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동거동락 (마11:16~19) / 김재홍목사

새벽지기1 2024. 8. 23. 06:02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 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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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큰둥한 사회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8월이 되었습니다. 7일은 입추고 14일은 말복이고 22일은 처서입니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여름이 더 무더워지고 기후 변화가 말 그대로 변화무쌍해졌지만, 그래도 8월말이 되면 더위가 한풀 꺾이고 조금 시원해지지 않을까요?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8월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와 다음 주에 아동부 성경학교와 청년부 수련회가 있는데 두 행사 모두 유익하고 즐겁고 안전하게 치르면 좋겠습니다.

파리 올림픽이 진행 중입니다. 가끔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는데, 선수들의 신기에 가까운 플레이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오고 우리나라 선수들이 메달을 따면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합니다. 탁구 혼합복식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함께 메달을 따고 같이 웃으면서 셀카를 찍는 모습은 올림픽이 왜 계속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예전만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우리나라 선수들 경기만큼은 관심을 가지고 챙겨 보고 메달이 걸린 경기는 모두들 마음을 졸이면서 함께 응원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저도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을 봐도 좀 시큰둥합니다. 큰 관심이 없습니다.

‘시큰둥하다’, 저는 요즘 우리나라 국민의 기본정서가 ‘시큰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올림픽뿐 아니라 자신의 삶 그밖에 있는 것들에 대한 마음의 기본 값이 ‘시큰둥’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시큰둥하다’에 대한 사전의 정의는 “달갑지 아니하거나 못마땅하며 시들하다.”입니다. 그 사람이나 그것 혹은 그 일에 대해서 마음이 시들하여 신경을 별로 쓰고 싶지 않은 상태가 ‘시큰둥’입니다. 사람들은 본인 삶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사회, 정치 문제에 대해서도 시큰둥합니다. 그런데 그럴 만도 합니다. 국민들은 사회와 정치 지도층 인사들에게 투표와 여론조사 등을 통해 소망하는 바를 계속 피력하지만, 지도자들은 그런 국민의 소망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오래도록 이루어지지 않는 소망은 사람을 지치게 만듭니다. 사람들 중에는 본인의 정신건강을 위해 정치뉴스는 가급적 보지 않는다는 이가 늘고 있습니다. 환경문제도 그런 것 같습니다. 기후 위기다, 기후 재앙이다, 엄청난 무더위와 역대급 홍수라고 해서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작은 실천이 이미 큰 흐름을 형성한 재앙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또 그런 말들을 너무 자주 오래 듣다보니 만성화되어 이제 아주 쇼킹한 환경 뉴스가 아니면 ‘음 또 홍수가 났구나’ ‘또 최고 기온이구나’라며 시큰둥합니다. 북한 문제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도, 수많은 난민도,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시큰둥합니다. 나의 계획, 나의 건강, 나의 가족, 나의 돈, 나의 기쁨과 즐거움 이외의 것에 대해 우리는 점점 시큰둥해지고 있습니다.

