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고요히 흐르는 실로아 물 (이사야서 8장)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10. 8. 04:48

해설:

임마누엘에 대한 예언(7:13-17)을 주신 후,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서판을 가져다가 태어날 둘째 아들의 이름을 적으라고 하신다. 그 이름은 ‘마헬살랄하스바스'(1절)로서 “노략이 속히 임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7장 16절과 17절에서 예언한 전쟁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뜻이다. 그 예언을 받은 다음, 이사야는 아내와 동침하였고, 예언대로 아내는 임신한다(3절). 하나님은, 아이가 “아빠, 엄마”를 부를 줄 알기도 전에 앗시리아 왕이 “다마스쿠스”(시리아의 수도)와 “사마리아”(이스라엘의 수도)를 약탈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신다(4절).

 

5절부터 10절까지는 유다가 당할 일에 대한 예언이다. “실로아 물”(6절)은 예루살렘 바깥에서 성 안으로 물길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든 수로와 연못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에 대한 비유다.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좋아하니”라는 말은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라 다른 나라로부터의 도움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책망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도움은 느리고 약해 보이고, 인간의 도움은 빠르고 강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유다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곤란을 당한다.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을 정복한 앗시리아는 내친 김에 유다까지 침공한다(7-8절). 이 전쟁으로 인해 유다는 심한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유다는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약속하신 대로 “임마누엘” 즉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8-10절).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면 인간적으로 제 아무리 좋은 전략과 군사력을 가지고 대비한다 해도 무용하다. 

 

주님께서는 이사야를 강력하게 사로잡으시고 “이 백성의 길을 따라가지 말라”(11절)고 하신다. “이 백성의 길”은 다른 나라와의 동맹에 의지하는 길을 말한다. 12절과 13절에 “너희는”이라는 이인칭 복수 대명사가 나오는데, “너는”이라고 읽어야 한다. 이사야에게 주시는 예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 백성이 모의하는 음모”(12절)에 가담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 음모는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나라의 원조를 얻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진정으로 의지할 분은 하나님 뿐이고, 진정으로 두려워할 대상도 하나님 뿐이다(13절). 그분은 “이스라엘의 두 집안” 즉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에게 있어서 “성소”인 동시에 “거치는 돌”이 될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 즉 유다 백성에게는 “함정과 올가미”가 될 것이다(14절). 하나님은 구원자인 동시에 심판자이기 때문이다. 아니, 심판자이시기에 구원자이시다. 

 

이사야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예언을 적어서 밀봉해 보관한다(16절). 유다 백성이 자신의 예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당분간 예언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자신이 예언한 대로 일이 일어나고 나면 봉인한 문서를 보여 주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입증하겠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비록 야곱의 집에서 얼굴을 돌리셔도”(17절)라는 말은 유다가 심판을 당한다는 뜻이다. 이사야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 “나는 주님을 의지하겠다”고 말한다. 심판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아이들이 “시온 산에 계시는 만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 주시는, 살아 있는 징표와 예표”(18절)라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이렇게 뚜렷한데도 사람들은 “신접한 자와 무당”(20절)을 찾아간다. “산 자의 문제에 교훈과 지시를 받으려면 죽은 자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20절)는 미신 때문이다. 이것은 신접한 자와 무당을 찾아다니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은근히 비꼬는 표현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신에 속아 짙은 흑암에 떨어질 것이다(21-22절).

 

묵상:

“이 백성이 고요히 흐르는 실로아 물은 싫어하고”(6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유다 백성의 마음을 비유적으로 묘사합니다. “실로아”는 기드론 계곡의 물을 지하 수로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끌어 들여 조성된 연못을 가리킵니다. 수로를 통해 실로암 연못으로 들어오는 물은 천천히 그리고 고요히 흘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에 대한 좋은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느리게, 조용하게, 보이지 않게 일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그 조용하고 느린 손길에 익숙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차게 넘쳐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물”(7절)을 더 좋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좀처럼 그렇게 드러나게, 신속하게, 드라마틱하게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조급해져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사람에게 의지하고 군마를 의지하며 돈의 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그 외에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무서워하지도 말아라”(12절)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그분 안에 있으면 그 무엇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심판자인 그분은 또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구원은 하나님의 두 얼굴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구원 행위의 일부입니다. 구원하실 뜻이 있기에 심판도 하십니다. 따라서 심판은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증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반증입니다. 그것을 믿기에 이사야는 “주님께서 비록 야곱의 집에서 얼굴을 돌리셔도, 나는 주님을 기다리겠다”(17절)고 고백합니다. 심판하시는 분은 또한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