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롬 5:12~19) / 김재홍목사

새벽지기1 2024. 6. 12. 05:59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 시대로부터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죽음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생긴 일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을 때에 생긴 일과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더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한 사람의 범죄의 결과와 같지 않습니다. 한 범죄에서는 심판이 뒤따라와서 유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마는, 많은 범죄에서는 은혜가 뒤따라와서 무죄 선언이 내려졌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왕노릇 하게 되었다면,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합니다. 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6월의 첫째 주일이며 성령강림 후 2주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기를 맞아 강단보와 스톨도 초록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령강림절기의 색깔은 초록입니다. 초록색은 성장을 상징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성장하게 하십니다. 성령강림절기 기간 동안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푸르게 푸르게 성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 군대에서 연이어 사망사고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지난 주에는 수류탄 투척 훈련 중 사고로 훈련병이 사망했고, 지난 주중에는 기합을 받던 훈련병이 사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희생자의 영혼과 그 유족을 위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군대가 한 사람 한 사람을 귀중히 여겨 지금보다 더욱 안전한 매뉴얼에 따라 훈련을 진행하고,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무리한 훈련과 작전 수행은 삼가길 바랍니다.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고, 그 한 사람은 그 부모들에게는 세상 전부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 올바른 국가란 무엇인가?


오는 목요일 6월 6일은 현충일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돌아가신 순국선혈을 감사히 기억하고 추모하는 날입니다. 식민시절 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신했던 분들과 한국전쟁 때 국가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셨던 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깊이 감사하고 그 삶과 희생을 기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현충일을 맞게 되면 자연스레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역사적 고통과 반성’에 대한 생각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하지 않았다면 독립을 위해 죽어간 이들도 없었을 것이고, 식민지배 이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분단도 없었을 것이고, 분단 이후 동족 간 잔혹한 전쟁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준 폐해는 어마어마해서 계산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백 번 천 번 우리가 됐다고 할 때까지 사죄함이 마땅합니다. 일본에서 활동하시다가 작년에 돌아가신 서경식 선생님은 ‘기억투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인간의 역사라는 것이 늘 승자 중심의 역사라 약자의 고통은 잘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약자는 기억투쟁을 해야 하고, 약자의 기억투쟁을 통해 역사가 바로잡힐 때 인류는 과거의 아픔을 딛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충일이 되면 ‘올바른 국가란 어떤 국가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국가는 순기능도 하지만 역기능도 합니다. 보통 ‘국’자가 들어가는 주의(이즘)들은 위험합니다. 자기 나라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만을 가장 뛰어난 것으로 믿고 다른 나라와 민족을 배척하는 ‘국수주의’, 국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군사력에 두고 전쟁준비를 최상위에 두는 ‘군국주의’, 우월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정복하는 ‘제국주의’. 이런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주의들은 국가 간에 긴장을 높이고 갈등을 빚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한 국가 내에서도 국가의 의미를 과도하게 강조할 때 개인의 자유가 희생될 위험이 있습니다.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가 그런 경우입니다. 이런 많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계속 존속할 것입니다. 많은 순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홉스가 말한 것처럼 국가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어느 정도 조정할 수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 간, 개인과 집단 간, 집단과 집단 간의 분쟁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는 다른 국가와 민족의 공격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 성경의 국가관


성경에 나와 있는 국가관을 구약, 복음서, 서신서 3곳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8장에 보면, 부족연합 형태로 있던 이스라엘이 왕정 국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모습이 나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찾아와 말합니다.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 왕정국가,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세워달라는 요구입니다. 사무엘은 그들에게 왕이 다스리게 되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설명해 줍니다. ‘왕은 당신들의 아들들을 군인으로 쓸 것입니다. 왕은 당신들의 딸들을 데려다가 요리를 만들게 할 겁니다. 또한 당신들의 밭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신하들에게 줄 겁니다. 그리고 세금도 거두어갈 것이고, 마침내 당신들은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당신들은 왕 때문에 울부짖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은 왕국국가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는 왕정국가에 대한 사무엘 선지자의 부정적 예언이라기보다는 왕정국가를 겪었던 사람들의 부정적 평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정의 역사를 기록한 열왕기와 역대기는 대부분의 왕들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 중에 긍정적 평가를 받은 왕은 극소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왕정의 쓰라림과 더불어 앗수르와 바벨론과 같은 제국의 폭력적 지배를 맛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왕정과 제국의 지배하에 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으며 이상국가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는 예언자들에 의해 선포되었는데,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진 나라,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로마제국의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과 빌라도 사이에 여러 말이 오고갑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요?”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내가 왕이오.” 이는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습니다. 엄연히 유대의 왕이 있고, 로마의 황제가 있는데, 자신이 왕이라니요. 예수님은 위험한 발언 이후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는 진리가 제일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로고스-말씀이고,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이고, 하나님의 계명 중 제일 중요한 계명은 ‘사랑’입니다.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는 사랑의 나라였고, 예수님은 그 사랑의 나라의 왕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의 나라는 유대와도 달랐고 로마와도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은 유대의 왕과도 달랐고 로마의 황제와도 달랐습니다. 세상의 나라와 왕들은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지배함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으려했지만, 사랑의 나라와 예수님은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을 섬김으로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지배하려는 권력 vs 섬기려는 사랑. 다른 나라와 그 왕들과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었습니다.