2. 세례 요한과 예수


예수님이 사시던 이스라엘 사회는 오늘 우리사회보다 훨씬 더 시큰둥한 사회였고 사람들은 오늘 우리보다 훨씬 더 지쳐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시큰둥한 사회 풍경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감정의 교류가 전혀 없는 사회, 나의 기쁨과 아픔이 너의 기쁨과 아픔이 되지 못하는 사회, 그 정도로 다들 크게 지쳐 있던 사회가 그 사회였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 오래 동안 고통에 부대끼며 살아 고통이 굳은살처럼 마음에 박혀 다른 이의 기쁨과 아픔에 반응하지 못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바벨론 포로기를 거쳐 페르시아와 헬라의 지배를 거쳐 로마의 식민지배까지 수백 년 동안 큰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 35년도 큰 고통과 상처를 만들어놓았는데 수백 년에 걸친 제국의 지배는 유대인들에게 깊은 절망과 어둠을 만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유대의 지도자들인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성전체제유지에만 신경 쓰고 그 체제 유지를 위해 백성들을 이용할 뿐 백성들을 위로하지도 못했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지칠 대로 지친 유대인들 앞에 위로와 희망이 되어 나타난 이가 있었으니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자신에게로 나와서 세례를 받아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금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요한은 광야로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낙타털옷을 입고 지냈습니다. 좋은 유기농 식품을 먹고 비싼 가죽 옷을 입었다는 말이 아니라 의식주를 자연의 것으로 해결하며 검소하고 비세속적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은 세례 요한을 존경했고, 그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느꼈고 구원의 길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나와서 세례를 받고 구원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물었습니다. 구원의 길을 묻는 이들에게 세례 요한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라면,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군인들이라면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을 만족하게 여겨라.”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답변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만 살면 세상은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세상이 되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보며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저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세례 요한은 왕 헤롯 안티파스의 부도덕한 결혼에 대해서 비판하였습니다. 요한은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왕은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자 예수님이 등장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처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말씀, 백성들이 듣고 위로를 받고 그릇된 삶을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게 하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결은 비슷하면서도 좀 달랐습니다. 요한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람들과 떨어져 광야로 나가 자주 금식하며 절제된 생활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다소 장례식 느낌이 나는 엄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은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혼식 잔치 느낌이 나는 즐거운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엄숙한 세례 요한을 따르기도 했으나,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즐거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3. 먹고 마심의 두 종류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 모두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백성이 자기들보다 요한과 예수를 더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았을 때, 세례 요한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너무 과도하게 금식하는 자였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귀신이 들렸다’라고 했습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말은 ‘세례 요한이 결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고, 그가 지나치게 금식할 수 있는 힘을 귀신에게서 받았다.’는 말이었습니다. 또 그들이 보았을 때, 예수는 너무 과도하게 먹고 마시는 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라고 말했습니다. 단지 먹고 마신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죄인과 먹고 마셨음을 문제시한 것입니다. 죄인과 먹고 마셨으니 예수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지 않는 귀신, 죄인과 먹고 마시는 죄인, 그것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폄훼하기 위해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만든 프레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프레임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사람들은 요한과 예수님에게서 귀신과 죄인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율법학자도 먹고 마셨습니다. 그들은 그들끼리 먹고 마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그 주인이 없을 때 먹고 마시고 취한 종들과 같다고 비판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최고로 경건한 자 같았으나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자기 욕심을 한껏 채우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보자면,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 종류는 온갖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자기들만 먹고 마시는 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종류는 자기 혼자 먹고 마실 수도 있지만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여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기 위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자입니다. 먹고 마심은 단순히 음식섭취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상징합니다.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자기들끼리 먹고 마셨다는 것은 그들은 그들끼리만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렸다는 말이고, 예수님께서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약자들과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도 끝나지 않고 계속 지속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나를 전하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라는 예수님의 명령 때문이었을까요? 그보다는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이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맛보았던 기쁨과 감격과 즐거움에 대한 기억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내게 다가와 내가 한낱 어부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반석이 될 수 있음을 일깨워 주셨던 분, 결정적인 순간 당신을 배신한 나를 용서해 주셨던 분, 인생이 어둠 속에서 시작해 어둠 속에서 끝날 줄 알았던 내게 다가와 내가 그 어둠을 물리칠 빛이 되어야 함을 일깨워 주셨던 분, 죄인인 나와 함께 먹고 마심으로 나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세상에서 맛보지 못했던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게 해주셨던 분. 바로 그분으로 인해 맛보았던 기쁨과 감격과 즐거움을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되살려 보려는 소망으로 인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 아닐까요?

4. 동거동락


정일우 신부를 아십니까? 1935년 미국 일리노이 출생. 본명 존 데일리. 1960년 서강대 철학과 교수로 부임했다가 군사정권시절에 입으로만 정의를 말하는 게 불편해 빈민촌에 들어가 활동했던 예수회 신부입니다. 청계천과 양평동 빈민촌에 들어가 빈민들과 같이 살았습니다. 철거 반대 시위도 하고 철거민들이 새로 이주한 시흥에서는 사람들과 함께 마을을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상계동을 거쳐 노년에는 충북 괴산에 귀농하였습니다.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를 지어 전국 각처의 성당들을 통해 농산물을 판매하여 생명살림과 농민 자립을 도왔습니다. 그는 미국인이었지만 한국인이었습니다. 노년에 가족들을 만나러 미국에 갔을 때는 자꾸만 가족들에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한국어로 이야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늘 긴장과 갈등이 있던 철거현장에서도 틈만 나면 사람들의 흥을 돋우웠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로마서의 말씀 그대로 정일우 신부는 사람들이 울 때 같이 울고 웃을 때 같이 웃었습니다. 신부님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한국 땅에 묻히셨습니다. 사람들은 정일우 신부님과 함께 했던 시간을 이런 말로 추억했습니다. ‘정 신부님이 계신 곳은 언제나 즐거웠다.’ ‘가난했지만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정 신부님 때문에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신부님의 회갑 잔치는 밤까지 이어졌는데 마을 광장 위 건물에는 파이어 레터, 불글씨로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가 쓰여 있었습니다. 신부님 49제 추모미사 영상을 최근에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 같이 신부님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즐겁게 추모하길 원했습니다. 모두 그렇게 하는 걸 신부님이 원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추모의 자리였음에도 그들은 신나게 기타를 치며 신부님의 영정을 들고 춤을 추며 그가 좋아했던 노래를 흥겹게 불렀습니다. ‘노란 샤스 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마음에 들어’

세상은 점점 냉랭해지고 어두워지고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더욱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시큰둥해지며 자기의 기쁨과 즐거움만을 위해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 교회, 나라, 정의, 국민을 내세우지만 결국 자기만의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 것입니다. 그런 세상은 독거독락의 세상입니다. 독거독락의 세상은 올바른 세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꿈꾼 세상은 동거동락의 세상입니다. 함께함이 서로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사람이 됩시다. 나만의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라 많은 이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 삽시다. 가능하면 작고 어려운 이웃과 생명들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 삽시다. 곧 입추입니다. 아직 여름의 기운이 성성하지만 입추라는 절기가 예언자처럼 서서 곧 가을이 옴을 알릴 것입니다. 우리 청파교회가 독거독락의 세상 속에 곧 동거동락의 세상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예언자처럼 우뚝 서면 좋겠습니다.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그 귀한 일을 능히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