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만군의 주님의 열심 (이사야서 9장)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10. 9. 05:55

해설:

1절부터 7절까지는 앗시리아에 의해 패망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다.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1절)은 이민족의 압제 하에 있던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이방 사람이 사는 갈릴리”는 모두 이스라엘의 영토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실 것이다(2절). 이민족의 압제로부터 구해 주실 것이라는 뜻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 미래를 바라보면서 기도 드린다(3-5절). 그는 미래에 일어날 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표현한다. 이것을 “예언적 완료시제”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미래애 행하실 일에 대해 이미 완료된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그 확실성을 강조하는 어법이다.

 

그 구원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다윗의 가문에서 장차 태어날 그 통치자에 대해 이사야는 네 가지의 표현을 사용한다(6절). 1) “놀라우신 조언자”(‘펠레 요아츠’, 개역개정 “기묘자, 모사”)는 탁월한 지혜를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2) “전능하신 하나님”은 ‘엘 기뽀로’의 번역인데, 백전백승의 전투력을 가진 전사를 가리킨다. 3)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아비아드’의 번역인데,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백성을 돌보는 지도자를 가리킨다. 4) “평화의 왕”은 ‘샤르 살롬‘의 번역으로서 “섬기는 왕”이라는 의미다. 

 

구원자로 오실 왕은 탁월한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으로 백성 위에 군림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어 섬길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 왕이 다스리게 되면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7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언하면서 이사야는,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8절 이하는 멸망 하기 이전의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이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앞의 예언(1-7절)보다 이전에 받은 예언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이를 것이라고 예고한다(8절). “에브라임”(9절)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스라엘 역사 후기에 에브라임 지파가 왕권과 귀족 세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사마리아”는 북왕국의 수도였다. 그들은 심판을 직면하고 있음에도 교만한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 “벽돌집이 무너지는 것“과  “뽕나무가 찍히는 것”(10절)은 왕이 살해 당하는 것에 대한 비유다. 멸망 하기 전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왕실은 모반과 암살로 인해 여섯 번이나 교체 되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데도 이스라엘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아 넣으신다(11-12절).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여전히 완고하다(13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장로와 고관들” 그리고 “거짓을 가르치는 예언자들”(14-15절)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심판에 직면한 가장 중요한 책임은 지도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16절). 하나님은 이 심판에서 사회적 약자들조차도 같은 화를 당하게 하실 것이다. 모두가 속속들이 부패해 있었기 때문이다(17절). 그들을 불태운 것은 그들 자신의 악이다(18절). 나라 전체가 불바다가 되어도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신다. 그들의 악행에 대한 진노 때문이다(19절). 극심한 환난 가운데서 그들은 서로를 물고 뜯어 자멸할 것이다(20절).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두 지파 이름이다. 이스라엘 역사는 참담한 골육상쟁의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21절). 하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다한 것이 아니다.  

   

묵상:

8절부터 21절까지 나오는 심판에 관한 예언은 주전 722년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밖으로는 주변 열강들에 의해, 내부로는 극심한 분열과 갈등으로 인해 쇠락해 가던 이스라엘은 결국 앗시리아의 공격을 받아 비참하게 멸망 됩니다. 이사야는, 그 모든 재앙이 그들의 악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그들을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그들이 택한 죄악이 그들을 불살라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되는 것을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나님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내버려 둠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노의 끝에서 취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죄악을 따라 멸망의 길을 갈 때, 하나님은 그 길로부터 우리를 돌이키기 위해 책망 하기도 하시고 호소하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끝내 돌이키지 않으려 할 때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재앙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받습니다. 탁월한 지혜와 능력으로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백성을 섬길 지도자를 보내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왕은 “공평과 정의”로 다스려 그 왕권을 영원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7절)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회복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빌로니아에게 멸망 당했던 남왕국 유다는 칠십여 년 후에 회복되었는데, 북왕국 이스라엘은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은 실패한 예언인가? 이사야가 헛 소리를 듣고 예언한 것인가?” 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이 예언이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라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예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예수께서 오신 이후의 일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하면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체포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마 4:13)고 기록합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9장 1-2절을 인용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실로, “한 아기”로 태어나신 메시아(그리스도)는 탁월한 지혜와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모두가 불경건하여 악한 일을 하고, 입으로는 어리석은 말만”(17절) 하고 살았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모두 “어둠 속에서 고통 받았고”(1절) “죽음의 그림자 가운데서”(2절) 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셨고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구원을 이루시고 부활하셔서 공평과 정의로 다스려지는 영원한 나라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그 나라의 백성이 되며 그분은 그들의 왕이 되십니다. 

 

헨델은 오라토리오 ‘메시아’에서 세 곡(10, 11, 12)을 이 장에 할애합니다. 두 곡의 베이스 영창 후에 이어지는 “우리를 위해 나셨네”(For Unto Us a Child Is Born)라는 합창은 메시아의 오심으로 인해 회복될 기쁨과 행복을 잘 표현해 놓았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그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있고, 장차 그분의 나라가 완성될 때 온전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7절)이 그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