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사막 속 나무그늘처럼 (왕상 19:1~8) / 김재홍목사

새벽지기1 2024. 8. 20. 06:28

아합은, 엘리야가 한 모든 일과, 그가 칼로 모든 예언자들을 죽인 일을, 낱낱이 이세벨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하였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 그 곳에 자기 시종을 남겨 두고,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그 때에 한 천사가,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면서, 그를 깨웠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그의 머리맡에는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잠이 들었다. 주님의 천사가 두 번째 와서, 그를 깨우면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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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휴식 같은 사람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길 빕니다. 습하고 무더운 한 주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말 그대로 찜통더위입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습도가 무척 높았습니다. 강남 98%, 마포 99%, 파주, 이천, 진주는 100%였다고 합니다. 습도 100%란 공기가 수증기를 더 이상 머금지 못할 정도의 상태를 말합니다. 목회실에서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데 누군가 그러더군요. 우리 모두 만두 찜통 속에 들어간 만두 같다고. 온도와 습도가 적당해 맛있게 잘 익을 것 같다고. 찜통더위도 힘들지만, 불볕더위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대전에서는 불볕더위로 도로 중앙에 폴리우레탄으로 만든 분리대가 녹아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불볕더위 속에서 길을 걷다보면 사막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땡볕이 살을 파고들어 살이 익는 듯합니다. 그렇게 한두 시간 땡볕에 노출되면 정말 살갗이 타 나중에는 피부가 벗겨지기도 하지요. 한여름 땡볕 아래를 걷다가 가로수 그늘이라도 만나게 되면 한결 살 것 같아집니다.

7말8초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입니다. 휴가는 휴식의 시간이지요. 한자로 휴식休息은 쉴 휴休에 쉴 식息입니다. 쉴 휴는 나무목木에 사람인人이 합쳐진 글자입니다. 그늘을 크게 드리운 나무 밑에 사람이 서있는 모양입니다. 나무그늘 밑에서 사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쉬고 있는 모습은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에 쉼을 가져다줍니다. 그렇게 육신이 평온히 쉴 수 있을 때 우리는 숨도 평온히 회복할 수 있습니다. 쉴 식이 호흡에 대한 글자입니다. 쉴 식息은 스스로자自에 마음심心이 합쳐진 글자입니다. 여기서 스스로자는 코를 그린 것입니다. 숨이 코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코로 깊고 편안하게 오가는 것이 식입니다. 휴와 식을 같이 붙여 뜻을 풀면, 사람이 자연 속으로 들어가 몸을 편안히 하고 호흡을 자연스럽게 함으로 자신을 회복하는 게 휴식입니다. 다들 휴가를 어디로 가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디로 가든지 그곳에서 참된 휴식을 취하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휴가와 휴식을 소망하는 이유는 우리의 일상이 나무그늘보다는 사막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여러 힘든 일로 가득합니다. 일도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그 일과 관계된 사람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람도 사막 같은 사람이 있고 나무그늘 같은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막 같은 사람에게서는 나의 안녕을 고려하지 않은 뜨거운 것이 계속 쏟아져 나옵니다. 표정과 행동과 말이 다 뜨겁고 일방적입니다. 내게 자신을 과시하고, 나를 지배하려 하거나 나를 통해 자기의 욕망을 이루려 합니다. 그 앞에서는 내가 위축됩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와 있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게 됩니다. 그에 비해 나무그늘 같은 사람에게서는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시원하고 부드러운 바람 같은 것이 흘러나옵니다. 표정과 행동과 말 하나하나 속에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나를 지배하거나 나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 앞에서는 내가 나로 있어도 됩니다. 맘과 숨이 편안합니다. 그런 사람은 만나면 함께 오래 머물고만 싶어집니다. 그런 사람은 내게 그 존재 자체로 휴식 같은 사람입니다.

