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2: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믿고 순종하고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운명, 인생,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해를 설득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사람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손에 인도되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Q 시각교정을 위한 화두
‘아브라함’의 위대한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제부터 몇과에 걸쳐 아브라함의 생애를 추적해보려고 합니다. 이는 성경이 아브라함의 생애를 단 한 사람의 신앙행로로만 추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애를 통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복음의 비밀, 구원의 비밀인 믿음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하면 여러분은 맨 처음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이삭을 바친 사건이 가장 대표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만 생각하면 기가 죽고 늘 희망이 없는 사람들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진정 믿음의 사람인가?
먼저 히브리서 11:8을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11:8-10)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추적해보고자 하는 것은 창세기 12장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생애입니다. 이 부분만을 볼 때에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정말 믿음으로 갈대아 땅을 떠났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창세기 11:31-32를 봅시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창11:31-32).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는데, 본문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장소가 갈대아 우르입니까, 하란입니까, 아니면 가나안입니까? 하란입니다. 하란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하란까지는 누가 데리고 나왔습니까? 누가 이 여행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였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의 설교가 나옵니다. 이 설교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 7:2-4)
여기서 스데반의 설교에 따르면,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타나신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갈대아 우르란 비옥한 지역인 메소보다미아의 문명도시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이 어디서 나타나신 것부터 기록되어 있습니까? 하란에서 나타나신 것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방신을 섬겼으나
다시 여호수아 24장을 찾아봅시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수24;2-3).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특별한 구절이 있습니다. 가나안에 오기 전 갈대아 우르에 살 때 누가 이방신을 섬겼습니까? 데라가 섬겼습니다. 데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되시는 사람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이방신을 섬겼습니까? 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므로 꼭 밝히고 지나가야 할 내용입니다.
먼저 2절에 있는 “섬겼으나”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봅시다. 우리말에 ‘…했으나’라는 것은 앞의 있는 내용과 뒤에 있는 내용이 반대라는 의미입니다. 앞에 있는 조건과 전혀 다른 결과가 뒤에 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아브라함은 나를 믿고, 데라와 그 선조들은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내가 아브라함을 거기서 꺼냈다.”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를 분명히 하려면 오히려 “데라가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혹은 “아브라함이 나를 섬겼기 때문에” 꺼내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있는 조건은 ‘꺼내온 것’에 합당한 조건이 아니 다른 ‘조건’이 있다는 뉘앙스입니다. 즉, 이방신을 섬겼는데도 불구하고 꺼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겼고 데라는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조상이 이방신을 섬겼지만 그 속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꺼내오신 것이 아닙니까?"
좋습니다. 우선 이것을 맞다고 하고 다시 창세기 11장으로 돌아갑시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라함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창 11:31)라는 진술이 나옵니다. 만일 여호수아 24장의 이방신을 섬긴 문제가 데라와 아브라함을 구별 짓는 차이라면, 데라는 이방신을 섬기고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는 신앙의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가나안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놓고 벌어질 최초의 싸움은 누구와 누구 사이에서 일어나야 합니까? 데라와 아브라함 사이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는 여행을 주도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데라입니다. 데라가 가나안으로 가는 일에 주도권을 잡고 여행을 출발시킵니다. 최소한 누구와 누구가 같은 편입니까? 데라와 아브라함이 같은 편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향해 여행하는 중에 있는 아브라함의 신앙 수준은 이미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수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기 시작해야 합니다.
