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주님의 일은 하나다.(눅 10:38~42)

새벽지기1 2024. 7. 10. 05:55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화성 배터리 제조공장 화재로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과 그 유족 위에도 주님의 위로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사고가 나기 이틀 전에도 화재가 있었고, 사고 3주 전 소방 당국이 현장점검을 나와 화재에 대비해 대형소화기 비치를 권고한 바 있었다고 합니다. 막을 수 있었던 사고였고, 막아야만 했던 사고였습니다. 사망자 23명 부상자 8명. 사망자는 한국인 5명, 중국인 17명, 라오스인 1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이 단기이주 일용직 노동자들이었고 저마다 꿈을 안고 한국에 와서 열심히 성실히 일하던 이들이었습니다. 배터리 상자에 불이 붙었는데 대피하지 않고 회사의 재산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배터리 상자부터 옆으로 옮기던 분들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습니다. 일용직으로 와서 그렇게 착한 마음을 가지고 일하셨던 분들인데 너무 안타깝습니다. 정확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통해 그와 같은 사고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 해의 절반을 보내고


오늘은 6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어느새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갔습니다. 시간 참 빠릅니다. 6월 마지막 주일을 맞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열심히 한다고는 했는데 잘 해온 것인지? 일에만 열중하다가 방향을 잃었던 것은 아닌지? 놓치지 말아야 할 본질은 잘 붙들고 있는가?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돌아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화성 배터리 공장 사고사처럼 일터에서 죽음을 맞는 노동자가 여전히 많습니다. 건설산업 노동자 사망자 수는 OECD 국가 중 1위입니다. 평균의 세 배 이상 높습니다. 아침에 출근은 했지만 퇴근을 하지 못하고 사망한 노동자는 2024년 1분기에만 138명이었습니다. 1달에 46명, 하루에 1.5명의 노동자가 죽었습니다. 우울증은 전에 말씀드렸듯이 OECD국가들 중 부동의 1위입니다. 환경문제 또한 심각합니다. 지난 6월초 기온은 역대급으로 가장 높은 온도였습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역대급’ ‘기상관측이래’ ‘기록적’이라는 날씨 보도를 자주 듣게 될 것입니다. <조율>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절로 입안에서 우물거려집니다. “가는 곳 모르면서 그저 달리고만 있었던 거야...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지금 우리 사회는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던 첫 세상에서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조율이, 치유하심이, 어루만져 주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라는 책에서 현대사회를 ‘멀티태스킹 사회’라고 명명했습니다. ‘멀티태스킹’,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걸으면서 휴대폰 보고, 밥 먹으면서 휴대폰 보고. 그런데 한병철은 멀티태스킹은 본디 원시 수렵 사회의 모습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열매를 먹거나 물을 마시는 것 같은 삶의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행위를 하면서도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두려움 속에서 늘 주위를 경계를 해야 했던 원시 수렵 사회와 오늘의 사회가 비슷하다는 겁니다. 참 슬픕니다. 원시사회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계몽과 발전의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데 삶의 양상은 원시사회와 같은 겁니다. 오늘 우리사회는 멀티태스킹,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능력으로 인정받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한병철은 그런 멀티태스킹에 대한 강조는 인간을 비인간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 번에 수행해야 하는 일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인간은 능률적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상실하게 되고 도구화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멀티태스킹의 삶’ 어르신들께는 약간 어려운 말일 수 있겠습니다만,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과도하게 바쁘게 여러 일을 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과도할 정도로 바쁘고 분주하게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열심히는 살지만, 늘 불안하고 불만족스럽고 안정감 없이 가는 곳 모르면서 그저 달리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자신과 사회를 살펴야 합니다.

2. 마음이 이탈한 마르다


누가복음 10장에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나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마르다는 마리아의 언니이고 나사로는 이 둘의 오빠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에서 살았고 예수님과 무척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을 집에 손님으로 모셨으니 급히 해야 할일이 많았습니다. 음식, 마실 것, 이후에 잠자리까지 손님 접대를 위해 준비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었을 겁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에 자기 옆에 딱 붙어 일손을 보태야 하는 여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가까이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치 손님 중 하나처럼, 제자 중에 하나처럼. 마르다 속에서는 화가 올라왔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마리아를 향해서 “마리아, 너 여기서 뭐하고 있니. 어서 빨리 와서 언니를 도와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르다의 분노는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께로 향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 힘든 상황에서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마리아와 예수님 딱 둘뿐인데, 마리아는 자기 혼자 편안하게 예수님 옆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고, 예수님은 그런 철없는 마리아를 꾸짖어 자기를 돕게 한 말씀해 주셔야 하는데 안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에게도 화가 나고 예수님에게도 화가 나고 서운했던 것입니다.

