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벽의 반대말 (고전 9:19~23) / 김재홍목사

새벽지기1 2024. 6. 26. 05:45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1. 난민과 장벽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길 빕니다. 이번 주 목요일인 6월 20일은 세계난민의 날입니다. 고국을 떠나 북간도 용정에서 나고 자랐던 윤동주 시인이 열여덟 살에 쓴 <고향집>이라는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헌 짚신짝 끌고 /

나 여기 왜 왔노 /

두만강을 건너서 /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엔 /

따뜻한 내고향 /

내 어머니 계신 곳 /

그리운 고향집


따뜻한 남쪽 조선땅에서 살다가 북간도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 세대를 생각하며 쓴 시입니다. 우리도 일제 식민지배 시절과 한국전쟁 당시에 많은 이들이 윤동주 시인의 가족처럼 난민이 되어 고향과 고국을 떠나 세계 곳곳에 흩어져 힘겹게 살아야 했던 슬픈 역사가 있습니다. 현재 시리아는 13년 넘게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내전으로 시작된 전쟁이 국제전이 되었습니다. 시리아 난민은 1,200만 명이 넘었습니다. 방글라데시아로 넘어 온 로힝야 난민은 100만 명에 이릅니다. 구테타를 일으킨 군사정권에 의해 탄압 당하고 있는 미얀마에서도 난민의 상황에 처한 이들이 3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은 800만 명에 이릅니다. 현재 아프리카를 포함해 전쟁과 기근 등으로 자기의 고향과 고국을 떠나 나그네가 되어 세계를 떠도는 난민의 숫자가 2022년말 기준으로 1억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저의 지인 중에는 시리아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은 압둘 와합인데 저희 교회에도 몇 번 온 적이 있습니다. 몇 년 동안 시리아 난민 돕기 행사에 참여했는데 거기서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말을 잘합니다. 얼마 전 한국으로 귀화해서 ‘한국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전혀 교류가 없는 한국과 시리아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오래 전에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러던 중 시리아 전쟁이 터졌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악화되었습니다. 와합의 집안은 명망이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IS가 그 지역을 장악하면서 모든 것은 내려놓고 나와야 했습니다. 와합의 식구들은 난민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공부 중이었던 와합은 전화통화를 통해 수시로 가족의 안전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족과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이 넘도록 와합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근심과 걱정 속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때 와합의 아버지와 어머니, 임신 중이었던 여동생을 포함한 가족들은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빗물만 받아 마시며 총탄과 포탄을 피해 시리아 국경을 넘어 튀르키예로 탈출했다고 합니다. 가족과 통화를 하고 나서야 와합은 마음을 놓았습니다. 와합은 가끔 말합니다. 시리아 고향집이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멀지 않다고, 전쟁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초대하겠다고, 같이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물놀이하며 수박을 먹자고. 시리아 수박이 참 맛있다고. 그런 날이 속히 오면 좋겠습니다.

유럽연합이 점점 우경화 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치러진 선거에서 극우정당이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코로나 펜데믹의 여파와 기후위기와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유럽의 각국이 이전보다 이기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은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자기중심의 선택을 하게 되어 있지요. 유럽연합의 여러 나라는 난민과 이민자들에 대한 인류애적 책임을 점점 외면할 것입니다. 이미 세계 대부분의 나라는 난민과 이민자에 대해 문턱을 높이고 있습니다. 문턱을 높이는 것을 넘어서 아예 분리장벽을 세운 나라들이 있지요. 지금 전쟁 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 그리고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는 거대한 분리장벽이 놓여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둘레에 분리장벽을 세워 가자지구를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더니 이제는 가장 거대한 학살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기후재앙은 한 해 한 해 갈수록 더욱 심각해질 것이고 국제사회의 결속력은 점점 악화될 것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기후재앙의 강도가 커지면 곡물 수확량이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고, 곡물 수확량이 급격하게 줄어들면, 세계 곳곳에서 식량확보를 위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예측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윤동주의 가족과 와합의 가족과 같은 난민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고, 우리 또한 그 중에 하나가 될 수도 있습니다.

2. 장벽과 복음


초대교회를 구성했던 그룹은 크게 두 그룹이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과 헬라 기독교인. 그 둘은 모두 난민이었습니다. 주후 70년 이스라엘이 로마에 멸망당한 후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난민이 된 것이지요. 유대 기독교인은 유대인이었지만 예수를 구세주로 믿었기에 유대 회당공동체에서도 쫓겨났습니다. 유대 기독교인은 난민 중에 난민이었습니다. 그리고 헬라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헬라 사회 속에서 난민적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황제숭배와 같은 주류적 흐름에서 벗어났기에 온갖 위험과 불이익을 감수하며 소수자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어려운 시대를 살며 같은 믿음을 가진 이들, 유대 기독교인과 헬라 기독교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깊은 일치를 이루며 서로 도우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디얼한 이상이었지 현실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목표였습니다. 성경에 등장한 초대교회 중 유대 기독교인과 헬라 기독교인 사이에 갈등이 없던 교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같은 믿음도 인종, 국적,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구원도 인종, 국적, 문화라는 장벽 앞에서 힘을 잃었습니다. 믿음과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구원이 무력한 것이 아닙니다. 인종, 국적, 문화라는 장벽이 그만큼 높고 힘이 쎘던 겁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19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매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이었기에 종이 아니라 자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하나의 룰에 얽어맸습니다. 그 룰은 이것이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그에게 맞는 사람이 되어 주자’. 유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이 되어 주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이 되어 주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되어 주고, 율법 없는 사람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는 약한 사람이 되어 주고,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되어 주었습니다. 바울은 그 룰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복음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결코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태도를 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전하기 위해, 인종과 율법이라는 비본질을 버린 것입니다. 너를 구원하기 위해 나를 내려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을 내려놓고 인간이 되신 것처럼, 우리 또한 너를 구원하기 위해 나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결코 말로만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그에게 맞는 사람이 되어 줌’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전해야 합니다. 아니, 복음은 그럴 때만 전해집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인간적 본능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가 나에게 맞추어 주기를 바라지 내가 그에게 맞추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우리에게 ‘누구를 만나든지 그에게 맞는 사람이 되어 주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말씀이 그 말씀이었습니다. ‘주린 자를 만나면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를 만나면 그에게 마실 것을 주고, 헐벗은 자를 만나면 그에게 입을 것을 주고, 외로운 이를 만나면 그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라.’ 내가 그에게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게 복음이 아니라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때 복음은 전해집니다. 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에게 그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줄 때 복음은 전해집니다. 그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가 그것을 수용하도록 자꾸 강요할 때, 혹은 그 반대로 그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을 내가 줄 수 있음에도 주지 않을 때, 그와 나 사이에는 벽이 생깁니다.