전적인 은혜로 부르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에는 그 정도의 수준이라도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에서 하나님을 향한 첫 발자국이기에 믿음이라고 크게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아브라함의 믿음이 100퍼센트 순종하는 수준의 믿음이 아니었음은 애굽에서의 사건이나 이스마엘이 태어나는 사건을 통해서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인생의 길이 달라졌다는 의미에서 그는 믿음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타난 스데반의 설교에 따르면 스데반은 이렇게 진술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행 7:2). 스데반은 무슨 하나님이라고 말합니까?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 이르기를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명령이 여호와를 믿지 않고 이방신을 섬기는 데라와 그 친척집의 싸움, 즉 그 집안의 혈연을 깨고서라도 믿음을 지켜야 하는 싸움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아브라함은 일단 데라에게서 도망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서 함께 갔다는 것은, 제 생각입니다만 한 통속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어떠한 한 통속입니까? 아브라함도 이방신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셨을 때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까맣게 모릅니다. 저와 여러분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동일한 수준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잠을 자는 중에, 꿈속인지 생시인지 모를 비몽사몽간에 금빛 찬란한 광채 속에 어떤 분이 나타나셨습니다. 감히 형상을 형언할 수가 없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어떤 신이 나타나서, “아브라함아,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창조주요, 너를 지목한 신이다. 내가 네게 복을 주려고 한다. 그러니 너는 네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잠에서 깨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고 여호와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 환상을 보았다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순종하여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이삭을 바치는 사건처럼 이야기가 풀렸겠지만, 지금 아브라함은 생전 처음 이런 일을 당했기 때문에 그분이 누구신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한 일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 일은 누군가에게 의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최초의 의논 대상자가 그의 아버지 데라입니다.
‘여기까지만’의 믿음
아버지 데라가 가만히 그 말을 들으면서 보니까 그 말을 하는 아들이 식은땀을 뚝뚝 흘리고 있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으며, 너무나 진지하게, 또 두려워하며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 내 아들에게 간밤에 무슨 일이 생기긴 생겼구나. 아브라함이 무슨 이상한 환상을 보긴 보았구나.’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진 못하지만, 이방신을 섬기던 종교심은 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나타난 신을 거부했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일단 그의 말을 듣기로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주동이 되어 아버지의 명령권에 해당되는 혈연들만 모아서 길을 떠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갈대아란 그 시대 문명권의 중심이고 한 나라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하란은 그 갈대아 문명의 최변방입니다. 그 상황을 우리 나라로 옮겨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너는 서울을 떠나 만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디까지 갔느냐 하면 신의주까지 갔습니다. 신의주는 최변방입니다. 그러나 차마 거기서 더는 못 갑니다. 그 시대 사회에서는 자기를 방어하는 수단이 국가도, 법도 아닌 자기 자신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행에 데라와 롯과 아브라함,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출발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자기 목숨과 재산을 자신의 힘으로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데라와 아브라함은 최변방까지는 왔지만 더 이상 나아갈 자신은 없었습니다. 꿈에 본 그 정도의 환상을 가지고는, 자기 문명권을 벗어나 목숨이 어떻게 될지, 재산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곳에 발을 내디딜 수는 없었습니다. 그럴 만큼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더더욱 이들은 신앙이라는 이름을 붙일 단계에 있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다가 꾼 꿈에 떠밀려 거기까지 온 것입니다. 안 갔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그들이 알고 있는 최소한의 ‘종교적인 겁’을 먹은 것이 거기까지 온 이유일 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오해
여기까지 아브라함 일행을 인도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이름은 ‘지연시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적절한 이름입니다. 이 이름처럼 아브라함은 데라로 인해 가나안에 들어가는 데 도움을 받기보다는 더 많은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할 것은 데라와 아브라함은 어떤 신앙적인 차이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데라와 똑같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데라는 하란에서 죽고 맙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그후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드디어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과 우리가 구태의연하게 갖고 있었던 편견을 비교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과 그 결과의 원인을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돌리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기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될만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쉽게 오해하곤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에게 가장 큰 갈등이 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변변찮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겠나? 내가 이꼴인데도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해주실까? 내가 이 꼴로 믿으면서 예수 믿는다는 이야기를 남에게 해도 되겠나?’ 하는 생각들입니다. 이 모든 의문 뒤에 숨어있는 가장 큰 불신앙은 ‘축복은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 법이다.’ 라는 인간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어야 되는 법이다.’ 라는 말,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불신앙’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고 ‘신앙’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우리로서는 미스테리입니다. 정말 신비로운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 얻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구원 얻을 만한 조건이 있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사실을 아브라함에게서는 더욱 깊이, 더 확실하게 이해해야 됩니다. 성경의 모든 메시지는 ‘우리는 구원을 어떻게 얻는가, 하나님이 구원을 은혜로 주셨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인가?’ 아는 것을, 아브라함의 생애를 놓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에’ 라는 조건을 달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얼마나 좌절시키는지 아십니까?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믿음은, ‘좌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좌절하려면 아예 교만하십시오. 교만한 것은 좌절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신앙이 조금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좌절은 조금의 신앙도 없는 것입니다. 왜 없습니까? 구원 자체가, 내가 요구하거나 내가 무엇을 내거나 내가 협의할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내가 믿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자기 아비 집을 떠나 하란에 들어가고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까?