2. 엘리야, 로뎀나무, 천사


아합 왕 때 이스라엘에는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겨서 하나님이 내리신 벌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예언자 450명과 기우제 대결을 벌였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이 먼저 바알 신에게 기우제를 드렸습니다. 소를 한 마리 준비해 놓고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은 응답해 주십시오”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찔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였음에도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저녁이 될 때까지 바알의 예언자들이 미친 듯 날 뛰었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 때에, 엘리야는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지파별로 돌을 가지고 오게 하여 그 돌들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 위에 소를 잡아 제물로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위에 물을 부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이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이 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제물과 제단 모두를 불태웠습니다. 온 백성은 땅에 엎드려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대승이요 엘리야의 대승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여세를 몰아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모두 죽였습니다. 이후 하늘에서는 큰 비가 내렸습니다.

하나님과 엘리야의 승리 소식은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이세벨은 페니키아 왕의 딸로, 바알 숭배자였습니다. 이세벨은 남편 아합으로 하여금 바알을 숭배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세벨은 엘리야에 의해 바알의 예언자 450명이 죽임을 당한 것을 알게 되고는 격노했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바알에게 속한 예언자인 동시에 이세벨에게 속한 예언자였던 것입니다.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사람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 열왕기상 19:3은 엘리야가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도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3년의 가뭄기간 동안 권력자의 눈을 피해 숨어 지냈습니다. 이후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적인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큰 승리가 화가 되어 자기에게 돌아왔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이 두려웠고 또 다시 도망가야만 했습니다. 엘리야는 시종을 데리고 이스라엘의 최남단 브엘세바까지 도망갔습니다. 엘리야는 그곳에 시종을 남겨두고 홀로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의 남단에 있는 광야는 사막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사막 같은 이세벨을 피해 결국 사막 같은 광야로 들어간 것입니다. 어디를 가도 사막뿐이었습니다. 기댈 곳, 마음 둘 곳, 쉴 곳 하나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길을 가다가 로뎀나무를 발견하고 그 아래에 주저앉았습니다. 로뎀나무는 유대 남부 척박한 광야에 자생하는 높이 2미터 남짓한 작은 나무입니다. 쉴 곳을 만났기 때문이었을까요. 엘리야는 그 로뎀나무 그늘 아래에서 하나님께 자기의 아픔과 고통을 솔직하게 쏟아냈습니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엘리야가 대면하고 있는 악의 세력이 너무 거대하고 강한 것에 비해 자신은 너무 작고 무력한 존재였습니다. 엘리야에게는 앞날에 대한 소망과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그늘 아래에 그만 쓰러져 잠들었습니다.

갈멜산 대결의 승리자, 엘리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도망자, 패배자,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생각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로뎀나무 그늘 아래 지쳐 쓰러져 잠들었던 엘리야를 천사가 깨웠습니다. 천사는 엘리야에게 구운 빵과 물 한 병을 내밀며 먹으라 했습니다. 그뿐 이었습니다. 천사는 엘리야에게 ‘왜 도망쳤냐’ ‘예언자가 그렇게 나약해서 되겠느냐’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어떤 질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조용한 환대가 엘리야에게 힘이 되었던 것일까요. 하나님께 죽여달라 청했던 엘리야는 그 빵과 물을 먹고 마셨습니다. 살 마음이 난 것입니다. 피로가 덜 풀렸던지 엘리야는 그 빵과 물을 마신 뒤에 다시 잠들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천사는 엘리야를 깨워 그에게 빵과 물을 주며 말했습니다. “일어나서 먹으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엘리야는 죽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천사는 엘리야에게 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엘리야는 천사의 말대로 일어나서 음식을 먹고 마셨습니다. 힘이 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야할 곳이 어딘지 생각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 호렙산이었습니다.

3. 사막 속 나무그늘처럼


그런데 그 천사는 누구였을까요? 천상의 존재? 아니면 엘리야를 부엘세바까지 따라왔던 시종? 아니면 그 척박한 광야에 살던 베두인족? 아니면 우연히 그 곳을 지나던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누구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엘리야를 위해 행한 일입니다. 로뎀나무가 지쳐 쓰러진 엘리야에게 휴식이 되어 준 것과 같이 천사는 엘리야에게 휴식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 둘이 함께 있던 시간이 얼마간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엘리야는 그와의 만남을 통해 휴식할 수 있었습니다. 지친 몸과 맘을 쉴 수 있었고 새롭게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죽으려던 마음을 버리고 자기다움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자신을 더 이상 도망자와 패배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하나님이 계신 호렙산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고, 그곳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한번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시리아의 왕으로 세우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엘리야의 후계자로 세우게 하셨습니다.