서신서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은 교회 내에서 음식문제로 다투던 이들을 화해시키기 위한 권면을 하던 중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17절) 여기서 ‘먹고 마시는 일’이란 단순한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율법의 문제였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먹고 마실 수 있는 것들이 한정되어 있었고 그것을 어기는 자는 부정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율법은 세상의 여느 권력처럼 지배하려는 권력이 되어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배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의와 평화와 기쁨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의’는 하나님의 의롭게 여겨 주심, 즉 은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 누구보다 율법을 강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앞세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던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일에 동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회심 후 그때의 일을 몇 번이고 아프게 회상했을 것입니다. 회상할 때마다 자신의 폭력성과 율법의 불완전성과 폭력성에 대해서 깊이 반성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사랑과 은혜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했고 가는 곳마다 교회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사랑과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과 함께 평화를 누리고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사랑과 은혜를 통해 평화와 기쁨을 맛보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했습니다. 바울은 우선 아담에 대해 말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이가 유죄판결을 받게 되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 한 사람의 은혜로 많은 이가 생명을 얻게 되었다. 예수님 한 사람의 은혜로 많은 이에게 무죄 선언이 내려졌다.’ 바울이 복음을 설명하던 중 아담을 언급한 이유는 예수님 한 사람에게 시작된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이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아담 한 사람의 죄가 모든 인간에게 죽음과 죄의 세상, 즉 율법의 나라를 가져온 것처럼, 예수님 한 사람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은혜의 세상, 즉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아담과 율법의 세상이 아닌 그와 전혀 다른 세상, 다른 나라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은 바울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들은 적이 없다.’, ‘이와 같은 일을 본 적이 없다’, ‘이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에 없던 나라 그러나 말씀과 예언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전해 내려오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존재자체가 하나의 다른 세상, 다른 나라였습니다. 여기서 ‘다른’은 ‘새로움’보다는 ‘참’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참 세상, 하나님의 세상,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만나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되어 주고 하나님 나라를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일까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 우리가 마음에 담은 것만을 다른 이에게 보여줄 수 있고 전해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사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당신의 마음에 품고 사셨습니다. 그러셨기에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그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인생은 아름다워> La vita é bella.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97년에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입니다. 로베르토 베니니가 감독하고 주연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가 배경입니다. 유대인 청년 귀도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아주 낭만적인 연애 끝에 결혼하여 조슈아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유대인인 귀도의 가족을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귀도는 아들을 달래기 위해 무자비한 수용소 생활이 사실은 게임이라고, 게임에서 1,000점을 따 이기면 상으로 탱크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조슈아는 그 말을 믿고 힘든 수용소 생활을 견뎌나갔습니다. 어느 날 귀도는 군인들이 수용소의 수감자들을 모두 죽일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귀도는 아들을 안전한 곳에 숨긴 뒤 아내를 찾기 위해 수용소의 이곳저곳을 돌다가 경비병에게 걸리고 맙니다. 경비병은 귀도를 죽이기 위해 귀도를 건물 뒤편으로 걸어가게 했습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그 순간 귀도는 은신처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아들을 보았습니다. 귀도는 아들이 겁먹지 않도록 그 상황 자체도 게임인 것처럼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쾌활한 모습을 보이며 걸어갔습니다. 결국 귀도는 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총살을 당해 죽었습니다. 조슈아는 아버지가 죽은 것을 모른 채 밤새 은신처에 숨어 있다가 다음날 아침을 맞았습니다. 연합군이 탱크를 몰고 수용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조슈아는 엄마와 무사히 재회합니다. 영화 끝에 성년이 된 조슈아의 말이 나옵니다. 조슈아는 이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라고, 아버지의 희생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었다고 말하며 영화는 끝납니다. 아버지의 희생만이 선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면서까지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가르쳐주신 아버지의 가르침 또한 그의 평생 길과 힘이 되는 귀한 선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배하려는 권력과 정죄와 심판과 증오가 난무하는 전쟁 같은 세상이라도 그 누군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평화와 기쁨을 전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자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도 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그 증거이십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아담의 나라도, 율법의 나라도 한 사람을 통해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디 율법의 나라의 통로가 되어 살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통로가 되어 살길 바랍니다. 불의한 권력과 정죄와 심판과 증오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그런 것만 바라보며 살지 맙시다. 사랑과 은혜와 평화와 기쁨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삽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슴에 품고 삽시다. 우리 한 명 한 명이 하나님의 나라가 됩시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이 세상은 좀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 귀한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