 의사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문제에 대해, 그리고 과거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문제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 신학적 영적으로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파악 하고서, 여기에 근거해 모든 사물과 사람을 조직적으로 분석하며 고장난 것과 결여된 것을 찾아내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남이 말하지 않은 것이 실제적인 죄나 오류 못지않게 중요한 영적, 신학적 허약의 표정이 될 수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바트 병원(Bart's Hospital)과 할리가(Harley Street) 시절에 도 의학적인 면에서 명석한 진단자였듯이 그는 신학적, 영적으로도 명민한 진단자였다. 그의 마음을 끌었던 청교도 저술가들의 뛰어난 장점 가운데 한 가지도 이것이었다. 그들 역시 영혼의 의사로서 성경에 따라 신학적, 영적으로 바른 것을 깊이 이해하고 , 이틀 속에서 영혼의 문제를 철저히 진단하며 분석하였다는 점이다.
셋째 , 로이드 존스 박사는 걸출한 은사와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성경적, 합리적, 실천적, 목회적신학자였다. 그는 신학교를 다닌 적이 없지만 뜻을 다해 독학하며 끊임없이 독서하고 이슈들을 철저히 사고, 묵상하였다. 그리고 내가 그와 만난 이후를 보면 그는 언제나 자신의 보수주의적 개혁주의를 견지하며, 어느 신학적 모임에서든 탁월한 식견으로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였다. 그는 책을 속독하지 않고 천천히 읽었다고 하나 각 주제에 관한 주요한 서적들을 정기적으로 탐독 하고 그들의 견해가 자신과 어떻게 다른지를 검토하였다.
넷째 , 그의 목회사역에는 선지자적특질(quality)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내가 그와 만난 이후 그는 종교적 제도권으로부터, 그리고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종교적 주류문화로부터 고립된 삶을 살았다. 그는 웨일즈 교회들의 모호한 감상주의와 잉글랜드 복음주의자들의 반지성주의 및 성경과 복음에 대한 양쪽의 불신앙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물론 평신도들과 성직자들 가운데 그에게 경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공식적인 기독교계안의 그의 동배들은 그를 유능하지만 매우 유별난 괴짜로밖에 간주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진보주의적인’ 입장에 만족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로이드 존스를, 오래 전에 그 생존력을 상실한 사역 형태로 후퇴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그의 능력을 부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행동에 찬성할 수도 없었다. 주류를 거스려 헤엄치며, 인기 없는 진리를 옹호하고, 제도권의 인습적인 만족을 비판하며, 세상과 교회 안의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사람들에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생각하라고 재촉하며, 현대주의의 파산을 선포하고, 현대주의의 교만한 대표자들에게 옛 길을 지적한다는 것은, 권력의 회랑에서 한번도 인기 있는 처방이 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
하지만 분명 그에게는 이런 고립에 대처할 역량이 있었다. 스펄전이 세속화논쟁(Downgrade controversy)에서 패배하고, 케직대회의 가르침이 국교회의 칼빈주의를 침몰시키며, 자유주의와 사회복음이 웨일즈의 강단들을 점령한 이후 개혁주의 신학의 실(絲)은 사실상 끊어져 있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2차 세계대전 후에 개혁주의 신학의 실로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복음주의를 엮음으로써 이것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의 사역이 이런 다행스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데는 기독학생회 (Inter-Varsity Fellowship)의 초대 회장 더글라스 존슨(Douglas Johnson)의 공헌이 컸다. 로이드 존스 박사를 후학 양성 사역에 끌어들인 이가 그였다. 이를 통해 로이드존스는, 부상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복음주의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식견을 갖추어 줄 수 있었다. 또한 로이드 존스를 설득해 로이드존스 유력한 목회자 친교단체, 웨스트민스터 펠로우집을 만들게 한 이도 존슨이었다. 