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강 롬4장4-8절 구원의 확신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 유무에 있다. 불신자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외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악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보는 영적 감각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은, 얼마만큼 윤리적인 삶을 사느냐가 아니라 이 감각이 생성됐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어야 한다.
Q 시각교정을 위한 화두
“당신은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을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요, 선물이라는 차원에서 출발되어야 하며, 그래서 믿음이란 단어가 생겨났음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이러한 올바른 구원관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구원을 확신하는데 많이 사용되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살펴봅시다.
A: 당신은 오늘 이 자리에서 죽어도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하십니까?
B: 네. 확신합니다.
A: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B: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 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3:16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구절들로 구원을 확신한다는 것은 방법상 미흡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신앙상태에 따라 확신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을 경우에는 자신이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자신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의 정도에 따라 좌우되는 구원 확신법은, 구원 얻은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신자로서의 책임을, 구원을 확신하는 지점에 잘못 대입하기 때문에 비롯된 오해입니다.
구원 얻은 신자로서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책임있는 생활을 해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을 얻은 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요구받는 것이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구원해주지 않는다는 조건이 아닙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을 믿었다면 적어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도덕과 윤리적인 선한 행동들로 이뤄진 삶을 사는 것으로 구원을 확인하려 한다면, 어떤 신자도 만족스러운 구원 확인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제는 많은 세월이 걸려야 겨우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구원 얻은 이후의 긴 싸움에 해당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확인을 위해 내 안에 어떤 조건이 있는가를 살피면 살필수록 거기엔 십자가나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의로움은 없고 여전히 죄투성이인 자신의 부족함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의 성숙한 신앙생활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시체와도 같이 무감각했던 내가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되었다는 데 대한 확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하고 감각해낼 수도 없는 부분에 대해, 이제는 감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눈뜰 때
요한복음 9장에는 예수께서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의 눈을 뜨게 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소경이 눈을 뜨자 유대인들이 그 사건을 매우 싫어합니다. 예수님이 소경을 눈뜨게 한 것도 싫고, 예수님께서 그러한 기적을 일으킨다는 사실도 부정하고 싶어서 그 사람을 붙잡고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정말 예수라는 사람이 너의 눈을 뜨게 해주었느냐?“이고, 둘째는 ”네가 정말 소경이었느냐?“입니다. 둘 중의 하나라도 참이 아닌 것을 증명할 수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면 소경이 눈을 떴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한 것이 사실이라면 눈을 뜬 그가 원래는 소경이 아닌데 거짓말로 떴다고 한 것이 아니냐고 우기려는 것입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이 가만히 분위기를 보니까, 대답을 정직하게 했다가는 화를 입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옛날엔 안 보였는데 이제는 보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참으로 정확한 대답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믿지 않은 죄인과 구원을 얻은 중생한 자와의 차이는 감각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살아난 자는 감각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얘기하자면 촉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치 촉각이 있는 것 같이 영생에 관하여, 영혼에 관하여 감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 중에는 하나님이 하라는 것은 하지도 않고 자기 맘대로 살다가도 ‘이러다가 내가 얻어터지지.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은 그냥 놔두시지 않는다던데’ 하고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도 감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신자와 불신자간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불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감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불신자들은 “당신은 참 딱하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정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내 새끼 손가락이나 믿으시오”라고 종종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렇게 모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영적 감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죄가 영적인 문제에 대해 배타적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햇빛을 향해 자라나도록 되어 있는 주광성 식물이 빛이 오는 방향을 향하듯, 신자는 하나님께 향하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얘기나 영적인 얘기가 나오면 그들의 감각이 일단 반대편을 향해 서게 됩니다. “나는 천당 같은 데는 안간다. 차라리 염라대왕한테 가서 장기나 한판 두는 게 더 낫다”고 하는 등 늘 거꾸로 말하는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하며 말씀대로 제대로 살지 않고 도망을 가면서도, 손 하나는 걸어놓든지 귀 하나는 떼어놓고 갑니다. 도망을 하면서도 한 눈은 하나님을 쳐다보면서 도망합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고상한 위치에 와 있다고 해도, 자기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아예 없습니다.
이러한 감각, 이러한 최초의 인식을 표현하는 단어가 ‘믿음’이고 또한 ‘회개’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들로부터 어쨌든 우리는 구원에 대한 감각이 생기기 시작했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전의 생애와 그 이후의 생애를 바꾸어놓은 최초의 경험이었습니다.
구원을 감지하라
믿음을 갖고 회개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에 따른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한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의 최초의 인식이고, 최초의 경험이며,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체계의 가장 근본을 이루는 기초라 할지라도, 그것은 시작의 기초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결과로 생긴 첫 감각일 뿐입니다.
감각하는 나는 이미 살아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다든지, 회개했다는 것은 살아난 첫 증거에 불과합니다. 살아서 맞이하게 된 첫 경험이지 살아나게 된 조건은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구원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첫 감각에 불과한 것이며, 이미 살아있기 때문에 갖게 되는 감각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 문제를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은 의로운 사람입니까, 아니면 불의한 사람입니까? 정답은 불의한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불의했던 사람이 구원을 얻어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을 때는 다음 중 언제라고 생각합니까? 첫째, 불의한 사람이 의로워지려는 최소한의 노력이 있는 과정, 둘째, 그 과정을 통과해서 의로워진 시점, 셋째, 불의한 상태로 있는 시점, 이 세 가지 중 어느 쪽이겠습니까? 정답은 세 번째의 경우, 즉 불의한 상태로 있는 그때에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죄인이 회개할 때 구원을 얻는 게 아니라 죄인일 때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오해를 잘 합니다.
