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오웬

존 오웬을 통해 보는 죄와 성화 / 김남준 목사

새벽지기1 2016. 6. 16. 08:44

오웬의 신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첫째, 신학함에 있어서 철저한 경건이다.
모든 청교도들이 그랬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이 신학의 최고의 목표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이 신학의 결과가 아니라 신학의 준비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앞에 올바른 사람에게 자기를 보여주시는 분이시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신학함.
 
둘째, 신학함에 있어서 철저한 학문의 탐구!
경건이 신학을 위한 진료라고 한다면, 학문은 그 진료를 아름답게 하는 기술!
 
떡을 빚는 기가막힌 기술이 있으나 반죽이 조금 밖에 없는 것,
떡덩어리는 많은데 빚을 수 있는 기술이 없다? 만들수록 엉망인 결과물이 넘쳐난다.
 
수사학과 논리
수사학 :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등의 시편의 고백들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표출함에 있어서 불충분하다.
논리학 : 로마서와 같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구체적인 지식.
 
신학함에 있어서 이 두가지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뤄야 한다.
 
오웬은 이 두가지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사람이다.
 
보통 신학자들은 남이 쓴 논문을 보면서 만들어지지만,
뛰어난 신학자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되면서 만들어진다.
하지만 하나님 깊이 만났다고 모두 신학자가 되지는 않는다.
이 두가지가 다 필요하다.
 
학문이라는 것은...
신학이라는 것은 일반학문의 토양을 쌓아놓은 가운데 세워야 한다.
 
신학공부를 깊이해서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설교는 탁월하다??
신학공부는 하지 않았지만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의 설교는 탁월하다??
 
신학공부는 신약과 구약의 연결, 각권의 연결,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의 연결, 신학과 철학의 연결 등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통합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이 있어야 그 모든 것들이 진정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샘을 파내야 하는 두 가지 원천!!
첫째, 개혁파 정통주의의 유산과
둘째, 교부들의 유산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이 큰 칼이었다면, 존 오웬은 칼의 날을 세운 사람이다.
 
넷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곧 그리스도의 영광.
3중적
첫째 온 우주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둘째 구속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셋째 신지식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구원뿐 아니라 이 이후의 모든 성화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가 중보자가 되신다.
오웬은 자기의 모든 소원과 가치와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머리를 주신 이유
첫째, 물리학적 이유
둘째, 미학적 이유
셋째, 지적인 이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예배드릴 때? 성경읽을 때?
아니다.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 생각하는 것이다.
 
다섯째, 인간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사상이다.
복음을 올바르게 알면 더듬어 묘사해낸 상담학에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이해를 가질 수 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 우리에게 관심은 영혼이다.
육체는 영혼에게 있어 수동적인 위치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의 통합적인 관계안에서 외부와의 관계, 또 다른 외부인 하나님과의 관계
그 안에서 영혼과 육체는 움직이고 작용하는 것이다.
 
그 영혼이 핵심이 되어 움직이게 되는 모든 기능과 앎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그 영혼을 찾을 수 없고 하나님에게서 발견하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앎은 영혼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일평생 두가지 이야기를 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고 싶으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라.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 머무르지 말고 자신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인간의 소망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학을 세우고 신앙을 일으켜세우는 세개의 기둥이다!!
1. 찬란한 성경의 계시
2. 그 성경의 계시를 알도록 역사하시는 그 성령의 역사
3.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진리로서 이성을 가지고 조직한 신학의 결과물
 
오웬의 책을 읽으면서 정죄받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는 그가 가지고 탁월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다. 
 
빨리 봐야 하는 책들
6, 7권을 빨리  
- 죄죽임의 교리,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유혹, 배교, 신편130편 강해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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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인간의 죄는 원죄와 자범죄
원죄는 죄책과 오염으로 구성!
죄책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지은 첫 인간의 아담의 죄에 대한 사법적 책임.
오염은 그 결과다.
 
여기에서 인간의 전적인 타락, 전적인 부패성, 전적인 무능. 이런 것들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 인간이 거듭나게 된다. 중생하게 된다.
그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적인 사역이다.
 