이 단체를 통해 로이드 존스는 사실상 초교파적으로 수백 명의 성직자들에게 주교와 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박사는 일생 동안 교계의 동배들 대다수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 살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때문에 그가 유달리 청교도들에게 친밀감을 가졌던 것 같다. 청교도들은 종교개혁 이후 국교회가 설립될 당시 따돌림을 받던 사람들이었다. 그가 아는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온전히 성경적인 모습으로 세우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어떤 형태의 비인기나 거부당함도 사양하지 않는 결단력 있는 사람들 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가 골수 개혁파, 교회 중심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교회 중심주의자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성경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진작시키는 핵심기관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는 항상 교회의 상태였다. 전반적으로 그의 설교는 시종일관 두 가지 분야에서 출발하고, 그 분야에서 맴돌며, 그 분야에 안착하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두 가지 분야는 이것이다. 그 하나는 교회의 상황이었다. 교회의 상황에 대한 그의 최종적 처방은 교회가 옛날의 신앙과 실천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성령의 부흥이 도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세상의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그의 최종적 처방은 3R(Ruin 멸망. Redemption 구속, Regeneration 중생)의 성경적 복음이 성령의 권능으로 선포되는 것이었다. 로이드 존스박사는 일차적으로 스스로를 전도자로 생각했으나 사실 교회의 상태는 잃어버린 자들의 상태 못지않게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어떤 국교도도, 심지어 국교파 청교도도 그 자신처럼 교회에 대해 진지하게 염려하지 않았으며 염려할수도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1960년대에 그는 이에 관해 나에게 자주이야기 했었다.
그의 교회론은 해를 거듭하면서 발전 하였다. 장로교 목사로 안수 받고 죽는 날까지 공식적으로 장로교인이었지만 그는 교회정치체제와 관련해 ‘확신 있는 독립교회주의자’ (그가 나에게 말할 때 사용한 표현임)가 되었다. 그리고 성인 세례방식과 관련해, 침례 아닌 관수식(뿌리거나 적시기)세례를 끝까지 견지하였지만 언약의 자녀들에 대한 유아세례는 중단하였다. 신조와 의식 절차의 이러한 혼용은 그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흔하지 않은 행위였다. 그러나 그는결코 교회정치 체제를 이슈로 삼고자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복음주의 교회들이 서로 간에 다양한 조직과 관습을 성경에 직접 반하지 않는 이상 이의 없이 용납하고, 힘을 한데 결집해,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지도와 권위 아래 교리적 순결, 영적 깊이, 선교적 생명력을 공동으로 추구하자고 역설하였다. 이렇게 하면 기독교의 진정한 연합이 이루어지고 교회의 실질적 건강이 촉진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처음에 그는 교파에 관한 문제를 한 켠에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해가 가면서,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주요개신 교단들이 성경적 개혁신앙과 삶을 받아들이고 영적 부흥을 함께 도모할 가망이 보이지 않자, 그리고 그들과 WCC의 연계가 그들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하리라는 판단이 들자, 복음주의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이들 교파에서 탈퇴해 옛날식 독립교회 형태의 새로운 ‘무교파’ 연합회를 결성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책이라고 그는 생각하게 되었다. 1960년대 에, 2천명의 청교도 목사에 대한 1662년도의 추방사건을 기념하는 집회 이후 로이드 존스 박사는 자신의 이런 견해를 공표하고 복음주의 내의 교단 동료들에게 분리를 촉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제스처는 양면으로 강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966년 런던에서 열린 비분리주의적 복음주의 동맹의 대규모 집회에서 박사는 힘을 다해 이를 호소하였으나 존 스토트가 이를 논박하고 나섰다.
