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생수가 강물처럼 (요 7:32~38) / 김재홍목사

새벽지기1 2024. 9. 9. 07:27

무리가 예수를 두고 이런 말로 수군거리는 것을, 바리새파 사람들이 들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성전 경비병들을 보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잠시 동안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분께로 간다. 그러면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내가 있는 곳에 너희가 올 수도 없을 것이다." 유대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가려고 하기에, 자기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가? 그리스 사람들 가운데 흩어져 사는 유대 사람들에게로 가서, 그리스 사람들을 가르칠 셈인가? 또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내가 있는 곳에 너희가 올 수도 없을 것이다' 한 말은 무슨 뜻인가?"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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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에 대한 그리움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말복을 지나 처서가 코앞이지만 날은 여전히 무덥습니다. 서울은 낮 최고 기온이 연일 33도 34도에 이르고, 밤 기온이 25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열대야가 26일째 지속되며 역대 최장을 기록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코로나까지 확산 중입니다. 한 달 사이에 코로나로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9배로 늘었습니다. 최근 제 주변에도 코로나 확진자가 팬데믹 때보다 더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이제 곧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은 분명히 올 겁니다. 가을이 오면 더위는 지난 일이 되고 코로나는 한풀 꺾이겠지요. 그때까지 더위도 먹지 마시고, 냉방병과 코로나도 조심하면서 모두 건강히 잘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더위가 심해서 그런지 물에 대한 그리움이 부쩍 커지는 요즘입니다. 요즘 저에게는 물에 대한 그리움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마시는 물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저는 산티아고 순례 중 물을 마시지 못해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전날 산에 있는 숙소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 산을 내려오는데 물을 얻어 마실 수 있는 곳도 없고 생수를 구입할 수 있는 곳도 없었습니다. 물을 마시지 못한 채 땀까지 흠뻑 흘리며 3시간 이상 계속 걷다보니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걷다가 길옆 덩굴 사이에 버려져있던 작은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를 발견했습니다. 작은 송이를 몇 개 따서 입으로 훑어 먹었는데 그때 마셨던 포도즙은 제게 생명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마셔야 하는 물은 마시는 물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가수 한대수가 1970년대에 <물 좀 주소>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마르요 물 좀 주소” 걸걸한 목소리로 부르는 ‘물 좀 주소’라는 가사가 아주 강렬하게 느껴지는 노래입니다. 1974년 군사정권은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했습니다. 한대수가 달라는 물은 그냥 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유였습니다. 그 다음 해인 1975년에 시인 김지하는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를 발표했습니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이는 곧 노래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노래 또한 금지곡이 되었지만 많은 이가 따라 부르는 시대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물을 마시지 못하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자유와 민주는 물과 같습니다. 자유와 민주를 마시지 못하면 인간은 인간답게 살 수가 없습니다. 많은 이가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며 지켜온 ‘자유와 민주’라는 생명수를 소중히 지켜 나가면 좋겠습니다.

물에 대한 그리움 중 다른 하나의 그리움은 몸을 담글 수 있는 물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다들 여름휴가 다녀오셨습니까? 맑고 시원한 계곡, 시냇물, 강과 바다에 몸을 담그셨습니까? 저는 여름 바다에 대한 기억들도 있지만, 여름 하천에 대한 강렬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11년 전인 2013년 여름, 이맘때, 우리교회의 청년들과 자전거로 제주도 일주를 했습니다. 10여 명의 청년들과 자전거를 타고 제주 해안도로를 3박4일에 걸쳐 한 바퀴 돌았습니다. 중간지점을 지나갈 때 마침 강정천을 만났습니다. 강정천은 민물이 흔치 않은 제주에서 보기 드문 큰 하천이었습니다. 무더위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쳤던 청년들은 자전거를 길옆에 팽개치고 옷을 입은 채로 모두 하천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지하에서 올라온 암반수라 아주 맑고 시원했습니다. 헤엄도 치고 깊은 곳도 있어 다이빙도 하면서 몸의 열기를 식히고 피로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맑고 시원한 물’하면 저는 그 강정천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맑고 시원한 물’만 사람의 열기를 식히고 피로를 풀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맑고 시원한 사람’도 그러합니다. 마음이 맑고 시원한 사람을 만나면 이런저런 일로 뜨거워지고 피곤해졌던 몸과 마음의 열기가 식고 피로가 풀립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강정천처럼 맑고 시원한 사람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2. 물은 정의와 희망과 생명


