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인간의 악행과 하나님의 섭리 (이사야서 10장)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10. 10. 07:00

해설:

1절부터 4절까지는 앞 장에 나오는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의 일부다. 여기서는 특별히 사회적 약자들(양민, 가난한 자들, 불쌍한 백성, 과부들과 고아들)을 억압하고 착취한 것에 대해 책망하신다.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들의 형편을 기준으로 그 사회의 정의도를 평가 하신다. 하나님은 부정과 불의를 일삼은 지도자들을 심판에 부치실 터인데, 그것이 심판의 전부는 아니다.   

 

5절부터 19절까지는 앗시리아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다. 앗시리아는 주전 742년부터 701년까지 무서운 기세로 주변 민족들을 점령하며 제국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패망하고 남왕국 유다는 701년에 공격을 받아 심한 타격을 입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앗시리아를 “나의 진노의 몽둥이”(5절)로 사용하여 “경건하지 않은 민족”과 “나를 분노하게 한 백성”(6절)을 심판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신다. 산헤립 왕에게 정복 전쟁의 야망을 심어준 분은 하나님이시다(7절). 그렇다고 해서 그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이미 여러 나라들을 정복 하였기에 하늘 끝까지 교만해져 있다(8-10절). 그는 여세를 몰아 유다까지 점령하려 한다(11절).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다 이룬 후에 산헤립을 심판하실 것이다(12절).

산헤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날수를 헤아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이룬 모든 승리가 자신의 지혜와 능력에 의한 것인 줄로 착각하고 기고만장 해 있다(13-14절). 그는 일꾼의 손에 들린 도끼요 톱일 뿐인데, 나무를 쓰러뜨린 것이 자신인 줄로 착각한 것이다(15절). 하나님은 결국 그 교만에 대해 심판하실 것이다(16-19절).

 

20절부터 23절까지는 패망한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의 예언이다. “그 날”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날을 가리킨다. 앗시리아가 심판을 받고 나서야 이스라엘 백성은 진실로 의지할 대상이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20절).  그 때가 되면 심판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돌아 올 것이다(21-22절). 심판은 되돌릴 수가 없다(23절). 

 

24절부터 27절까지는 앗시리아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에게 앗시리아나 이집트 같은 강대국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신다(24절). 하나님께서 그 나라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25절). 그 옛날 미디안 사람들과 이집트 사람들을 치신 것처럼 앗시리아를 치셔서 유다의 고난을 벗겨주실 것이다(26-27절). 하지만 심판의 날이 오기 전까지 앗시리아는 준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당시 앗시리아는 남왕국 유다를 점령하기 위해 남하하고 있었다(28-32절). 유다는 이 전쟁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멸망 당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만군의 주님”께서 지켜 주셨기 때문이다(33-34절). 

 

묵상:

앗시리아의 마지막 왕 산헤립은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잔인하게 주변 민족들을 점령했습니다. 그는 자신 위에 아무도 없고, 주변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 조차도 자신에게는 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가 잠시 동안 절대 권력자로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내버려 두신 이유는 그의 죄악을 묵인하거나 승인 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의 악행을 통해 당신의 섭리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회개의 기회를 모두 소진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루고 나면 하나님은 그를 심판에 부치실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찌 저런 사람을 그대로 두고 보시나?”라는 질문을 합니다. 혹은 “하나님이 왜 저런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셨나?”라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산헤립을 “진노의 몽둥이”이로 사용하시고 나중에 그 몽둥이를 불에 태워 없애신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악행까지도 사용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나서 그 사람의 죄악을 심판하십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인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의 구원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해서 유다의 죄가 용서 받을 수는 없다. 하나님은 유다의 배반 행위를 내버려 두셨지만, 애시당초 그런 죄를 마음에 품은 것은 유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선하게 살든 악하게 살든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행과 악행, 실수와 사고를 엮어서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시편 139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가 그분의 다스림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의롭고 선하게 살아서 그분의 계획에 쓰임 받느냐 아니면 불의하고 악하게 사는 것으로 쓰임 받느냐 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두고 살면 때로 타인의 악행으로 인해 피해를 입거나 예기지 않은 사고로 인해 고난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산헤립에게 하신 것처럼 그 악행과 사고를 바로 잡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