본질적으로, 이 분리에 관한 로이드 존스 박사의 논증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주류 교단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에큐메니칼의 곱지 않은 친선 정책에 비추어볼 때 이 분리가 지혜로운 처사라는 것 이었다. 둘째는 이 분리가 복음주의의 하나됨을 보여주는 효과적이고 영광스러우며 그리고 필수적이기까지 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하나됨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종파분립적인 행위라고 보았다. 셋째는 복음주의자들이 현재 자 교단 내의 온갖 악과 연합해 죄를 짓고 있으므로 분리야 말로 당연한 임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복음주의 목사들의 대부분은 자 교단 안에 머물며, 그 안에서 계속 투쟁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결론을 내렸다. 로이드 존스 박사가 생애의 마지막 15년간 이 이슈를 역설하고 이에 대해 특히 국교도들에게 압력을 넣게 되자 개인들 간에 소원(陳遠)현상이 발생하였다. 필자도 이를 면하지 못했다. 박사의 그런 주장은 복음주의 공동체를 분열시켰다. 박사의 입장을 지지하는 자들은 분리하지 않는 형제들과 협력하는 것이 타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입장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그의 전반적인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며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이해하기에는 이것이 성경적이고 청교도적인 것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즉 이것은, 미봉책을 거부하는 거룩한 열심, 그리고 교회의 사태가 잘못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체 없는 개혁’을 역설하는 거룩한 갈망이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이런 정신이 청교도 사상의 실질적인 핵심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로이드존스박사의 분리운동은교회의 순결에 대한 청교도적 이상을 따르고자 한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분리운동과 관련해 그가 현실주의적 태도를 결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해 볼만하다. 박사는 원칙적인 이슈에 관해서 공적으로 강력히 설파하였으나 그가 염두에 두었던 새로운 유사교단(‘비교파적인’ 교파)의 청사진을 만들어 자기 비전을 구체화 시킨 적이 없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요구된다는 점을 제외하고 대안이라 할만한 것을 제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조직하는 일을 싫어하였으며, 어떤 모험적 사업이 지나치게 고도로 조직화될수록 영성이 저하될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다는 점을 언제나 잊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확실히 유능한 경영자였다. 그 리고 분명 새로운 집단을 만드는 데는 어느 정도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솔직히 고백하고 싶은 점이 있다. 로이드 존스 박사가 분리 주장의 성공적 결실을 바랐다기보다 분리 요구의 제스처만을 보이고, 이에 따라 복음주의적 국교도들 과 침례교 연맹안의 침례교도들, 세계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비판하는 일 그 자체에 오히려 더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사야와 예레미야처럼 남에게 거부당할 것을 얘기하면서, 당대에는 망각된다 하더라도 후대에는 알아줄지도 모를 어떤 의의 깊은 증언을 남기는데 지신의 주된 목적을 두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도 나에게는 있다. 계획 없는 말만의 이 분리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아마도 옳은 판단 일 것이다. 즉 폭넓은 지지를 얻어내고 광범위한 행동 욕구를 일으키기 위해 그 자신이 말했던 내용을, 성령께서 과연 사용하실 것인지 알아보고 싶어서 그는 직접 현장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교파의 우두머리가 되려 하는 듯한 어떤 모습을 비침으로써 자신의 선지자적 역할을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누가 그를 비난 할 수 있겠는가?
로이드존스가 본 청교도 사상의 본질
로이드 존스 박사의 강연 “청교도와 그 기원”, “청교도 사상의 창시자 존 낙스”에서 청교도 사상의 본질에 관한 그의 견해가 분명하게 표출되고 있다. 그는 청교도 사상을 하나의 ‘정신적 성향’으로 보았다. 이것은 독자적인 성경연구에서 출발하고, 연구결과를 교회생활에 적용할 것을 강조하며, 교회에 대한 행정당국의 통제에 도전하고, 개혁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할 때는 언제나교회 제도권과 결별하는 그러한 정신이다. 성경 진리의 적용에 언제나 청교도 신앙의 핵심이었 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이론적이거나 학문적인 청교도가 없다.… 적용은 진정한 청교도의 특정이다.” 요컨대 “청교도는 주로 순수한 교회, 진정으로 개혁된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청교도들이 가르친 것들과 은혜의 교리를 강조한 점, 그리고 목회신학을 강조한점 등을 좋아하고, 이런 면들에 아무리 탄복을 금치 못한다 하더라도 순수한 교회, 성도들의 모임에 일차적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확실히 청교도임을 지칭할 자격이 없다.… 교회론을 핵심에 두지 않는다면 진정한 청교도의 자세, 청교도의 견해, 청교도 정신, 청교도의 이해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이런 견해는 백번 타당하디만 여기에 추가할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지극히 현대적이었던 선대의 사람 칼빈처럼 중세의 유산을 물려받은 청교도들도 교회의 신앙고백, 질서, 권징, 예배 및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경건과 정직, 그리고 인간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정의와 중용, 이 모두를 단일한 완전체의 구성 요소로 보았다는 점이다. 청교도들의 마음에서는 개인과 사회와 교회 공동체의 모든 요소가 상호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 모두가 ‘여호와께 성결’ 해야 했다. 두 번째는, 특정의 정책적 문제나 기타 많은 문제들에 관해 청교도사상 내에서도 견해가 다양했다는 점이다. 로이드 존스박사 자신이 말한 대로, “대략 1640년 무렵에는 본질적으로 국교도적인, 원래의 청교도가 나타났다. 물론 이들은(영국국교회로부터) 비분리주의적이었다. 다음에는 역시 비분리주의적인 장로교 형태의 청교도가 출현하였다. 그리고 다른 극단에서는 아주 명백하고 뚜렷하고 공공연한 분리주의자들이 등장하였다.” 그 외에도 국교회에 ‘수시로 순응하는’ 반(半)분리주의자라 할 만한 이들도 있었다.