불의하다는 것, 죄인이라는 것을 성경은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그가 얻은 구원의 조건이 그에게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문제를 다음 이야기와 관련지어 생각해봅시다.
제 앞에 시체가 있습니다. 제가 그 시체에게 “여기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저쪽 고목 나무까지 20초 내에 가면, 너를 살려주겠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나는 그 시체를 어느 지점에서 살려준 것입니까? 그 시체가 일어나서 고목 나무로 가는 동안에 구원을 얻은 것입니까, 아니면 목적지까지 가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은 참으로 모순된 것입니다. 시체가 어떻게 말을 알아들으며, 어떻게 움직여갈 수 있습니까?
구원 문제에서도 우리가 쉽게 오해하는 것은, 시체가 살아나기도 전에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시체는 일단 살아나야 합니다. 그 시체가 다리가 하나밖에 없다거나, 혹은 아예 다리가 없거나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리가 없으면 굴러서라도 갈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구원의 조건은 사람에게 있을 수 없는 문제임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은 시체에 생명이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 얻기 전에는 들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시체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부분에서 사람들이 많은 오해를 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범하기 쉬운 죄의 본성과 관계됩니다. 즉, 인간이 시체로 출발하지 않고 그 이상의 어떤 존재로 출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튼튼한 시체와 병든 불구자 중 어느 쪽이 더 빠릅니까?” “죽은 나폴레옹과 동네의 강아지 중 어느 쪽이 더 무섭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전자는 모두 죽었고 후자는 살았기 때문에 후자가 더 빠르고 더 무서운 것입니다.
원인 없는 구원
로마서 4:5에서는 “일이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경건해질 각오로 했다든지, 경건해지려고 노력했다든지, 경건해졌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경건해지는 것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닙니다. 이것을 로마서 5:8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로마서 4장과 5장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감각이 있기 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종종 신자들은 ‘내가 저쪽 상수리 나무까지 달려가는데 늘 5등 안에 못 들더라. 늘 뒤쳐지더라. 나는 아마 시체인가보다’라고 생각하고는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곤 합니다. 이것은 신자들의 오해이며,‘병’입니다. 달리는데 있어 등수 안에 들어야 하는 것은 살아난 다음 단계의 일이지, 구원 자체의 문제가 아닌 것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병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구원 얻은 후의 성장에 관한 문제와 구원 얻는 문제를 혼동합니다.
성장 부분에서 부끄러운 꼴을 당한 것을 가지고 자기의 구원에 대해 회의한 나머지, “저는 교회를 떠나 교회 밖의 변변치 않은 사람들과 달리기를 해서 5등 내에 들어 다시 오겠습니다” 하면서 떠납니다. 그런데 밖에 나가보면 또 밖의 사람들과는 달라서 ‘나는 역시 믿는 사람이구나’하고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뒤쳐지게 됩니다. 이렇게 가고 또 다시 오는 이런 짓을 여러 번 반복하는 이유는 구원 문제에 대해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4장 6절 이하를 다시 봅시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와 7절부터 있는 말씀은 시편 32편에 있는 말씀입니다. “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7-8). 이 말씀을 보면 “회개하는 자는 복이 있고 주를 앙망하는 자는 행복한 자이다”라고 되어 있지 않고 모두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의 성장 단계에서는 회개 없이 용서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 문제에 대해서만은 이러한 원인 없이 그냥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얻은 후, 그 다음 단계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주실 때 “이것은 네가 잘못한 것이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하거라”는 다짐을 우리에게서 받습니다. 그런 후에야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야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내가 구별할 줄 아는 그 안목이 자라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성장 영역에서의 용서와 지금 본문에서 다윗이 말하고 있는 축복들, 즉 죄인들이 그 죄를 사함 받고서 구원 얻는 자리에 들어온 것을 말하는 대목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역에서 쓰는 단어는 같습니다. 두 영역에서 모두 ‘믿음’과 ‘용서’라는 단어가 쓰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과 ‘용서’는 두 영역에서 각각 그 의미가 다릅니다.
구원 얻는 자체에서는 우리에게 원인이 없으나 구원을 얻은 다음부터는 우리에게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이미 다윗은 시편에서, 이 문제에 관해 위와 같이 기록함으로써 구원의 방법은 율법이나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며,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계획이요, 약속이요, 방법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되짚어보기
1. 소경에게 일어났던 변화와 그에 해당되는 신자의 변화는 무엇입니까?
2.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어떤 것들입니까?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밝혀주십시오.
① 도덕과 윤리적 차원에서 다른 신자와 견주어본다.
② 주일 날 예배에 안가고 등산가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고 사고를 당할 것 같다.
③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살았던 실적을 조사해본다.
④ 누가 기독교를 비난하는 말을 하면 싫고, 변호하고 싶어진다.
⑤ 신앙적으로 잘 못사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리고 하나님께 죄송하다.
깨달음에 깊이 더하기
하나님을 감각하고 있기에 느끼는 깨달음이나 사건들이 있었다면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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