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어려움을 양분 삼아 (고후 12:7~10) / 김재홍목사

새벽지기1 2024. 7. 18. 06:53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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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두운 전망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큰 폭우 피해를 입은 이들 위에도 주님의 위로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주중에 충청, 전라, 경상권에 큰 비가 내렸습니다. 7월 10일 수요일에 군산에는 1시간 동안 131.7mm가 내렸습니다. 이는 기상관측 이래 시간당 최대 강우량이었습니다. 삽시간에 물이 불었습니다. 논과 밭과 길과 집안까지 흙탕물이 가득 찼습니다. 6명이 사망하고 1명이 실종되었습니다. 주님께서 희생자들의 영혼과 유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재민들이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 다시 일상을 회복하기까지 얼마나 힘이 드실까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뉴스 보도를 보면서 또 이런 걱정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비가 반지하 주택이 많은 지역에 내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관계 당국은 대비를 하고 있을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는 말을 또 듣게 되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기후 재앙 시대에 맞는 대책을 수립해 귀한 생명이 안타깝게 희생되는 일이 더 이상 없길 바랍니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나고 새로운 절반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시작이니 희망을 가지고 시작하면 좋겠는데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경제전문가들은 세계경기는 전반기와 마찬가지로 침체 양상을 보일 것이라 전망하고 있습니다. 경기가 좋아질 기미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지난 주중에 미국 워싱턴에서 나토 정상회의가 있었습니다. 이에 러시아는 회의 전날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포함한 5개 도시를 폭격했습니다. 3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키이우에 있는 어린이 병원도 폭격당했습니다. 미국은 독일에 러시아 타격이 가능한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했고, 러시아는 이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예고했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영구 휴전을 원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휴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가자지구를 계속 폭격하고 있습니다. 최근 이란의 개입 가능성이 커지면서 세계가 긴장하고 있습니다. 11월에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도 있는데 두 후보자의 지지도가 비슷해 누가 당선되든 큰 혼란이 예상됩니다. 국내 전망도 밝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마을이 내일과 희망이 있는 마을이라는데 우리나라의 출생률은 0.72명, 세계 꼴찌입니다. 집값이 현실화되어 젊은 세대가 내 집 마련의 꿈을 가질 수 있을 때 출생률은 올라갈 것입니다. 물가 또한 너무 높습니다. 사회와 경제가 불안정할 때 누구보다도 앞서 안정화에 힘써야 할 정치인들이 가장 큰 혼란, 카오스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여당과 야당은 국민을 위한 협치는 뒷전으로 미루고 늘 서로를 죽일 듯이 싸우고 있습니다. 아빠 엄마가 매일 싸우는 집안의 아이들이 늘 불안 속에서 살아가듯 우리나라 국민들은 불안이 일상화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동하는 공포’, 요즘 제가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며 곱씹고 있는 말입니다. 공포가, 불안감이 세계와 사회 곳곳에, 사람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액체처럼 둥둥 떠다닙니다. ‘유동하는 공포’라는 말은 세계적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용어입니다. 인류는 근대에 이르러 종교의 지배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을 주체적으로 계획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만든 여러 사회안전장치들은 전쟁, 글로벌 금융위기, 기후위기,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재앙 앞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겪는 어려움은 인간이 만든 사회안전장치들로 완전히 통제되지 않았습니다. 현재는 늘 불안하고 미래는 늘 불확실합니다. 현재의 불안과 미래의 불확실함은 공포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 공포는 인간을 작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바우만은 사람들의 불안감을 부추기기 위해 유동하는 공포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재론적 불완전함과 미약함을 인정하자는 말이며,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전 지구가 협력하자는 말입니다.