아브라함의 조상은 이방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저쪽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어리둥절해 있는 것을 보시고 계속 등을 떠밀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업고 달리기’
그렇게 등을 떠밀려서 아브라함은 하란에 왔고, 거기서도 하나님은 또 등을 떠밀어 가나안으로 들여보냅니다. 이 사실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을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 12;5)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참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이 ‘마침내’는 하나님 쪽에서 써야 할 ‘마침내’ 입니까, 아브라함 쪽에서 써야 할 ‘마침내’ 입니까? 하나님이 쓰시는 ‘마침내’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본토 친척집을 떠나 여행한 것이었다면, 그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따라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까지 왔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마침내’는 하나님이 쓰셔야 합니다. 아무리 가르쳐줘도 모르니까 억지로 밀고 끌고 해서 드디어 힘들게 가나안까지 끌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 그가 신앙으로 순종하려 했지만 되지 않았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대해 아브라함이 순종치 않은 결과라는 것을 또 한번 확인시키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란에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나타나시고 하란에서 또 다시 나타나셔서 권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었으면 어떻고 없었으면 어때요?”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과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의 맨 밑바닥에 무엇을 깔고 앉아 있는가를 이 문제를 통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으로 출발한 아브라함입니까? 아니면 불신앙으로 출발한 아브라함입니까?
우리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다.”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괜히 나오는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내가 깨닫고 스스로 걸어나오거나 하나님 앞에 “제가 졌습니다.”라고 합의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우리가 손과 발로만 버틴 줄 아십니까? 머리카락까지 올올이 버텼습니다. 한번도 합의하거나 동조한 적이 없는 길이 바로 신앙의 길입니다. 우리가 오직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한 일은 거부요, 반항이요, 미련한 짓이요, 아우성과 헛소리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실수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 설득 당한 자들입니다. 설득 당한 것 가운데 맨 마지막에 설득 당한 것이 이해입니다. 하나님은 운명부터 설득하고 그 다음에 인생을 설득하고 맨 마지막으로 이해를 설득합니다. 여러분의 운명이 하나님 안에 설득 당해서 구원 얻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인정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기 이전에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 손에 인도되고 있다는 사실로 기뻐하십시오. 그것이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하나님이 표현하시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깊은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인생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산행 열차를 탔는데, 앉아 있기는 뒤쪽 방향으로 돌아앉아 있으니 평양이 보입니다. 그래서 걱정을 합니다. “나는 평양을 보고 앉았으니 평양으로 가지 않을까? 모두 부산으로 가는데 나만 평양으로 가는구나.” 하면서 슬퍼하고 애통해 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누구 손에 의해서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우리 신앙에서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브라함의 생애를 추적하면서 자신의 근본부터 다시 정리하고 확인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본문 되짚어보기
1. ‘마침내’라는 단어는 누구 편에서 어떤 의미로 쓰는 것입니까?
누구:
어떤 의미:
2. 본문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출발할 때의 신앙수준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3. 아브라함의 낮은 신앙 수준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2장에서는 아브라함의 가나안 출발을 믿음의 결단이라고 대단히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칭찬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깨달음에 깊이 더하기
1. 우리가 아브라함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관념과 본문의 내용이 가르치는 바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2. 본문을 통해 본 아브라함의 출발과 비교해볼 때, 우리가 보기에 신앙 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평가해줄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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