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을 떠나 유대 지방으로 가셨다가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신다(1절). 그곳에서 가르칠 때 바리새파 사람들이 찾아와 다시금 그분을 걸어 넘길 구실을 찾기 위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2절)라고 묻는다. 당시는 남성 중심 사회였기에 이혼은 주로 남편이 아내를 내보내는 형식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한 질문이었다. 그들의 속셈을 아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율법 규정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고 물으신다(3절). 그들은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라고 답한다(4절).
그것은 신명기 24장 1절 즉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여 아내와 같이 살 마음이 없을 때에는,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 주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습니다”라는 율법을 가리킨다. 이 율법은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했을 때라는 전제 조건을 달았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혼증서를 써 주고 내보낼 수 있다”는 허용 구절만을 취한다. 이혼증서를 써 주기만 하면 모든 이혼이 정당화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당시 사람들이 율법을 오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율법을 알고 지키는 것처럼 시늉을 했지만 실은 율법을 자기들 편의대로 오용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에 대해 말씀하신다. 율법은 인간의 "완악한 마음"(5절) 즉 인간의 죄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주어진 규정이다.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높은 기준을 따라 살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기준을 낮추어 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는 "......하라"는 규정보다 "......하지 말라"는 규정이 더 많다. 죄성을 따라 사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는 묵인해 주겠지만 정해 놓은 한계선은 넘지 말라는 뜻이다. 이혼에 대한 율법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이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길 수 있으므로, 최소한의 인권 보장을 위해 이혼증서를 써 주고 이혼을 허락하셨다. 이혼증서가 있어야 버림 받은 여성은 재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로 눈길을 돌리신다(6-8절).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영원한 결합이다. 이것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우회적인 대답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9절)고 덧붙이신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하기까지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짝지어주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하나의 멍에를 같이 지다”는 뜻이다. 결혼은 하나의 멍에를 같이 지고 서로 보조를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비워 섬기는 제자도가 결혼 관계 안에서 실행된다면, 이혼의 가능성은 제로가 된다.
예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그 가르침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를 청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결혼의 영구성을 강조하신다(11-12절).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신 것이기에 법적으로 이혼이 되었다 해도,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그 결혼은 여전히 유효 하다. 그러므로 재혼을 하는 것은 바람을 피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묵상: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제자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당시 다수의 유대인들은 이혼에 대한 율법 규정을 자기 편할 대로 해석하여 이혼을 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것이 땅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대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하면 손을 잡고 불리하면 언제라도 손을 놓습니다. 인간 관계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부부관계까지도 그러한 방식에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남성중심의 문화에서 아내들은 남편들에 의해 언제나 바꿔 쓸 소모품처럼 취급되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답하시면서, 율법으로부터 하나님의 창조 섭리로 눈길을 돌리게 하십니다. 제자는 율법 수준에서 사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따라 살도록 힘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거듭 났으니, 율법을 기준 삼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기준 삼는다면 “이혼 할 사유”를 묻겠지만, 창조 섭리를 생각한다면 “결혼의 의미”를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고 두 사람을 맺어주신 섭리를 찾는다면, 결혼의 의미가 자신들에게 이루어지도록 힘쓸 것입니다.
결혼과 이혼과 재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부부 모두가 제자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이 가르침은 “새로운 율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여기면, 비혼과 이혼과 재혼은 모두 죄가 됩니다. 예수님 자신도 비혼이셨고, 바울도 비혼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했습니다(고전 7:7). 바울 사도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신앙을 이유로 헤어지기를 원한다면 놓아 주라고 권면하기도 했습니다(고전 7:15). 바울 사도가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율법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결혼과 이혼과 재혼에 대해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가르침의 초점은 어떤 상태에 있든지(비혼, 결혼, 이혼, 재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저희에게 더불어 살며 사랑할 사람들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지금 저희가 처한 상황에 자족하게 해주십시오. 주님께서 원하시면 저희의 상황을 바꾸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다만, 주님 안에서 거룩하게 살며 만나는 모두에게 제자직을 실천하게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좋은 말씀 > -사귐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이 화가 되지 않도록 (막 10:17-22) / 김영봉 목사 (0) | 2025.03.01 |
---|---|
차별의식이라는 죄 (막 10:13-16) / 김영봉 목사 (0) | 2025.02.28 |
죄 가운데 허비된 인생 (막 9:42-50) / 김영봉 목사 (0) | 2025.02.26 |
편 가르는 세상에서 (막 9:38‑41) / 김영봉 목사 (0) | 2025.02.25 |
뒤집어진 나라 (막 9:33-37) / 김영봉 목사 (0) | 2025.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