2. 어려움과 연약함의 양면성


고린도교회는 오늘의 그리스 코린토스 지역에 있던 교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린도전후서를 읽어보아서 알지만, 고린도교회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교회 자체적으로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어서 에베소에 머물고 있던 바울에게 서신을 보내, 문제의 해결책을 구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문제에 답하기 위해 보낸 서신들이 고린도전후서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싸운 이유 중에는 바울에게 사도적 권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바울은 12사도 중에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앞세워 자신의 적대자들을 제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사람들이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깎아내리면 보통은 그에 맞서 자기를 높이려는 게 일반적인 모습인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적대자들이 들으면 좋아할만한 자기의 연약한 점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은 자신을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가시라고 말했습니다. 그 가시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그것은 바울의 육체적인 질병을 말한 것이다, 어떤 이는 바울이 반복적으로 겪은 육체적인 유혹을 말한 것이다, 어떤 이는 바울의 적대자를 말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가시’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가시’에 대한 바울의 이중적 묘사입니다. 바울은 분명 그 가시를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했는데, 그 가시를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는데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이 살면서 경험하는 어려움은 참 다양합니다. 육신의 질병, 정신적 스트레스, 관계 문제, 경제적 빈곤, 사랑하는 이의 죽음 등등. 어려움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그 어려움이 우리에게 일으키는 일은 동일합니다. 어려움은 우리를 연약하게,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어려움과 그 어려움이 내 안에서 일으키는 연약함에는 언제나 양면성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일 수도 있고 사탄이 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연약함은 단지 힘들고 불편한 것을 넘어 나의 몸과 정신을 지배합니다. 뭔가를 해보려 할 때마다 이내 그 연약함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나의 연약함은 내게 거의 신과 같습니다. 내 힘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바울이 자기 속에 있는 연약함을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도저히 혼자의 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 반복될 때 우리는 절망하거나 자기 자신을 비하하거나 그 절망적 현실에서 순간적으로 도피하기 위해 어떤 자극적인 것에 중독되기도 합니다. 또 나의 어려움과 연약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표출하기도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자기의 생각만큼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분노하거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계속해서 불평을 쏟아내거나 생 자체를 저주하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에 어려움과 연약함은 말 그대로 악마가 준 것이 되고 그 어려움과 연약함이 사탄의 하수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사탄의 하수인이 됩니다. 사탄이 준 가시에 짓눌려 자기 자신이 또 하나의 가시가 되어 자신과 주변 사람을 계속 아프게 찌르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처럼 자신에게 찾아온 어려움과 그것이 내 안에 일으킨 연약함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아들일 때는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 가시의 유익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가시로 인해 자신이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다고. 바울은 그 가시로 인해 겸손해졌습니다. 겸손은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긍정하고 인정하는 겁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긍정하고 인정하며 사는 사람은 다른 이의 연약함도 헤아리며 살아갑니다. 자기의 힘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연약함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기에 ‘내가 힘들 듯이 저 또한 힘들겠구나’, ‘나에게 나의 인생 가시가 있듯이 저에게도 저만의 인생 가시가 있겠구나’라며 그의 연약함을 헤아려보게 되고 결국 그런 헤아림은 그를 향한 배려와 관심과 사랑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연약함이 하나님이 주신 연약함입니다. 어려움을 겪은 이가 그 이후에 오직 강함만을 추구하며 사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움을 겪어보니 정말 힘들었고 두 번 다시 그런 어려움을 겪고 싶지 않으니 강해져야겠다 마음먹었겠지요. 그런데 그런 강함에 대한 추구가 다른 이들에 대해 경쟁적 태도나 지배하려는 모습으로 드러나면 안 됩니다. 그런 강함에 대한 추구로 그 자신은 강해질 수 있을지 몰라도 그로인해 다른 누군가는 어려움과 아픔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내 아픔과 연약함으로 인해 너의 아픔과 연약함을 헤아리는 자리로 나가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온전한 존재가 되는 길입니다. 10절에서 ‘내가 약할 그때에 오히려 내가 강해진다’라고 말한 이유도 그와 같습니다. 여기서 앞에 나온 ‘나’는 ‘강해지려고만 하는 나’이고 뒤에 나온 ‘나’는 ‘주님 안에서 온전해진 우리’입니다. 강해지려고만 하는 내가 약해질 때 우리 모두의 온전함은 강해집니다.