3. 벽의 반대말


나희덕 시인의 <예술의 주름>이란 책에 나오는 인물 중 아녜스 바르다가 있습니다. 그는 사진작가이며 영화감독입니다. 아주 독창적이고 감성적이며 사회적 메시지가 많이 담긴 사진을 찍고 영화를 만든 사람입니다. 공장 노동자들의 전신사진을 찍어 크게 확대출력해서 건물에 붙이기도 하고, 항만 컨테이너 작업자들의 아내 사진을 크게 현상해 화물 컨테이너에 붙여 그들의 존재감을 높여 주는 작업을 한 바도 있습니다. 바르다는 평생 주로 해변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연출한 영화에는 바다와 해변이 자주 등장합니다. 바르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벽의 반대말은 해변이에요” 바르다는 사진과 영화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벽이 많은 사회에 맞서 무한히 열린 사회를 꿈꾼 것입니다. “벽의 반대말은 해변이에요.”라는 말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여러분은 ‘벽의 반대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벽의 반대말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벽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벽의 반대말 같은 사람, 해변과 같은 사람, 바다와 같은 사람도 있는 겁니다.

예능 프로그램의 한 장면입니다. 수영장 바로 앞에 사람이 서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앞으로 큰 스티로폼으로 만든 벽이 점점 다가옵니다. 다행히 그 스티롬폼 벽에는 사람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구멍과 같은 포즈를 취하면 스티롬폼 벽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스티로폼 벽이 다가올 때까지 그 포즈를 취하지 못하면 그대로 벽에 밀려 수영장에 빠지고 맙니다. 그 구멍에 맞는 모양을 취하지 못해 그냥 수영장에 빠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우스워 보여 웃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생각이 떠올라 웃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멍 하나 없는 거대한 벽에 밀려 삶의 벼랑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아프게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생각도 떠올랐습니다. 아무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 없어 거대한 벽 앞에 홀로 서 있다 느낄 때, 내게 다가와 함께 아파해준 사람, 나의 마음 모양과 같은 모양의 마음으로 나를 대해 준 사람, 그 덕에 내 앞에 있던 벽을 지나갈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이방인이라고, 할례 받지 못했다고, 병자라고, 율법을 어겼다고 세상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혀 사람 취급 받지 못하던 이들, 사방이 벽에 둘러싸인 것 같은 암담한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공감共感이라는 말은 너의 마음과 나의 마음을 같은 마음으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공감이 벽을 허뭅니다. 벽의 반대말, 그것은 공감이며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세계에서 난민을 가장 많이 수용한 나라는 튀르키예입니다. 그 뒤로 이란, 콜롬비아, 독일, 파키스탄이 있습니다. 독일을 빼고는 대부분이 소위 잘 사는 나라들이 아닙니다. 인심은 꼭 곡간에서 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2022년 한 해 동안 한국에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은 11,539명이었습니다. 그중에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사람은 141명에 그쳤습니다. 난민 인정률 2.6%. OECD 국가 중 꼴찌였습니다. 독일은 지난 10년간 무려 927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였습니다. 현재 독일은 출생자 숫자보다 이주민 숫자가 훨씬 많습니다. 베를린 주정부 이민정책 담당관 카트리나 뉴에잘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기자는 카트리나에게 이민자와 난민이 많아지며 독일의 정체성이 흔들릴까 두렵지 않느냐? 질문했습니다. 이에 대해 카트리나는 ‘독일의 정체성이 무엇이죠?’ 반문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누구나 이 나라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독일인입니다. 이 나라의 가치를 이해하면 그 사람이 독일인입니다. 게르만족만이 독일인이 아닙니다. 순수 독일혈통만이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수백만 명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혈통이 애국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독일 헌법과 정신과 누구나 지키는 기본법이 독일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누구나 지키는 기본법, 누구나 지켜야 하는 기본법은 공감입니다.

벽은 완고합니다. 인종, 동족, 문화라는 장벽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입니다. 아주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뿌리가 깊습니다. 그 장벽은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더 높아지고 더 두꺼워집니다. 예수님은 그 벽을 허물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 벽을 허물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과 바울 또한 그 길을 갔습니다. 우리들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안 그래도 벽이 많은 세상입니다. 또 하나의 벽이 되어 살지 맙시다. ‘벽’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아니라, ‘벽의 반대말’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되어 삽시다. 어려움에 처한 이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고 공감하며 삽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받아들이라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며 삽시다. 우리가 서로에게 벽이 아니라 해변과 바다가 되어 줄 수 있다면 그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 귀한 일을 기쁘고 기꺼운 마음으로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