오늘은 물에 대한 성경 말씀을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모스는 주전 8세기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남 유다 출신이었지만 북이스라엘에 가서 예언활동을 했습니다. 그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2세가 다스리던 시기로 북이스라엘 역사상 최대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중요한 무역로였던 시리아와 요르단 지역까지 점령했습니다. 영토와 부가 늘어나며 왕족은 맘껏 풍요를 즐겼습니다. 여름별장과 겨울별장을 지었고, 상아로 만든 침대를 사들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백성들은 계속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빈부격차가 커진 것입니다. 지배층은 가난한 사람을 신발 한 켤레 값에 팔았습니다. 곡물세를 높여 받았습니다. 포도원 농부들은 포도원을 가꾸는 일을 하면서도 포도주를 사서 마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 정도의 돈도 없었던 것입니다. 지배층은 그런 중에 하나님께 절기 제사를 드리고 풍성한 희생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바친 제물을 받으시고 자신들에게 복을 주신다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모스서 5:21,22,24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번영과 풍요가 그 사회의 지배층의 것으로만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번영과 풍요보다 공의와 정의가 더 중요합니다. 공의와 정의가 물처럼, 강처럼 유유히 흐를 때 올바른 번영과 풍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에도 물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빌론에 의해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가 멸망한 후 많은 이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살았습니다. 그중에 제사장 출신의 에스겔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 무너졌던 하나님의 성전이 다시 세워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아주 크고 웅장하게 세워진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물은 생명수였습니다. 처음에는 시냇물처럼 흐르던 물이 나중에는 큰 강물이 되었습니다. 강은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강의 양쪽 언덕에는 나무가 자라나고, 물 속에는 물고기가 가득하고 어부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지으실 것이며 그곳에서 생명의 기운이 강물처럼 흘러나와 죽어가던 이스라엘을 되살릴 것이라 희망한 것입니다. 에스겔의 비전속에 등장한 새 성전과 그 성전에서 흘러나와 죽어가던 모든 것을 되살리는 생명의 강물은 오랜 세월 절망의 땅 바빌론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희망의 강물이 되어 흘러갔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가을 추수감사절기인 초막절 마지막 날이 되면 제사장은 실로암 연못에 가서 물을 떠옵니다. 그리고는 성전의 제단에 제물을 올려놓고 그 위에 물을 붓습니다. 물을 부을 때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기원합니다. “올 한 해 풍성한 비를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풍성한 비를 내려 주셔서 농사가 잘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예수님은 실로암의 물이 아니라 당신이 생명의 물이라고, 그러니 나라는 물을 마시라고, 나를 마신 사람은 그 자신도 생명의 샘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발언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의 말씀이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에스겔의 환상 속에 나온 성전에서 솟아난 샘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를 일으켰던 것처럼, 예수님의 발길이 가 닿는 곳마다 죽어가던 생명이 살아났습니다. 병든 자가 나음을 입고,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생명수를 마신 사람들은 그 사람 안에서도 생명수가 나와 병든 자가 낫게 하고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생명샘을 마시고 생명샘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

3. 생수가 강물처럼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의 생애는 참 고된 생애였다는 생각을 자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육신의 안식처가 없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마음을 의지할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뜻이요, 적이 많았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만 보아도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성전으로 경비병들을 보냈습니다. 자기를 잡기 위해 종교권력자들이 보낸 군인들이 있는데, 예수님은 그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게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치 냇물이 큰 바위를 만났다고 해서 흐르기를 멈추거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위를 돌고 넘어 계속 아래로 흘러가듯, 예수님은 어려움을 만나도 뒤로 물러서거나 도망가지 않으시고 가야 할 길을 계속 가셨습니다. 낮은 곳으로 흘러가 죽어가던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서 그런 힘을, 그런 샘물 같은 힘을, 강물 같은 힘을 얻으셨던 것일까요? 사람의 힘은 습관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습관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기도.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과 고된 일정을 보낸 후에도 다음날 새벽이면 예수님은 여지없이 일어나 홀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여러 말로 표현이 가능하지만, 오늘의 맥락 속에서 이야기하자면, 기도는 하늘의 생명샘물로 나를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내면을 하늘의 생명샘물로 가득 채웠기에 그 생명샘물이 예수님에게서 나와 사람들에게로 흘러간 것입니다.

