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아하스가 유다를 다스릴 때, 시리아와 북이스라엘 연합군이 앗시리아를 대항해 전쟁을 시작했다(주전 733년).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은 아하스에게 동참을 요청했고, 아하스가 이 제안을 거부하자 유다를 침공하려 했다(1절). 이 소식을 듣고 아하스 왕은 두려움에 질려 버린다(2절). 그 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예언을 주신다. 예언자로 부름 받은 후 7-8년 지나서 받은 예언이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아들 스얄야숩을 데리고 아하스 왕을 찾아가라 하신다(3절).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라는 의미다. 이사야가 선포한 예언의 핵심 사상 중 하나가 ‘남은 자’였는데, 그는 첫아들의 이름에 그 의미를 담았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아하스를 찾아가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하라 하신다(4-9절). 그들의 계략은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리아의 머리는 다마스쿠스이며, 다마스쿠스의 머리는 르신이기 때문이다”(8절)라는 말은 시리아 전체가 공격해 오는 것 같지만 실은 르신의 개인적인 야망일 뿐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연합군의 계략이 실패할 것이라는 징조를 보여 달라고 구하라고 하신다(11절). 아하스가 이사야의 예언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불신을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아하스는 어떤 징조도 구하지 않겠다고 답한다(12절). 얼른 보면, 하나님을 신뢰 하겠다는 뜻으로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하나님의 징조를 보면 자신의 계략을 내려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그에게는 더 크게 보였다는 뜻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하스의 불신앙을 책망 하시면서(13절) 하나의 징조를 예고해 주신다. “처녀”(14절)로 번역된 ‘하알마’는 보통 가임 여성을 가리킨다. 학자들은 이 “여자”가 이사야의 아내를 가리킨다고 본다. 머지 않아 이사야에게 둘째 아들이 태어날 터인데,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14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 아이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나이가 될 즈음에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황무하게 될 것이다(15-16절). 그 일이 일어나게 되면 과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예언대로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은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에게 패망한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유다 역시 큰 피해를 입는다(17절).18절부터 25절까지는 “그 날” 즉 앗시리아로부터 공격 당할 날에 대한 예언이다. 예언자들이 말하는 “그 날”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을 가리키기도 하고, 마지막 심판의 날을 가리키기도 한다. 앗시리아의 침공은 유다 역사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묵상:
아하스는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이 공격해 오는 상황에서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의 두려움은 주변으로 전염되어 온 백성이 심하게 흔들립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불러 아하스 왕에게 보내어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징조를 보여 달라고 하면 보여 주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아하스는 보지 않겠다고 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자신의 정책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두려움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계략으로 연합군을 대항하여 싸웁니다.
아하스에게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더 가까웠습니다. 그가 마주한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하스의 불신과 거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징조를 보여 주십니다.
이사야를 통해 아하스 왕에게 주신 징조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인용됩니다.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는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14절을 인용합니다(마 1:22-23). 마태가 이 말씀을 인용한 이유는, 태어날 아기가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징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에게 태어날 둘째 아들이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이 패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징조인 것처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임마누엘’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징조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에게서 난 아들은 천사의 지시대로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천사는 예수로 불린 그 아기가 ‘임마누엘’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그 예언대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징조가 되었습니다.
이사야의 둘째 아들이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징조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더할 수 없이 분명한 징조입니다. 하지만 아하스가 하나님이 보여 주신 징조를 보고도 믿지 않은 것처럼,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이 보이고, 그분이 행하신 일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보이는데, 우리는 현실에 매몰되어 눈 질끈 감고 우리 생각대로, 우리 계산대로 살아갑니다. 불신은 이토록 질기고 거셉니다.
'좋은 말씀 > -사귐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군의 주님의 열심 (이사야서 9장) / 김영봉목사 (2) | 2024.10.09 |
---|---|
고요히 흐르는 실로아 물 (이사야서 8장) / 김영봉목사 (0) | 2024.10.08 |
예언자로 부름 받다.(이사야서 6장) / 김영봉목사 (0) | 2024.10.05 |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 (이사야서 5장) / 김영봉목사 (1) | 2024.10.04 |
심판과 구원 (이사야서 4장) / 김영봉목사 (0) | 2024.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