“아이쿠, 마르다, 내가 그걸 몰랐네. 미안하네. 마리아야, 너도 이제 그만 일어나 언니를 좀 도와주렴.”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르다가 들었을 때 서운할 만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단 예수님은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 부르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것은 결코 좋은 싸인이 아니지요. 그것 자체로 꾸짖음이 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기껏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했는데 예수님은 마르다의 많은 수고와 헌신을 ‘많은 일로 인한 염려와 들뜸’이라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정작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만 들었던 마리아가 마르다보다 더 좋은 일한 것이고 마리아는 계속 앉아서 말씀을 듣게 할 것이다,라는 의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은 마르다의 수고와 헌신을 가볍게 여기셨으며 마리아의 선택만을 칭찬하셨던 것일까요? 어떤 이들은 이 본문에서 ‘몸으로 하는 수고와 헌신보다 말씀 들음이 중요하다’라는 공식을 도출해 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그런 의도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손님을 집에 초대하고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 주님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그네를 초대하고 대접하는 일은 율법이 명한 일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나그네를 초대하고 대접하다가 하나님을 대접한 일이 있었지요. 나그네를 초대하고 대접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것 또한 분명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차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손님 대접과 말씀 들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은 그런 외적인 차이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마르다를 꾸짖으실 때 ‘마르다의 마음이 많은 일로 염려하고 들떠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들떠 있다’는 표현을 NIV 성경에서는 upset이라고 번역했습니다. upset은 ‘틀어지다’는 뜻입니다. 마르다의 마음이 본래의 자리를 이탈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예수님께 대해 분노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에 반해 마리아는 내내 하나의 마음,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 하나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일은 말씀 듣는 일 하나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은 하나인데, 그것은 서로를 향해 사랑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고 그것을 변치 않고 간직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르다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계속 간직한 채 예수님 접대를 준비했다면 마르다도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깨달아 본래 마음을 회복하고 접대를 준비하러 갔을지도 모릅니다.

3. 주님의 일은 하나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와 율법준수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사람들로 많은 제물을 바치게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로 많은 율법규율을 지키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제사장을 통해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 여러 제사를 드렸고 그에 필요한 제물을 바쳤습니다. 사람들은 바리새인을 통해 율법강해를 들었고 율법 조문 하나하나를 외우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그들은 자칭타칭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사람들에게서 제물을 팔아 막대한 돈을 벌여 들였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율법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여러 가지 외형적인 종교규율들로 드러내려 애쓴 이유는 자신들 속에 하나님 일의 본질인 사랑이 없음을 감추기 위한 노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정반대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제사와 제물드림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을 앞세워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하나님의 일은 하나였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해주는 것, 그것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사람들이 당신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임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사실 그게 정말 힘든 일입니다. 제사와 율법 준수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저에게 하나님의 일을 해준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저와 맺은 관계의 형태가 다양했습니다. 가족, 친척, 선생님, 친구, 여행에서 만난 동행 등 다양했습니다. 그분들이 저에게 해 준 일도 다양했습니다. 어떤 분은 저를 위해 밤이고 낮이고 평생 기도해 주셨고, 어떤 분은 저에게 신앙인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 주셨고, 어떤 분은 제가 어려운 시간을 보낼 때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제가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해 주셨고, 어떤 분은 자존감이 그리 높지 않은 저에게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라고 꾸준히 진심으로 격려해 주었고, 어떤 분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저를 마치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처럼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 주었습니다. 관계의 형태도 다양하고 그분들이 저에게 해 주신 일도 다양했지만, 그분들이 저에게 주신 마음은 똑같았습니다. 그분들은 저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사실 모든 일은 주님의 일입니다. 어떤 일 한 가지만 주님의 일일 수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목회, 성직만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면서 사회에서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행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일입니다. 어느 일 하나도 거기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주창한 ‘만인제사장론’이 그것입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고,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제사장입니다.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라는 말씀은 ‘주님의 일은 한 종류의 일뿐이다’라는 말이 아니라 ‘모든 일 속에 꼭 있어야 하는 하나의 마음, 태도, 원리가 있다’는 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모든 일 속에 꼭 있어야 하는 하나의 마음, 태도, 원리.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 일이 사랑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일은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제아무리 그럴싸해 보이고, 종교적이고 거룩해 보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 사랑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화재가 났던 화성 배터리 공장에 없던 것은 대형소화기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사랑은 결코 추상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곳의 고용주가 피고용자를 위해서 반드시 실행했어야 하는 대형소화기 구비, 철저한 안전교육, 화재대피 훈련 그 모두가 사랑이었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일을 하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합니다. 모든 일 안에 사랑을 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공장도 거룩한 장소가 될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성전도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감당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일 중요한 한 가지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마르다처럼 사랑의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마음이 본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때때로 여러 일로 마음이 흔들리더라도 다시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어떤 이들처럼 사랑의 마음 하나 없이, 겉으로는 온갖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하나 없이 사람을 수단화하거나 도구화하며 살지 맙시다. 예수님처럼 무슨 일을 하든 사랑의 마음으로 행합시다. 누구를 만나든 그에게 사랑을 전하려 노력합시다.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행해야 할 유일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는 만큼 이 세상은 생명과 평화의 세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주의 도우심으로 늘 하나님의 일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