중생은 인간의 영혼이 완전히 죽어있는 상태에서 살아나게 되는 것.
그렇게 살아나게 될 때에 하나님이 한편으로 그의 죄를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기초로 믿음을 통해서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세가지의 요구요인들이 작용하게 된다.
첫째, 공로적 원인 : 그리스도의 대속
둘째, 도구적 원인 : 믿음
셋째, 작용적 원인 : 성령
 
그 때에 죄에 대한 사법적인 책임은 면제가 된다.
하지만 오염은 남아 있게 된다. 이것은 단번에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죄와 사망의 법
인간의 타락은 인간 안에 죄를 향한 실효적인 힘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하나의 큰 원리가 된다.
죄와 사망의 통치가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중생과 함께 그것을 부러뜨리시고 생명과 성령의 법을 심어주신다.
중생한 사람은 새로운 본성이 심어지는 것이다.
중생의 원리가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심겨졌지만, 성령이 현재적으로 그것과 끊임없이 역사하셔야 이뤄지는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이 깨뜨려지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세워졌지만 여전히 이것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들이 뭉치면서 힘을 형성하게 되는데 때로는 그것이 아주 큰 힘을 발휘하면서 거의 신자다운 모습이 전무하게 되는 것이다.
 
도미니온!
지배이지만 우세이다.
신자는 죄를 이긴 사람이지만 완전히 죄를 전멸시킨 사람은 아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속에 인간속에 죄를 남겨두신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하느냐고 하는 의지
이 의지와 함께 인간의 마음 안에서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시느냐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참여
 
이 두가지 안에서 죄가 현저하게 괴멸되면서 거의 없는 것처럼 되기도 하고,
때론 죄가 우위를 차지하면서 죄밖에 없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되기도 한다.
 
내재하는 죄는 내재적인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죄를 다운 책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은 이것이 힘을 규합해서 궁극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목표와 목표를 향한 죄의 활발한 작용과 은혜의 작용을 묘사한 책이다. 이 두 책은 같이 일어야 한다. 죄죽임은 이러한 죄에 대한 처방책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세 책을 같이 읽어야 한다.
꼼꼼히 공부해야 한다.
신학책도 화장실에서 읽을 책이 있고, 다른 책 읽다가 피곤하면 쉴 때 읽을 책이 있고, 책상앞에서 노트 펼쳐놓고 공부하듯이 해야 하는 책이 있다.
 
이 세가지 책은 세번째에 해당한다.
오웬의 책은 엄청난 축약이 이뤄져있다.
한줄 한줄 사이에 담겨있는 엄청 풍성한 신학적 지식이 바탕되어 있다.
오웬의 성화는 인간론의 맥락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대해서 기독론 안에서 다룬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라고 본다. 그리고 인간의 독특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만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창조하신 자연의 세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신구조를 반성함으로서/되돌아봄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흔적을 자신에게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타락한 이후에는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첫째, 이 세상이 타락하게 된다. 본래의 하나님 창조하실 때 부여한 찬란한 광채를 잃어버리게 된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의 영혼에 들어오게 된 어두음은 두가지를 도입하게 된다.
첫째, 지성의 눈멈을 도입한다.
둘째, 정서에 혼란을 도입한다.
 
외부에도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희미해지고, 내부에서도 희미해진다.
하나님을 알수 있는 지식은 살아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이 있다는 것!
그 뜻대로 살지 않는 자들에게는 징벌이 있어서 핑계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보여주지만...
구속으로 나아가는 길에 대해서는 자연의 세계를 통해 인간이 알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을 알고 이 세계와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를 이해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삶속에서 구현해내 이 세상속에 그것을 발견시키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명이다.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죄다.
오웬이 신자에게 주는 최고의 비전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다.
그 길만이 참 인간이 되는 길이다.
 
참된 인간은 오직 신자가 참된 신자가 되려고 노력하려는 것에 의해서 점점 참된 신자가 되어가는데 그 참된 신자가 마지막 합치게 되는 마지막 지점이 뭐냐면 주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시고 싶으셨던 그 인간이 되는 것...
그렇게 참 인간이 되면 그는 온전히 하나님 창조하신 지성과 의지를 이해하는 가운데 그 지성과 의지에 자기를 온전한 사랑으로 합치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게 된다. 그 완벽한 모범이 예수 그리스도다.
인간은 결국 무능하고 부패한 인간이 되어버렸고, 오웬이 그려낸 타락한 인간의 상은 칼빈이 그려낸 것과 같이 절망적이다.
 
영혼은 철저한 어두음에, 지성은 눈멈에, 정서는 죄악된 충동에, 의지는 완고함에 복종되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어떠한 구원의 도움이 아니면 어떠한 개선도 기대할 수 없다.
 
중생과 회심의 관계...
회심은 중생을 통해 살아난 인간의 최초의 움직임!!
하나님이 그 영혼을 죽은 상태에서 살려내실 때 살아난 그 영혼의 최초의 움직임이 회심이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기도로 처음 공기가 들어갔을 때 폐가 아파서 우는 것이다.
중생이 출산과 같다면 태어나서 으앙~~하고 우는 것이 회심이다.
 