로뎀나무와 천사는 우리가 아는 이와 많이 닮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과 로뎀나무와 천사의 모습은 아주 비슷합니다. 로마는 군대를 앞세워 사람들에게 무거운 세금과 군역과 노역을 강제했습니다. 성전은 율법을 앞세워 사람들에게 성전세 납세와 계명 완수를 강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지쳐 쓰러졌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지쳐 쓰러진 이들을 위해 당신의 몸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셨고, 목마른 자에게는 마실 것을 주셨으며, 병든 자는 고쳐 주셨고, 귀신들인 자는 귀신을 쫓아내 주셨고, 친구가 없는 자에게는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진정한 휴식을 맛보았고, 그 휴식을 통해 자신의 본 모습, 하나님 자녀의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와 천사를 만난 후 자신의 본 모습을 회복하였던 것처럼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자기들의 본 모습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더 이상 로마가 말하듯 제국의 소모품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며 율법이 말하듯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달았습니다.

지난 수요일, 무척이나 습하고 무덥던 날, 김민기 선생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아침이슬, 상록수 등 가슴에 깊은 울림과 감동을 주는 많은 노래를 만들었던 음악인이었습니다. 그는 가수이기도 했지만 무대 연출가이기도 했습니다. 90년대 초반 대학로에 학전 극장을 열어 수많은 공연을 만들어 올렸습니다. 김민기 선생은 대학로에서 연극하던 이들에게 처음으로 공연계약서를 작성하게 한 사람입니다. 기본출연료와 배당료와 4대보험을 처음으로 시행했습니다. 공연 수익금을 거의 균등하게 배우와 스텝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배우들의 출연료가 거의 없다시피하던 시대였습니다. 한 연극인은 선생님 덕분에 처음으로 전셋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허우적거리다가 구조당한 느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김민기 선생은 배우 한 명 한 명을 소중히 대해 주었고 한 인간으로 사회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게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서울 신정동에서 나이 어린 여공들을 위해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 야학도 운영했습니다. 한때 군사 정권시절에는 공장에 들어가 일하기도 했는데 그곳에서는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있던 공장노동자들을 위해 새벽마다 공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김민기는 단체결혼을 하는 공장노동자 부부를 위해 축가도 만들어 주었는데 그 축가가 바로 <상록수>였습니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김민기, 그는 그 자신이 한 그루의 상록수였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의 쉴 그늘이 되어 주었습니다. 김민기, 그는 휴식의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는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고초를 겪는 다른 많은 사람의 휴식이 되어 주었습니다. 많은 이가 그 덕분에 인간답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그가 만든 노래를 부르며 사막과도 같았던 어려운 시대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삶의 길이 그와 같습니다. 광야와 사막 같은 세상 속에서 광야와 사막에 삼킴을 당해 또 하나의 광야와 사막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로뎀나무와 천사와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지친 영혼이 찾아와 쉴만한 그늘이 되어야 합니다. 그에게 우리가 가진 빵 하나 물 한 병을 내어주어 그가 나와의 만남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서의 가르침이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무더위가 계속될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번 폭염이 지난 후에도 우리의 세상살이는 자주 사막과 같을 것입니다. 지금 있는 자리가 사막 같은 곳이라 하더라도 믿음의 뿌리를 더욱 깊게 내려 주님이 주신 힘을 양분 삼아 한 그루의 나무로 성장하십시오. 그래서 주위에 지친 이들에게 쉴만한 그늘을 드리워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휴식이 되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진정한 휴식이 되어 주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리고 우리 청파교회가 점점 사막으로 변해하는 이 세상에 휴식의 땅, 푸른 언덕의 지경을 넓히는 교회가 되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감사한 마음으로 그 귀한 일을 기쁘게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