교회정치 체제와 정책에 대해 로이드 존스 박사와 나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청교도정신이 본질적으로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기독교이며, 우리가 오늘날 공감해야 할 대상이라는데 우리는 생각을 같이 했다.
로이드존스의 사역에 나타난 청교도적 요소들
그렇다면 그 자신의 사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청교도적 요소들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신학을 합리적, 실천적 학문으로 보는 그의 견해는 신학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에 관한 학문, 이라고 말한 윌리엄 퍼킨스의 정의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그리고 성경을 신학의 원천으로(즉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로), 그리고 기타 성경적 사상체계의 근원으로 본점은 청교도신학의 고전, 웨스트 민스터 신앙 고백과 완전히 일치하였다.
둘째로, 그의 설교 행위는 스타일과 언어 형태가 완전히 20세기 적이었으나 그 철학과 방법, 내용면에서는 전적으로 청교도 적이었다. 교리와 추론 그리고 ‘사용’ (본문에서 진리를 끌어내어 다른 성경 구절과 합리적 고찰로 이를 확증한 다음 이를 적용하는 일), 이 삼단계가 그의 일반적인 설교패턴이었다.
그는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사역을 선포하는 행위로서, 찬양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는 행위로서, 양식이다. 설교는 공적 예배의 정점이며,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리스도와 복음의 은혜가 설교의 핵심 이어야한다. 적용에서 (그는 서론도 사실적용의 일부로 사용했다) 설교자는 이 시대를 향해 말해야하며, 청중의 내면 속으로 파고 들어가 하나님 앞에 놓인 그들의 죄와 그들의 근심을 직접 다루어야한다. 화려한 미사여구와 상상의 나래가 없는, 단순하고 진지하며 직설적인 언어가 이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다. (리차드 백스터의 저술을 가리켜 처음 사용 되었던 ‘고상한 무관심’ 이라는 표현이 로이드 존스 박사의 문자화된 설교와 강연에도 몹시 잘 어울린다. 설득력 있는 1대1식의 명료한 언어, 청교도적 의미에서의 ‘친숙한’ 언어를 그는 언제나 추구하였다. 말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설교자에게 자유와 직설, 감정이입과 에너지, 열정과 긍휼을 주며 청중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 갈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기름 부으심을, 설교자는 설교 전과 설교 중에 매번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백스터의 말처럼 설교자는 ‘두 번 다시 설교하지 못할 자처럼 ,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설교했노라“ 말할 수 있어야한다. 각 본문에 대한 설교와 함께 성경의 장들과 책들을 계속하여,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강해하는 것이 훌륭한 설교방식이다.