중생하게 되면 그의 영혼에는 두 가지 놀라운 변화가 도입된다.
첫째, 존재론적인 변화
: 성향이다. 물은 부으면 부어지는 성향이 있다. 딱딱하면 물이 아니다. 인간 자신이 몸은 그대로라도 중생전에 없던 성향이 도입되는데 사랑의 성향이다. 사랑의 성향을 새로 도입했다기보다 방향의 전환인데 자기사랑에서 하나님사랑이다.
 
둘째, 인식론적인 변화
: 생명의 특징(두가지 자기 조절의 작용, 외부와의 관계속에서 자기를 적응시키는 작용) 우리가 외부세계를 아는 것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만져보는 것이다. 안보이고 안맡아지고 안만져지면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오감에 의해서 감지되는 존재가 아니다. 오감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려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지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중생은 그의 영혼에 죽어 있고 작동하지 않던 감각을 새롭게 창조하여 살아나게 해서 예전에는 없었던 영혼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감각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며 감격하게 만들고, 그런 작용들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식을 통한 변화다.
 
신자가 되지 않고는 자신의 죄를 볼 수가 없다. 성령, 죄, 멸망, 구원은 오감으로 감지되는 것이 아니다.
죄를 죽이고 죄를 멸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 시키지 말아라.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시급한 것은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다. 죄를 죽일 수도 없거니와 비슷한 효과가 혹 일어난다해도 그것은 죄를 억제하는 것이지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중생하지 못한 내면의 세계는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만약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일시적으로 생겼다고 해도 자기 자신에게서 동기가 일어난 것이지, 결코 하나님을 향한 동기에 의해서 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성화라는 것이 무엇이냐?
오웬이 생각할 때 성화는 우리의 죄가 우리의 성품안에 있게 되는데
죄를 3중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
첫째, 영혼의 차원에서
둘째, 마음의 차원에서
셋째, 행동의 차원에서
이 세가지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에드워드 : 영혼의 본질 자체를 힘과 경향이다.
죄는 영혼안에서 움직이는 힘, 그리고 경향성이다.
영혼안에 있는 형이상학적인 경향성들은 영혼과 마음이 별도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는 영혼과 육체밖에 없는데 영혼의 기능중 하나가 마음인 것이다. 영혼과 육체의 움직임이 만나는 장소가 마음이다. 신자는 영혼을 직접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상태가 마음에 투영되어서 나타나는 힘의 작용을 통해서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이 마음을 통해서 육체는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도덕적인 판단의 경우에는 영혼이 마음을 통해서 이 일을 하게 된다. 마음의 성향이다.
영혼의 죄 경향이 어떤 힘을 가지고 존재하게 되면 이것은 마음안에 투영되어 성향을 만들어낸다.
마음은 모든 것을 산출해내는 공장과 같다.
영혼안에 있던 어떤 질서로서의 힘이 마음에 투영되고, 마음 안에서 이것이 작용되서 행동을 산출하게 된다.
 
인간의 어떤 행동이 영혼의 변화를 가지고 온다고 볼 수 없다.
인간의 행동은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이행득구가 될 수 없다.
오웬, 루터, 칼빈에게 있어서 믿음은 심리적인  작용이 아니라 영혼의 변화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마음이 연결이 되고, 인간의 행동과 마음이 연결이 된다.
이것은 인간에 의해서 자기 반성작용, 자기 회고작용에 의해서 인식이 되는 부분이다.
 
성령께서 영혼에 역사하셔서 마음이 변화되고, 행동도 변화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마음에 내재하는 것이다.
성화라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마음안에 있는 죄된 본성이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의 작용으로 정결하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영적인 선행을 행하기에 적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인간은 고귀하게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인간인데 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지성이 주를 이루지만 하나님을 닮은 영혼의 기능이고 중생과 함께 이 영혼은 구속되어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지만 완전한 회복은 아니다. 그 죄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하게 구속을 받는 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되는데 다만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일정하게 허락된 범위안에서 성화의 진전에 따라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많이 회복되기도 하고 덜 회복되기도 한 상태가 된다. 이 주체가 성령이다.
 
성령께서 오셔서 인간을 거룩하게 해나가시는데 중생은 성령께서 혼자 사역하지만 성화는 인간과 함께 사역하시면서 역사해 나가는 것이다.
 
존 오웬은 청교도들처럼 신자의 의무에 대한 기다란 담론을 서슴치 않는다.
의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이것이 개혁신학에 대해 던져주는 반성적인 메시지가 있다.
 
객관적 규범으로서의 법 : 헌법 등의 법
주관적 힘으로서의 법 : 습성
(아퀴나스적인 요소)    

 

출처: 책담비  http://blog.naver.com/luvjesus79/100204435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