몇 년 전 아프리카 케냐 차보 지역에는 2년 가깝게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동물들이 속절없이 죽었습니다. 그런 죽음의 땅에 매일 물 1만 리터씩을 차에 싣고 가 메마른 웅덩이에 쏟아 동물들이 물을 마시게 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패트릭 므왈루아. 그는 평범한 콩 농사꾼이었습니다. 동물들이 죽어가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수 트럭에 물을 싣고 45킬로미터를 달려가 매일 동물들에게 물을 주었습니다. 이제는 그의 파란 트럭만 다가가도 동물들이 먼저 알고 트럭 주변으로 다가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패트릭은 어디서 그런 마음을 얻었을까요? 패트릭은 말합니다. 가뭄은 지구온난화 때문에 생긴 것이고, 지구온난화는 인간 때문에 생긴 것이기에 동물들의 죽음은 우리 책임이라고. 동물들이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고. 모든 동물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패트릭은 자기의 마음속을 불쌍한 생명에 대한 연민, 속절없이 스러져가는 생명에 대한 인간의 책임감으로 채웠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만 리터의 물을 흘려보내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리지만 만 리터의 물을 채우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을 겁니다. 매일 저수 차량에 물을 채우는 그 시간이 패트릭에게는 동물들과 지구와 인간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었을 겁니다.

예술 영화계의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세크리파이스>(희생)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아버지가 나이 어린 아들과 함께 해변가에 거의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를 심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 이상스러운 행동을 하면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 “아주 먼 옛날, 한 수도원에 늙은 수도승이 살고 있었단다. 이름은 팜베였지. 그는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산에 심었단다. 그리고 제자 조안 코롭에게 말했지. ‘나무가 살아날 때까지 매일 물을 주도록 해라.’ 조안은 매일 이른 아침 물통에 물을 담아 산에 올라가서 죽은 나무에 물을 주고는 저녁이 되어서야 수도원으로 돌아오곤 했지. 그렇게 3년 동안 물을 주던 어느 날 조안는 나무에 온통 꽃이 만발한 것을 발견했단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소련에서 이탈리아로 망명해 나오면서 어쩔 수 없이 소련에 남아야만 했던 아들을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적 삶이 거의 불가능한 나라, 궁핍과 통제가 일상화되어 있던 나라, 마치 식민지와 같은 나라에서 매일을 어떤 자세로 견뎌야 하는 지를 일러준 것입니다. 나무를 심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 마디의 말을 덧붙입니다. “반복적으로 꾸준히 하는 일에는 덕스러움이 있단다. 매일 정확히 똑같은 시간에 어떤 행동을 의례를 행하듯 정성스럽게 반복한다면 세상은 변하게 될 것이다.”

정성을 담아 반복하는 의례, 그래서 나 자신과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의례가 있다면 그것이 곧 예배이며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예배와 기도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정성과 나 자신과 세상을 바르게 바꾸려는 소망이 담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자꾸만 절망과 욕망을 우리의 마음에 담게 만듭니다. 절망과 욕망을 마음에 담은 우리는 이 세상에 절망과 욕망밖에 내놓을 것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이 주시는 샘물로 자신을 채우기 위해서 시간과 마음을 따로 내셨습니다. 하물며 우리야 어떻겠습니까? 죽은 나무에 물을 줘야 하는 것 같은 상황에도 좌절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매일매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그리고 기도합시다. ‘주님, 저에게 예수라는 샘물을 부어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정의의 샘물을 부어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희망의 샘물을 부어 주십시오.’ ‘ 주님, 저에게 생명의 샘물을 부어주십시오.’ 우리 내면을 예수와 정의와 희망과 생명의 샘물로 가득 채웁시다. 그리고 그 샘물을 ‘물 좀 주소’ 절규하는 이 시대의 목마른 사람들과 생명들에게 흘려보냅시다. 우리가 꾸준히 그런 예배와 기도와 실천을 쉬지 않을 때, 언젠가 우리는 생명수가 강물처럼 이 땅 곳곳에 흘러가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려내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기쁨의 그날을 맞을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