셋째, 로이드 존스 박사는 영적인 경험을 청교도적인 관점에서 풀이하였다. 이에 관한 그의 이해는 두 가지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는 인간 지성의 지고성이다. 그에 의하면, 지성은 의지의 안내자이며 감정의 판단자이다. 다른 하나는, 성령의 간접적인 사역이다. 성령은 우리를 가르치고 움직일 때 먼저 우리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배우게 하고, 우리를 지극해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신다. 성령이 역사하여 지식을 주실 때 지성과 감정을 함께 자극해 신적인 실상들 즉 하나님, 그리스도, 은혜, 용서, 양자삼기, 새 창조, 안식 등을 효과적으로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청교도의 단어인 ‘체험적’이라는 말을 자체의 본질적 용어로 사용해야 한다. 또 최소한의 감정만이 개입되는 기독교가 최상의 기독교라는 관념은, 강력한 감정들에 대한 불합리한 잉글랜드 중류층의 반발일 뿐이다. 그러한 관념은 어리석기 때문에 조소거리에 불과하며, 성령을 소멸하기 때문에 참으로 서글픈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에 의하면, 회심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오르신 그리스도, 모든 사람을 항해 언제나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는 그리스도, 이 그리스도께 개인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데는 회개(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모심) 와 믿음(죄와 무능력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심) 이 포함된다. 설교자들은 청중에게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지적해 주어야 하며, 그리스도께 오는 자들이 얻게 될 평화 와 기쁨, 마음의 변화, 삶의 새 자원을 찬양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에 의하면, 틀에 박힌 20세기식 복음 전도는 세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지성적 설득을 대신하는 조작적인 감정주의는 거짓 회심을 격려하는 일종의 세뇌이다. 둘째로, 설교자가 마치 성령이라도 되는 듯 행동하는, 결산의 촉구 (일반적인 형태는, “이제 여러분에게 결단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믿기 원하시는 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도 역시 그와 동일한 좋지 못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셋째로, 회심과 관련해 언제나 철저하고 근본적인 회개를 역설하지 못하므로 진정한 회심자들이 믿은 후에도 영적 성장을 하지 못하고 얕고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문다. 이러한 약점들 때문에 로이드 존스 박사는 현대의 제도화된 복음 전도 방식을 멀리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 즉 성결에 관한 가르침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 박사는 정적주의적(靜寂主義的) 수동 상태를 복음주의적 지성의 현대적인 귀신들림으로 보고, 여기에는 분명한 축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을 놓아드림으로써 하나님이 하시게 하라”, “노력하기를 멈추고 신뢰하기 시작하라’ 등과 같은 표어들은 이런 견지에서 그가 볼 때에 수치스러울 정도로 잘못된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성결에 대한 판에 박힌 말들은 ‘이것을 하 라’, ‘그것을 다시는 하지 말라, ’먼저 기도한 다음 행동하라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청교도들처럼, 영육간의 갈등이 일생동안 지속됨을 강조하면서, 이를 초월 할 수 있다는 완전 주의적 주장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했다.
영적 침체도 로이드 존스 박사가 주의를 기울인 문제였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의사들과 정신병 의사들이 다루는 정신적 우울증과 종종 관련되면서도 그와 다른 상태이다. 이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에 대한 불신이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불신앙에서 오는 감정들과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때 당사자는 하나님께서 자녀를 연단시키면서도 자신의 약속에 언제나 신실하다는 사실에 영적인 눈을 고정하고, 언젠가는 하나님이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리라는 사실을 시편 42편 같은 형태로 고백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 박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량에 대한 확신과 미래의 하늘나라에 대한 확신은 그의 삶의 최고 축복이었다. 또한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와 후사임을 직접 증언한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구해야 할 최고의 위안이었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로마서 8장 15~17절이 말하는 이 증언을, 성령의 인침(엡 1:13, 4:30)과 동일시하고 또 사도행전의 몇 구절에서 말하는 성령을 받는 것과 동일시하면서, 언제나 이를 어떤 특정한 체험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해 파스칼로부터 에드워즈, 무디, 특히 존 플레벨 같은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강렬한 확신과 변화의 순간에 관해 기록한 여러 성도들의 체험을 실례로 들었다.