3. 어려움을 양분 삼아


소설가 최은영은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 강압과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멀리 떠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최은영은 소설 뒤에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나의 (개인)행동은 아무도 해치지 않으리라 믿었다. 나는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주는 고통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몸으로 느꼈으니까. 그러나 그랬을까, 내가.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 오래도록 나는 그 사실을 곱씹었다. 의도의 유무를 떠나 해를 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나, 때때로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무심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 나. … 나쁜 어른, 나쁜 작가가 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쉽게 말고 어렵게, 편하게 말고 불편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고통을 겪어 보았기에 남에게 그런 고통을 주지 않으며 살겠다 작정했지만 나 또한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은 아프지만 건강한 자각입니다. 그런 자각에 이를 때에라야 우리는 나를 위해 쉽고 편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해 어렵고 불편한 일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서로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는 것을 넘어 서로에게 기댈만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제주도에는 신화가 많습니다. 설문대 할망 신화가 제일 유명하죠. 설문대 할망은 거인으로 제주를 창조한 신입니다. 어찌나 큰 지 제주 바다는 무릎밖에 차지 않았고 한라산을 베개로 삼고 성산일출봉을 빨래통 삼아 빨래를 했습니다. 치맛폭에 흙을 담아 나르다 옷에 난 구멍으로 흙덩이를 떨어트린 것이 360여 개의 오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주에서는 신화를 세상의 근본 내력을 풀어낸 이야기라는 뜻에서 ‘본풀이’라고 합니다. 본풀이에는 열두 본풀이가 있습니다. 그중 절반은 여성이 주인공입니다. 영웅서사가 보통 그렇듯이 제주 신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여성들도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 어려서는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커서는 사랑하던 사람에게 버림받고, 고된 일도 많이 하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깁니다. 자청비 또한 많은 환난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세상에서뿐 아니라 하늘나라까지 올라가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 공로로 하늘님은 자청비에게 상으로 하늘의 땅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청비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늘나라의 땅은 저에게 너무 과분합니다. 꼭 저에게 상을 주시려거든 오곡의 씨앗을 내려주십시오. 인간 세상을 위해 저 넓은 들녘을 풍요롭게 하고 싶습니다.” 자청비는 제주도의 농경을 관장하는 여신이 됩니다.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지요.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그로인해 강해지려고만 하거나 이기적인 존재로 변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움을 겪어보았기에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소서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소서, 작은 더위는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장마도 시작되었습니다. 장마가 지나면 불볕더위와 열대야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여러모로 참 쉽지 않은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힘든 시간이지만 이 소서절기 동안 논에 심겨진 벼는 그 어느 때보다 급속하게 성장합니다.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모는 뜨거운 기온과 높은 습도 속에서 자기의 몸집을 쑥쑥 키워갑니다. 무덥고 습한 여름철, 하루가 다르게 자라가는 벼들을 지켜보며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도 저렇게 어려움을 양분 삼아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정말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생에 어려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냉정한 말 같지만, 본디 생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 고통이 악마가 준 것인지,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는 우리가 그 고통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어려움과 고통에 짓눌려 자신 또한 또 하나의 가시가 되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아프게 찌르지 맙시다. 인간 모두가 어려움과 고통 앞에 작고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겸허히 인정하며 서로의 어려움과 아픔을 헤아리고 돌보며 살아갑시다. 거기서 더 나아가 벼가 어려움을 양분 삼아 열매를 키워 우리에게 밥으로 내어놓듯이, 우리 또한 고통을 양분 삼아 누군가가 먹을 만한 양식을 이 세상에 내어놓으며 삽시다. 바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무덥고 힘겨운 여름날이고 앞으로의 전망이 밝지 않지만, 그럴수록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주님 가신 길을 함께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