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어서 예수님은 “죄짓게 하는 것”(42절)에 대해 경고하신다. “작은 사람들”(42절)은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 존재감이 없는 이들을 가리킨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절대값으로 동등하게 대접받는 곳이다. 그 나라의 원리와 기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대하든 진심과 성심으로 대해야 한다. 그들 중 어느 하나라도 “죄짓게”(원어의 의미는 “넘어지게”) 하는 것은 무겁고 무서운 죄다.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42절)는 말은 그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수사법이다.
그런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죄짓게 만드는”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죄짓게 하는 것은 손도, 발도, 눈도 아니다. 마음의 죄성이 손과 발과 눈을 조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마음에 물들어 있는 죄성이며, 그 마음을 조종하는 악한 영이다. 그것을 아시면서도 손과 발과 눈을 “죄 짓게 하는 것”으로 지목하신 이유는 “그것을 찍어 버려라”(43절, 45절) 혹은 “그것을 빼어 버려라”(47절)는 말씀으로 경고하시기 위함이다. (44절과 46절이 없는 이유는 두 절이 후대에 첨가된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런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죄짓게 만드는”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죄짓게 하는 것은 손도, 발도, 눈도 아니다. 마음의 죄성이 손과 발과 눈을 조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마음에 물들어 있는 죄성이며, 그 마음을 조종하는 악한 영이다. 그것을 아시면서도 손과 발과 눈을 “죄 짓게 하는 것”으로 지목하신 이유는 “그것을 찍어 버려라”(43절, 45절) 혹은 “그것을 빼어 버려라”(47절)는 말씀으로 경고하시기 위함이다. (44절과 46절이 없는 이유는 두 절이 후대에 첨가된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지옥”(43절, 45절, 47절, 48절)은 ‘게헨나’의 번역이다. ‘게헨나’는 예루살렘의 남쪽에 위치한 계곡을 가리킨다. 과거에 이곳에서는 자녀를 불태워 바치는 제사가 행해졌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장 역겨운 장소로 여겼다. 그곳은 원래 “도벳” 혹은 “힌놈의 아들 골짜기”로 불렸으나, 예레미야는, 그곳을 “살육의 골짜기”라고 부르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렘 7:32). 후대에 그곳은 쓰레기나 분뇨를 버리는 곳이 되었고, 그로 인해 늘 매캐한 연기가 피어 올랐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게헨나’를 지옥에 대한 비유로 사용하신다. “그 꺼지지 않는 불”(43절)과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48절)는 비유는 이사야가 전한 예언에서 가져 왔다(사 66:24).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49절)라는 말은 “심판을 피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는 뜻이다. ‘게헨나’의 반대 개념으로서 예수님은 “생명”(43절, 45절)과 “하나님 나라”(47절)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여기서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 혹은 “초월적 생명”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소금은 원래 좋은 것”(50절)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비유로 사용하신다. 소금이 유용한 이유는 짠 맛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 두어서” 라는 말씀은 제자답게 살라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배우고 그 정신대로 사는 것이 제자들이 가져야 할 짠 맛이다. 그들이 길에서 누가 높은지를 두고 다툰 이유는 그들에게 아직 짠 맛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높아지기 위해서 경쟁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 낮아져서 섬기는 곳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 곳에는 평화가 임한다.
묵상: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허비된 인생의 마지막 운명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그분은, 죄인이 맞을 최후의 운명에 말씀하시면서 ‘게헨나’를 비유로 사용하십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비유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세는 삼차원 공간과 일차원 시간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의 경험으로 내세의 상황을 묘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헨나’라는 비유를 들었을 때, 예수님의 청중들은 그 골짜기를 상상하며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과 “죽지 않는 구더기”도 역시, 죄인들이 맞을 최후의 운명이 얼마나 무서운 지를 실감하게 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게헨나’라는 비유 언어를 “지옥”이라는 사실 언어로 번역해 놓은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지옥”이라는 표현은, “귀신”이나 “마귀”처럼, 동화나 민담을 통해 형성된 선입견을 끌어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것은 죽음 이후의 불행한 운명인데, “지옥”이라는 말은 “땅 속에 만들어진 감옥”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번역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옥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힙니다. 그것은 관심을 엉뚱한 곳에 두게 하고 초점을 놓치게 만드는 질문입니다. 지옥이 어떻게 생겼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묻는 것은 길을 잃은 것입니다. “죄 가운데 허비된 인생은 내세에서 어떤 운명을 맞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죽음 이후에 받을 심판에 대해 가장 자주 언급한 사람은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은 단순한 위협이나 비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판보다는 구원을, ‘게헨나’보다는 천국을, 영원한 불행보다는 영원한 복락에 대해 더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구원과 천국과 영생에 대해 압도적으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위협하여 믿게 하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경고로 주신 말씀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고 그 사랑에 감복하여 믿게 하셨습니다.
기도:
주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심판이 두렵고 영원한 불행도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피하려고 주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저희를 향한 주님의 사랑 때문에 주님을 믿고 따릅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곧 천국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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