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저자는 계속하여 인간 제사장이 드리는 제물과 예수께서 바치신 완전한 제물을 비교하여 설명한다. 앞에서 “원형”과 “모형”이라는 비유를 사용했던 저자는 여기서 “그림자”와 “실체”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율법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1절)일 뿐이다.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 규정을 따라 드리는 제사는 완전하지 않다. 그 제사가 완전했다면 해마다 드릴 이유가 없었다(2절). 역설적이게도, 해마다 대속죄일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해마다 확인하는 결과가 되었다(3절). 짐승의 피가 없애준 것은 죄책감이지 죄가 아니었다(4절),
저자는 여기서 시편 40편 6-8절을 인용한다(5-7절). 저자는 이 시편을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한다. “주”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고, “나”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셔서 자신을 육신으로 보내셨고,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대신에 주님의 뜻을 행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다(8-9절). "주님의 뜻"은 완전한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이 예언을 따라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단 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첫 번째 것을 폐하셨고”(9절), 그로 인해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다(10절).
묵상:
히브리서 저자는 성전이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모형이며, 율법이 완전한 계시에 대한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피조물로서의 한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삼 차원 공간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세상을 평면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개미의 한계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물 속을 헤엄치고 다니는 올챙이가 경험하는 세상과 개구리로 변한 후에 경험하는 세상이 다른 것과도 같습니다. 육신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나라를 상상할 수 있도록 성전을 짓도록 명령하셨고 그 나라의 삶이 어떤지를 추정해 보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성전과 율법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지평선 너머에서 어둠을 뚫고 솟아오는 태양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하셨을 때의 그 영원한 빛을 생각합니다. 아침에 바깥에서 들리는 새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천상에서 영원히 울리고 있는 천사들의 노래를 생각합니다. 정갈하게 준비된 식탁을 대할 때면, 천국에서 누릴 잔치를 생각합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침상에 누울 때,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을 생각합니다. 상쾌한 공기를 호흡하면서 하나님의 영을 생각하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영원한 세상을 상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비록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하다지만, 그 모든 것들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고 소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이 하루의 생명에 감사 드립니다. 호흡하는 공기, 마시는 물, 식탁의 음식--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상상하게 하고 소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 담아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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