그 자신도 천국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런 체험을 한 번 했다고 한다. 이것은 30년 전 내가 그에게서 직접 들은 말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제 1차 청교도 연구 모임에서도 이 주제에 관해 강연하면서 직접적 확신에 관한 청교도 교리가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간과된 진리라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의 런던사역 후반기에는 로마서, 에베소서, 요한복음에 대한 정교한 강해에서(지금은 모두 책으로 출간됨) 이 문제를 길게 다루었다. 청교도들도 로마서 8장 16절과 에베소서 1장 13절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였지만, 혹자들은 성령의 증언이 단일순간의 체험이라기보다 끊 임 없는 질적 체험을 가리킨다고 보고, 에베소서 1장 13절은 믿은 후와 어느 시기에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라기보다 믿을 때에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모든 청교도들은 양자됨에 대한 지극히 분명한 체험적 확신을 구하고 남에게도 이를 구하도록 촉구하였다. 이점에서 로이드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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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청교도들은 금세기를 포함해 여느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경건한 삶의 면류관으로 보았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종종 설교 시에 죽음에 대한 준비가 필요함을 강조하였으며, 한 동료에게 자기 삶의 종말은 유종의 미를 거둘, 자기 사역의 마지막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면에서는 그도 영적인 체험에 관한 17세기 청교도들의 가르침을 초월하였다. 즉 주기적인 부흥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사용하시는 주요 수단이라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소신을 수용한 점이 그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부흥이란 영적인 체험이 매우 깊은 교회에 내리시는 성령의 쏟아부어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이 쏟아부어짐이 일어날 때를 결정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하지만 그 때를 앞당길 수는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표대로 일하신다. 이상이 로이드 존스 박사의 견해였다.
그러나 청교도들에게서는 이런 사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청교도들 모두가 종교개혁을 참된 신앙의 부흥으로 인식하였지만, 청교도들은 어느 시기에도 자신들의 사역과 당대의 역사(歷史)를 주기적 부흥의 비전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1929년에서 1931년의 남부 웨일즈 목회에서는 그가 이런 부흥을 어느 정도 맛 보았으나, 잉글랜드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는 이 부흥을 결코 경험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그 에게 슬픔의 한 근원이었다. 하나님이 부흥의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그의 신념과, 개개교회들이 연합하면 특이한 영적 생명력과 권능을 얻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 (그는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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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기로 그가 설명한 적이 없다. 어쨌든 에드워즈의 부흥교리가 일생 동안 그의 가슴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영적 거인들이 다시 일어나길 바라며
‘청교도 같은 사람?’ 그렇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일생의 대부분을 그렇게 살았다. 스펄전은 자기시대에 마지막 청교도라고 일컬어 졌거니와, 이 칭호는 로이드 존스 박사의 생전에도 그에게 붙여졌다. 아마 지금도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칭호는 다른 사림들에게도 부여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세상에 남긴 유산 가운데는, 그의 청교도 사상을 이어받은 젊은 목사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지성적으로, 영적으로 로이드 존스 박사가 우리에 전해준 청교도 사역의 찬연한 횃불을 이어받을 위대한 거인들을 일으키시리라고 우리가 기대해보는 것은 백 번 합당하다. 지극히 위대했던 청교도들, 예를 들어 오웬, 백스터, 굳윈, 십스, 퍼킨스, 하우 그리고 3세기에 걸친 그들의 지극히 위대한 추종자들, 예컨대 에드워즈, 스펄전, 라일 그리고 로이드 존스 등과 똑같은 인물들이 다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일의 교회에 성숙, 원리, 지혜, 은사, 경건 등에 있어서 그들과 유사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지 말란 법도 없다. 로이드 존스 박사가 옹호한 기독교의 본질을 충실히 유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기념비적 인물이 될 것이다. 필자는 이런 위대한 인물들이 곧 나타나기를 염원하는 바이다. 오늘날의 교회에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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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패커 / 캐나다 뱅쿠버에 있는 리전트칼리지 (Regent College)의 조직신학과 역사신학 교수로 있다. 많은 저술을 낸 바 있는 그는 국제적인 베스트셀러「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로이드존스 박사의 장녀 엘리자 벳과 옥스퍼드 동기생이기도 한 패커 박사는 로이드 존스 박사와 함께 다년간 청교도 연구모임을 주재하기도 했다.
출처 : http://bavinck.tistory.com/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